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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장차 무엇을 하시려고 합니까?”
갑작스런 아내의 질문에 신규식은 좀 뜨악해졌다.
“몰라서 물으시는 것은 아니지요?”
“제 말은 당신 삶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조선의 독립이오.”
“그게 아니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어쩌시겠습니까?”

신규식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숟가락을 상에 놓고는 아내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하지만 상한 한쪽 눈이 흘겨지는 것은 그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독립을 목표로 삼으시지 마시고 독립운동 자체를 목표로 삼으시는 것이 옳다는 말씀입니다.”
“되지도 않는 일에 노심초사하며 살아가란 말씀이오?”
“역사를 볼 때 당대에서 결판나지 않는 일이 더 많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남편은 흘겨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더니 딸에게로 눈을 돌렸다.
“명호야! 어머니 말이 맞는 것 같지 않으냐?”
“그런 것 같습니다.”
“아침 잘 먹었소.”
남편은 다소 기분이 전환된 듯싶었다.

남편은 아내에게 오늘 바람을 쏘이고 싶으니 말을 빌려다 놓으라고 일렀다. 말을 빌려주는 곳은 여러 군데 있었다. 말 대여점의 주인은 주로 일본인들이었다. 지금껏 남편은 일본인의 말을 빌려 타 본 적이 없었다. 말이 꼭 필요할 때면 아는 사람의 것을 빌려 타든지 아니면 늙은 조랑말일지언정 조선인 대여점을 이용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좋은 말로 골라 오라고까지 했던 것이었다.

신규식은 소공동 환구단 앞을 지나갔다. 오색으로 치장된 가마 둘이 앞에서 오고 있었다. 그는 말의 속도를 늦춰, 가마가 편히 지나도록 길을 내주었다. 기생들의 가마 나들이였다. 요즘 들어 가마 타는 여자는 십중팔구 기생이었고, 그 숫자는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었다.

숭례문 시장의 가게에도 제법 많은 상품들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사 가는 사람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숭례문 옆에서 전차 선로 보수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모두 흰 옷 입은 조선인들이었다. 경인선 철로가 개통된 지 꽤 되었지만 경성역 서쪽으로는 온통 논과 밭뿐이었다.

옹기 장사 몇 명이 대여섯 개씩의 옹기를 열십자 모양으로 지게에 묶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말을 세워 길을 터 주었다가. 다시 남쪽으로 말을 몰았다. 높은 장승 옆을 지나 작은 마을의 길을 벗어나자, 시야가 훤히 트였다. 한강이었다.

말과 함께 나루를 건넌 후, 남행으로 내달려 그가 이른 곳은 양재역, 이른바 말죽거리였다. 양재역은 육로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리고 조선 시대 이래 사상(私商)들의 영업이 성행하던 곳이었다. 어제 그는 책을 읽다가 양재역과 말죽거리가 소개되는 곳에서 책장을 멈추고 오랫동안 깊은 생각에 빠졌었다. 그래서 직접 관찰하고 싶어 바람도 쏘일 겸 달려온 것이었다. 물론 그가 양재역에 처음 와본 것은 아니었다. 양재역은 한양과 고향을 오갈 때마다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었다.

조선 초부터 말죽거리에는 공무 여행자에게 마필과 숙식을 제공하는 양재역이 있었다. 당연히 인근에는 주막도 많았다. 양재역은 한양 이남 경기도 전체 역을 통할하는 곳으로 정 6품의 찰방이 책임자로 근무하던 주요 역이었다. 찰방 아래에는 역장과 역리와 역졸이 있었다. 그들은 각종 정보를 탐방하고 수집하여 조정에 보고하는 임무도 띠고 있었다.

먼 길을 온 후, 한양으로 들어가려는 나그네들이, 피로에 지친 말을 쉬게 하면서, 죽을 끓여 먹이고, 자신도 저녁을 먹고 머무는 곳이 이 말죽거리였다. 지방으로 가는 사람들도, 압구정 등지에서 배웅 나온 친지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술과 밥을 나누고 헤어져, 저녁나절에 찾아드는 곳도 이 말죽거리였다. 그들은 주인을 불러 천릿길을 가야 할 자기 말에게 죽을 많이 먹여 달라고 부탁하고는 했다.

나그네들에게 여행은 나름대로 새롭고 의미 있는 경험이었겠지만, 주막 주인에게 그것은 심드렁하기 짝이 없는 일밖에는 되지 않았다. 오고 가는 사람 중에는, 삼백 리 길도 있고 오백 리 길도 있을 터인데, 나그네들은 하나같이 천릿길을 왔거나 간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주막 주인이 세상에 태어난 후 가장 많이 들어 본 말은 자기 이름이었을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천릿길’이라고 하면 그것은 거지반 맞는 말이었다.

신규식은 어제 읽은 역사적 사실들을 골똘히 반추하고 있었다. 그는 무엇인가를 이 말죽거리에 견주어서 생각하고 있었다. 최근 얼마 동안 그는 막혀 버린 민족의 활로와 삶의 목표 상실로 절망하고 있던 차였다. 국내 활동은 불가능해진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러시아로 떠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신규식은 그것은 망명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망명이 아닌 새로운 시작은 무엇일까를 놓고 그는 몇 달째 고민해 오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어제 조선사를 읽으며 말죽거리를 새로이 발견한 것이었다.

말죽거리는 아주 예민한 곳이어서 조선 시대의 두 사화와도 관련이 있었다. 명종 2년 9월이었다. 그 때는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있었다. 부제학 정언각은 전라도로 가는 딸을 전송하려고 이곳까지 왔다가 붉은 글씨로 쓴 대자보를 발견했다. 그는 즉각 대궐에 보고하였다. 대자보의 내용이 조정 권력을 위협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이용하여 문정왕후는 반대파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른바 정미사화였고 다른 말로는 ‘양재역 벽서의 옥’이라고도 했다.

또 말죽거리는 왕이 피난을 갈 때에도 경유하던 곳이었다. 인조 2년에 평안감사 이괄은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한양으로 쳐들어 왔다. 이른바 이괄의 난이었다. 반군이 개성을 지나 벽제에까지 이르렀을 때, 인조는 남행 피난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인조는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말죽거리에 이르렀다. 그는 이곳에서 팥죽을 먹으며 기력을 회복하고는 과천을 거쳐 공주까지 감으로써 화를 모면하고, 훗날 한양에 복귀할 수 있었다.

신규식은 생각해 보았다. 양재역과 말죽거리는 한양으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지방으로 쳐 달리는 데 꼭 필요한 교두보 같은 곳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사람들의 정체와 옥석이 구별되지 않는 장소이기도 했다. 게다가 온갖 정보를 알아낼 수 있는 곳이었으며, 쉽게 한양을 넘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했다.

그는 조선을 한양으로 축소하여 생각하고 있었다. 한양을 되찾으려면 한양 역내에서의 투쟁은 오히려 불리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내 항쟁은 희생자만 크게 낸 채 실패한 것이라고 분석해 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멀리 하남도나 강원도에까지 가서 한양을 되찾기는 더 어려웠다. 언제라도 한양 입성을 할 수 있는 곳이라야 그것은 가능했다. 그는 말죽거리 같은 곳을 찾아가 그곳에서 조선 탈환을 도모해야 한다는 신념을 굳히고 있었다.

신규식은 말고삐를 힘차게 돌렸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모처럼 장춘단을 찾고 싶었다. 한강을 건넌 그는 한남 나루에서 종남산으로 말을 몰았다. 장춘단에는 무관들의 신위가 모셔져 있었고, 그들은 대부분 신규식의 선배 무관들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이겨 기세가 오르던 일본은 같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질시와 견제를 한꺼번에 받게 되었다. 프랑스와 독일과 러시아는 청일전쟁의 노획지인 요동반도를 청국에 반환하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이른바 ‘삼국간섭’이라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물론 일본의 세력 확장에 제동을 걸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은 일단 그들의 간섭을 수용함으로써 유럽 열강들에게 굴복하는 듯한 자세를 보였다. 조선에서는 이를 러시아의 강세와 일본의 퇴조세라고 임의로 파악했다. 그리하여 민비가 주도하는 조선 정부는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제휴하여 친일 세력 압박에 나서게 되었다. 조선 정부는 친일 내무대신 박영효 등을 해임하고  친러 경향을 띠는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켰다.

이에 당황하게 된 일본은 사무라이 출신 미우라를 주한 일본 공사로 파견했다. 수도승으로 가장한 미우라는 비밀리에 흉계를 꾸몄다. 그는 새벽 시간을 틈타 일본의 자객들과 한국의 양아치들을 몰고 경복궁에 난입했다. 궁내대신 이경식과 수비대장 홍계훈을 죽인 그들은 왕과 왕비의 침소에 흙발로 뛰어 들었다. 그들은 왕의 용의를 칼로 찢고 세자의 목을 칼등으로 내리쳤다. 그리고는 왕비를 끌어내 난도질했다. 왕비는 세자의 이름을 부르다가 숨이 끊겼다. 자객들은 핏발선 눈으로 왕비의 몸에 이불을 씌워 대궐의 뒷마당 숲으로 끌어냈다. 그들은 석유를 뿌리고 성냥불을 켜달렸다. 얼마 후 재를 수거하여 우물 속으로 밀어 넣은 그들은 살쾡이처럼 대궐을 빠져 나갔다. 후세 사람들이 을미사변이라 이름붙인 이 살인극은 이다지도 참혹한 것이었다.

장춘단은 이때 희생된 장병들과 임오군란, 갑신정변 때 대궐을 지키다 죽은 문무관들의 신위를 모셔 놓고 제사를 올리는 곳이었다. 이런 점에서 장춘단은 항일의 성지라고 할 수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신규식은 그들의 신위 앞에서 필경 눈물을 참지 못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울지 않았다. 그는 엄숙히 절하고 묵념했다. 그리고는 바삐 말에 올랐다.

신규식은 김인용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김인용이 한양에 온 지 해포가 되었건만, 상경한 다음 날 찾아가 건성으로 인사하고는 한 번도 그를 본 적이 없었다. 김인용은 신규식의 친척이었다. ‘처삼촌 산소 벌초하듯 한다’는 속담이 있었다. 김인용은 신규식의 처 조정완 부친의 사촌이었다. 그러니 처삼촌보다도 더 먼 촌수였다. 김인용은  젊었을 때 일확천금을 이룬 사람이었다. 중국에서 아편 사업을 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확인할 수는 없는 거였다. 신규식이 김인용을 찾기로 한 것은 그가 중국을 잘 알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리 오시오.”
신규식은 김인용의 대문에서 하인을 불렀다. 그가 ‘오너라’ 하지 않고 ‘오시오’ 하는 하인 호출법은 지인들 사이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덧붙이는 글 | 묻힌 역사와 잊혀진 인물을 발굴함으로써 식민지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고자 하는 소설입니다.



태그:#말죽거리, #장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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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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