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김태수는 숭례문을 끼고 걷고 있었다. 그는 원각사에서 이인직의 공연물 <은세계>를 관람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최초의 신식 연극이라고 선전만 요란했을 뿐, 내용은 보잘 것 없었다. 도중에 나오고 싶었지만 초청자 측의 체면을 세워 주느라 억지로 앉아 있었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차라리 얼마 전에 감상한 심청가나 화용도가 백 번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조정에서 협률사를 만들어 공연했을 때는 무희들의 수준도 높았고 복장도 화려했었는데 민간에서 인수하더니 공연물이 갈수록 을씨년스러워지는 것이 그는 못내 섭섭했다.

김태수는 대기하고 있던 인력거를 돌려보냈다. 그는 종로 방면으로 걸어가 보기로 했다. 멀리 백운대와 인수봉이 보였고 그 위로 하얀 구름이 두세 점 떠 있었다. 청명한 가을 날씨는 그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주었다. 앞에서 숯장수 두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지게 위에 참나무 숯을 가득 지고 있었다. 6년 전 한양에 호열자가 창궐한 후 오랫동안 침체되어 있던 경기가 조금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김태수는 진고개를 거쳐 종로까지 걸어볼 요량이었다. 진고개는 한양에서 가장 깨끗한 거리였다. 도로도 평평했고 운치 있는 기와 가옥도 꽤 많았다. 정돈된 나무 조경 사이로 새로 들어선 천주교당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그는 차츰 기분이 회복되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도 가끔씩 도보 산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진고개는 이름대로라면 질척질척한 고개임이 틀림없었다. 다른 이름이 진흙 니, 고개 현자를 쓰는 이현인 것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 하지만 지금의 진고개는 조선인들이 선망하는 장소로 떠올라 있었다. 김태수는 그것이 일본인들 때문이라고 여겼다. 원래 진고개는 남산골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던 곳이었다.

그런데 필동이나 묵동처럼 선비들이 많이 살지는 않았다. 주로 하급 관료인 아전들이 살고 있던 곳이었다. 그런데 임오군란 이후 일본 공사관이 이곳에 자리 잡으면서 일인들이 모여 살게 되자. 일본에서는 조선의 외무독판 김윤식을 움직여 일본인 거류 지역으로 지정했다.

갑신정변 이후 진고개에는 일제 근대 상품을 파는 상점들이 줄을 이어 입점했다. 순박한 조선인들은 눈깔사탕과 만화경에 열광했다. 멀리 수원과 양주에서까지도 어린이를 데리고 눈깔사탕을 사러 오는 조선인이 제법 있을 정도였다. 일본 상인들은 쏠쏠히 돈을 챙겼다.

그들은 구경 좋아하는 조선인들의 심리를 금세 간파해 버렸다. 어떤 선교사가 말했듯이, 조선인들은 구경거리가 생기면 그 날이 곧 휴일이었다. 또한 일본인들은 흥행에 곧잘 현혹되는 조선인들의 심리를 날카롭게 포착했다. 그런 나머지 족예, 요술, 곡예, 경륜 등의 천박한 흥행업자가 속속 밀어 닥치고 있었다.

러일전쟁이 시작된 1904년의 봄에 일본군 1개 여단이 입성하여 자리 잡은 곳도 진고개였다. 그러자 진고개에 모여드는 일본인들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그들은 예장동에 공사관을 새로 지었다. 그러자 그 주변으로 사설 금융기관들이 들어섰다. 사채업자들은 가난한 남산골 샌님들을 꾀어 집을 저당으로 돈을 빌려 주었다.

일본인들은 상환 기일이 되면 연락을 끊고 몸을 숨겼다. 그러고는 한 달쯤 지나 찾아가 집을 몰수해 버렸다. 일본인들은 온갖 방법과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진고개 일대를 점유해 버렸다. 한양에 다녀간 시골 사람이, “한양에 웬 사람이 그리도 많이 복작되는가 했더니 모두 진고개 일인에게 돈 털어 받치느라고 그런 것이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김태수의 관심은 다른 데에 있었다. 진고개에는 일본 기생을 둔 요릿집 화월루가 있었다. 또한 친일파 송병준도 일본 요릿집 청화정을 열었다. 그는 언젠가 한 번쯤은 그런 곳에 가 봐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곳들은 김태수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색적이거나 특별한 장소가 아니었다. 진고개는 친일파의 아지트나 다름없었고, 식민지 시대 상류 계급을 자처하는 빈곤한 영혼들의 구락부임을 그는 확연히 알지 못했다.

김태수의 머릿속에는 두 여자의 얼굴이 번갈아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한 여자는 최근 들어 자신에게 고운 눈빛을 보이는 최영애였고 다른 하나는 오윤정 활터에서 머리에 비단 두건을 두르고 활을 쏘던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여자였다. 그녀는 가까운 데서 활을 쏘았던 김태수 쪽으로 단 한 번의 눈길조차 주는 적이 없었다.

김태수는 혼인 말이 오가는 최영애를 생각해 보았다. 그는 자신에게 딸을 보내려는 최영애 부친의 속셈이나, 최영애를 며느리로 받으려는 자기 아버지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최영애의 집안은 문벌은 있지만 재정이 압박을 받고 있었고 김태수 집안은 돈은 많지만 문벌이 시답잖았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서로 메우기 위해 각기 딸과 아들을 활용하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최영애는 외모로나 교양으로나 처지는 데가 없는 여자였다.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만 해도, 그녀에 대한 김태수의 감정은 매우 좋았었다. 그녀는 주체적인 신여성의 풍모와 소견을 그에게 보여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혼인 말이 오가기 시작하면서 부쩍 적극적으로 나오는 그녀를 그는 신뢰할 수 없었다.

평소 그녀의 주장대로라면 자기와 같은 남자를 배우자로 선택할 이유는 전혀 없어야 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평소의 최영애라면 부모끼리 미리 합의해 놓고 통보하는 식의 혼인은 거절해야 마땅할 것이었다. 최영애가 일관성 있게 자기를 대했더라면 오히려 김태수는 그녀의 매력을 의심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최영애가 갑자기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을 그는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실 혼인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최영애가 김태수를 잘 알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친구들과 일본인 찻집에 여럿이 모여 대화한 정도가 고작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혼인 말이 생기면서 최영애는 김태수 집안의 이모저모를 들어 알았을지도 몰랐다. 김태수가 최영애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그녀는 김태수라는 사내가 그렇게도 돈이 많은 집안의 아들임을 뒤늦게 알았던 것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김태수는 자기 아버지의 성미를 잘 알고 있었다. 아들이 자신의 말을 거역했을 때, 그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를 그는 헤아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눈 밖에 나는 행동을 몇 년 동안 했던 그의 형은 지금 적수공권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아버지의 재산만큼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김태수는 자신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돈이 없다면, 자신의 인생에서 자족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고 인정할 정도의 솔직함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는 나름대로 아버지의 재산을 이용하는 자족적인 미래를 계획하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김태수의 고뇌는 더욱 깊을 수밖에 없었다.

김태수는 오윤정 활터에서 몇 번 스친 그녀를 생각했다. 사실 어떤 여자를 처음 보고 자신이 그렇게 머리칼이 설 정도로 긴장할 일이 생길 줄은 전혀 상상에도 없던 일이었다. 그녀는 예사 여자와는 전혀 딴판으로 늠름하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주변 남자들의 시선 같은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행동했다. 그녀의 몸놀림은 기민하고도 익숙했다. 활 솜씨도 혀가 내둘러질 정도로 정교했다. 하지만 이마를 숙이고 표주박으로 물을 마실 때의 그녀는 놀랄 정도로 고즈넉하면서도 다소곳한 맵시를 냈다.

김태수는 그녀의 수려한 이목구비를 보고는 기가 질려 버렸다. 오윤정은 경복궁 담장 안에 있는 활터였다. 조정에서 백성에게 개방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곳에 들어가려면 최소 당상관 이상 가문의 자제가 아니면 안 되는 곳이었다.

김태수는 쓸쓸하고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에게는 두 가지의 난관이 한꺼번에 닥친 셈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지 않게 된 한 여자를 물리쳐야 했고, 자기를 좋아할 것 같지 않은 어떤 여자에게 다가가야 했다.

어느새 김태수는 광화문이 바라다 보이는 혜정교에 이르렀다. 이제 다리를 건너면 종로통으로 진입하게 되어 있었다. 앙부일구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구리로 주조된 가마솥 모양의 해시계였다. 시골 사람들은 그것을 진짜 가마솥으로 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죄인을 삶아 죽이기 위한 형구로 오인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팽형이라는 것이었다.

김태수는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조선인들만큼 근거 없는 소문을 잘 믿으려 하는 백성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작년에 일어난 헤이그 밀사 이준에 관한 소문도 그런 것이었다. 그에게는 지병이 있었다고 했다. 지병으로 쇠약해진 사람이 두세 달에 걸친 장기 여행의 피로가 누적되었을 것이고, 거기에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마음의 상처까지 받아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준이 만국평화회의 석상에서 할복  자살을 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더니, 심지어는 가른 배에서 창자를 꺼내 내던지며 대한제국만세를 불렀다는 해괴한 이야기가 퍼졌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조선인이 금세 많아진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는 알지 못했다.

종로 네거리는 조선 왕조 500년 동안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종가 또는 운종가로 불려진 이곳에 전차가 다니게 된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은 아니었다. 김태수는 그것이 아마도 5, 6년 전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전차 정류장 앞에 잠시 서 있어 보았다. 정류장 옥사는 기와집이었다. 그는 유달리 기와지붕을 좋아했다.

문득 그는, 조선은 한편으로는 참 좋은 것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나라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정류장 부근의 사람들은 거의 흰옷을 입고 있었다. 성인들은 갓과 두루마기를 착용하고 있었고 어린 아이들은  바지저고리에 머리를 길게 땋아 늘어뜨리고 있었다.

김태수는 종로 나무 시장쯤에 왔을 때 목이 말랐다. 그래서 그는 선술집의 휘장을 들치고 들어갔다. 손님은 없었고 주모 혼자서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주모는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렸다.

“탁주 한 사발 마실 수 있겠소?”

주모가 술을 퍼내는 동안 그는 어지럽게 낙서된 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벽에는 수많은 작대기와 이상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사람의 코가 그려져 있는가 하면 점이 찍혀져 있기도 하고 사각모 비슷한 그림도 있었다. 그리고 각 그림 옆에는 여러 개씩의 작대기가 그어져 있었다. 그는 재미나거나 새로운 것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주모, 저 벽엣것은 뭐요?”

처음 주모는 김태수의 말뜻을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녀는 좀 두려운 낯으로 그의 기색을 살폈다.

“저 벽에 그려진 그림과 작대기 말이오.”

그제서야 주모는 안심하는 듯하더니, 세상에 그것이 뭔지 모르는 사람도 있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예. 그것은 외상 장부입니다.”
“외상 장부라니오?”
“소첩이 글을 모르는지라 저렇게 표시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저 그림들은 뭐란 말이오?”
“예. 저 코는 코가 큰 사람의 것이고, 점은 점박이 어른의 것이며 사각모는 학생 나리의 것입니다.”

김태수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수염도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수염 주변으로는 유달리 많은 작대기가 그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저 수염 옆의 작대기는 웬 노인장이 그은 것이란 말씀이오?”
“그렇습니다.”

그는 왜 요즘 들어서 ‘외상을 긋는다’는 말이 새로 생겨났는지를 알게 되었다. 참으로 순진하기도 하고 운치가 있어 보이기도 하고 우매하기도 한 조선인들이었다. 김태수는 적지 않은 값을 치르고 선술집을 나왔다. 아마도 벽에 그어진 작대기는 모두 지워지고도 남을 성싶은 금액이었다. 그는 낮술에 오르는 취기를 느꼈다. 그는 인력거를 불러 세웠다. 인력거에 앉은 그는 계속 활터에서 만난 여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태그:#1907년, #한양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