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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3일, 월요일]

 

밤새 달리는 버스 
 
어느새 비가 후두둑 떨어진다. 코너 상점 처마에 겨우 머리를 받치고 다들 어색한 침묵 속에서 버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인내심이 바닥날 즈음 버스가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이층 구조의 버스로 오른편 아래만 좌석 칸이고, 왼편과 오른편 위는 침대칸이다. 한 칸에 두 명씩 누워간다.

 

왼편 윗층 창가에 배앓이를 하는 효신씨를 눕히고 비스듬히 누워 우두커니 창 밖을 내려다보며 길바닥이 패인 웅덩이에 빗물이 고이듯 이러저러 생각에 잠겼다. 빗줄기는 점점 더 예민해지고 있었다.

 

델리를 벗어나긴 벗어난 것일까? 칠흑같이 어두운 창 밖에는 이제 보여지는 거라곤 어쩌다가 겨우 희미한 불빛뿐이다. 지금 이곳이 어디쯤인지 알려주는 단서가 될만한 풍경도, 거리판도 모두 어둠에 묻혔다.

 

버스는 움직이는 찜통이었다. 침대칸 바닥의 담요는 얼마나 많은 여행객의 몸을 받아냈을까? 케케한 냄새와 이미 윤기를 잃은 꺼끌한 털의 감촉이 도무지 친해지지 않는다. 멍하니 어둠을 내다보다 깜빡 자다깨다를 몇 차례 반복하는 사이, 버스는 이번에도 예고편 없이 멈춰버렸다.
 
효신씨의 새근거리는 소리에 맘이 놓였다.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었다.

 

“아이가 아플 때 잠을 잘 자면 일단 안심이란다.”

대구팀 쌤들의 한숨 섞인 푸념조, “한여름 교실 같은 한증막이야. 이거 환장하겠네.”


“그러게 말이야, 우리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생고생하며 인도 땅에 또 붙어 있는 거지? 뭔가에 홀리지 않고서야… 징허게 잠도 안 와. 하하하….”


푸싯… 이분들이 불과 6개월 전에 인도를 여행하고 이번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또다시 득달같이 날아온 분들 맞아요? 그나저나, 덥기는 참 인정머리 없게 덥다.

 

방물장수 인도아저씨들이 바구니에 음료수랑 간식 쪼가리를 담아 들고 버스 안으로 올라와 여행자들의 말벗도 돼주고 목 축일 것을 팔고 있다. 아저씨의 훌렁한 주머니에 동전 몇 닢과 지폐가 수북이 떨어졌다. 막간을 이용한 이런 아기자기한 상거래가 대충 마무리되는 사이에 꽤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잠시 밖으로 나와 비 뿌리는 밤 공기를 쏘이니 조금은 기운이 돈다.

 

맥그로드 간지에 도착, 그리고 작별

 

뿌옇게 날이 밝아오면서, 비구름도 물러가고 날이 개여 가고 있었다. 새벽녘에 잠깐 졸았는가 싶었는데… 효신씨가 어느 틈엔가 일어나 창 밖 풍경 사진을 찍고 있었다.
 
“잘 잤어요? 언제 일어났어요? 좀 어때요?”

“저 이제 완전히 괜찮아진 거 같아요. 바깥 풍경이 참 좋아요. 그리고, 생각중인데요. 혼자 여행할지, 일행을 만들어야 할지… 딜레마예요.”


“누구나 비슷하게 갈등하는 거예요. 효신씨! 이번이 마지막 여행 아니죠? 평생에 여행 또 하게 될 거잖아요. 그러니까 어느 편이든 다 나름일 거예요. 조금이라도 맘이 가는 쪽으로 해요. 아쉬웠다면 다음엔 또 새로운 방식으로 여행하게 될 거구요. 그리고 먼저 말할게요. 맥간에 도착하면 혼자 여행하려구요. 그러지 않음 후회할 거 같아요.”


“네. 그러실 거라 짐작했어요. 암튼, 지금은 이대로 참 좋아요. 그죠?”

“그러네. 와아… 델리 분위기 아니에요. 히말라야가 가까워지나봐. 그래도 우리 델리에서 그땐 좀 고생스러웠지만, 벌써 추억이 된 건가? 델리 뒷골목의 미로를 헤매던 일도… 아그… 그 냄새들! 정말 대단했어요.”


“세상에… 그런 냄새는 다시는 맡아보지 못할 거예요. 하하하. 젤 잊혀지지 않는 건, 그 거리에 인도 아이들이 바가지로 물 장난치며 해맑게 까불며 웃는 모습이였어요. 가난해뵈는 그 아이들에게도 잠시나마 신나는 일이 있단 거 위로가 됐어요.”


“네. 인도는 가난하지만, 가난이 훔쳐가지 못한 뭔가가 있는 거 같어요. 아마도, 우리가 살면서 제대로 울려보지 못한 어떤 정신적인 영역이 있을지도 몰라요. 우리가 아는 삶의 공식과는 다른 공식….”


“네… 당분간 빈 공간으로 남겨두죠. 언젠가는 그 빈 공간에 뭐라고 써넣을 수 있을 거예요. 한 10번만 인도여행을 하고 나면? 하하하.”

“하하하. 인도사람이 다 되고 나면? 하하하.”

 

맥그로드 간지 버스 스탠드에 도착한 건 이른 아침 같은 7시였다. 이곳 버스 스탠드는 모든 버스가 잠시 목을 축이듯 쉬었다가 다람살라로 이동해 가는 말하자면 교통의 거점이다. 버스 문이 열리자 밤새 꾸벅꾸벅 졸았던 배낭여행자들이 부스스한 몰골을 거두고 어느 틈엔가 신입생처럼 생생해져선 우르르 내리기 시작한다.

 

지도 상으로 보니 이곳을 중심으로 길들이 방사선으로 뻗어나 있다. 이쪽이 티파로드, 저쪽이 메인로드, 조기바라로드, 템플로드. 대략 길의 방향들을 익혔다. 아침을 일깨우는 물기가 촉촉한 싸한 기운이 느껴진다. 상쾌하다.

 
“이건 작은 선물이에요… ‘낮은 산이 낫다’란 중고 인터넷서점을 통해 사온 헌책이에요. 부담 없이 한번 훑어 보고 다른 여행자에게 넘겨도 돼구요….”

“감사합니다. 하하, 재밌네요. 읽고 또 다른 여행자에게 건네주고. 그런데, 어느 숙소에 머무실 거예요?”


“아직 모르겠어요. 그럼, 이제, 우리 작별이로군요.”

“네, 맥간은 좁은 동네니깐 또 만날 거 같지 않으세요? 하하하.”


하지만 그녀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쿨하고 솔직한 초보여행자 김효신씨는 함께 여행하기 유쾌한 훌륭한 동행자이고 도반(?)이었다. 이 여행기를 쓰면서 궁금해진다. 그녀는 인도에서 무얼 보았을까? 그녀가 바라는 여행을 했겠지?

 
새로운 만남


자, 새로운 여행 시작! 아자! 일단 미리 계획한 대로 요가센터를 수소문해 보기로 했다.

 

“저기요. 맥간의 요가센터 있는 곳을 찾고 있는데요. 혹시 아시나요?”


뒤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차분한 목소리.


“그러시면… 여기에서 30분 정도 떨어져 있는 조용한 곳이 있어요.”


획 돌아보았다.

 

“Himalalyan Lyengar Yoga Center인데요. 잠시만요. 이것이 그 팜플렛입니다. 일본분?”

“아니예요. 한국에서 왔어요. 그거 좀 잠시 봐도 될까요?”
 
그는 대만청년 白志堅(Pai Chih Chien)씨. 부모님을 모시고 불교성지순례 중. 이름이 그의 성격과 참 잘 어울리는 청년이다. 우리는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함께 아침식사를 하러 맥간의 버스 스탠드에서 가까운 메인 로드에 자리한 샹글리 라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이 식당은 티벳승들이 직영하는 곳. 역시 이른 시간이었는지, 손님이 거의 없고, 꺼뭇꺼뭇 턱수염 탓인지 유난히 털털해 보이는 빨간 승복의 티벳승이 카운터에 앉아 반갑게 맞이해준다. 이미 치치엔 가족과는 구면인 듯. 덩달아 나도 마음이 느슨하게 풀어지는 거 같다.

 

잠시 베란다에 나가 빙그르 둘러보니 티벳식 가옥들과, 게스트하우스들로 다닥다닥 빼곡한 계곡이 아래로 깊숙이 내려다 보이고, 젖은 솜뭉치 같은 회색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다. 맥간은 산기슭을 계단식으로 깎아서 작은 도시를 이룬 거 같다.
  
언제 주문했는지 제일 먼저 뜨거운 포트에 가득 담긴 흰 우유가 나왔다. 포트에서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앞에 놓인 컵에 한가득 부어졌다. 희고 뽀얀 우유의 부드러움과 포근한 감촉에 잠시 그저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그 따뜻함이 얼굴에 전해져 온다.

 

‘이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면 언젠가 해보리라. 느긋한 일요일 아침 늦잠자고도 잠에서 덜 깬 아이들을 식탁에 앉히고 그 앞에 따끈하게 미리 데워놓은 우유를 먹여보리라. 그땐 나도 한 잔 함께 마셔보리라.’

 

게으른 아침과 따뜻한 우유 한 잔과 아이들! 그 사랑스러운 시간을 상상했다. 그리곤 고개를 들어 식탁에 앉아 있는 치치엔, 마마, 파파의 얼굴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마음 속에 이 낯선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이 완전히 사라진 걸 느낄 수 있었다. 놀랍게도 만난 지 불과 몇 분만에.

 

언어를 뛰어넘어

 

헌데, 이상한 분들이다. 낯선 외국인을 옆에 앉히고도 자기네들끼리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있다. 새로 등장한 외국인에 대한 호기심은 애시당초 없었던지 신경 쓰는 둥 마는 둥. 시시콜콜하게 무슨 할 말이 가족 간에 저리도 많은지. 이후에 좀 더 가까이 지내면서 이런 이들이 대화를 즐기는 것이 평소 생활 모습이란 걸 알게 되었고, 한 번도 서로 화내거나 어둔 표정으로 침묵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차츰 이들의 대화에 끼자 문제가 생겼다. 치치엔의 부모님은 영어를 정말 한마디도 못하셨는데, 며칠 동안 그분들이 구사한 영어라고는 “땡큐!”가 전부였다. 그러나 나는 더 심한 언어 장애녀였다. 중국어를 전혀 알아듣지도 단 한마디도 할 줄 몰랐으니. 갑자기 말이 교차하는 길이 복잡해지고 분주해지고, 그럴수록 치치엔도 따라서 바빠졌다.

 

그러나 그가 통역해 주기까지 다음 말을 기다리는 동안,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도 그만큼 길어지고 그 기다리는 동안 말로 표현되지 않아도 알아차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차츰 알게 되었다. 나중에는 치치엔이 곁에 없어도 별로 크게 불편하지 않아도 되었다. 언어를 뛰어넘는 경험, 이것이 내겐 여행의 큰 즐거움 중 하나다.

 
명품 가족

 

티벳에 가면 꼭 먹어보리라 했던 쌈뚝(Thamthuk)이 드뎌 눈앞에 나타났고나.


"쌈뚝은 한국여행자들에게 효자 음식이에요. 인도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아 지치고 허기진 여행자들에게 훌륭한 고향의 맛과 보양을 해주거든요. 국물 맛은 약간 텁텁해서 맑은 장국처럼 시원하진 않지만, 야채를 이것저것 많이 넣어요. 한 그릇에 그 시절에 나오는 대부분의 야채를 푸짐하게 넣어서, 야채 반, 수제비 반 빡빡하게 말아서 내어놓지요. 달걀을 지단처럼 얇게 부쳐 굵게 썰어 고명으로 위에 얹어주고요. 수제비는 좀 두텁게 밀어 뚝뚝 뜯어서 넣어줘요. 채식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은 주로, 양고기를 울궈서 국물이 기름지게 하는 식으로 먹는데요. 한 그릇 뚝딱 먹고 나면, 콧잔등에 땀방울이 송글 송글. 비가 매일 빠지지 않고 오는 이곳 몬순철엔 뜨끈한 수제비가 일품이죠." - 어느 편지글에서

게걸스럽게 한참 먹어댔는데, 갑자기 주위가 조용. 오잉? 그리고 나서, 물컵이 슬쩍 앞에 놓여지고 모모(만두)와 찐 달걀 그리고 얇게 구워진 짜파티가 고소한 버터와 함께 접시에 담겨져 있다.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세 사람이 모두 쳐다보고있다.

 

“천천히 드시랍니다.”

 

치치엔은 자신이 갖고 다니는 노트북을 보여주었다. 사진 속에는 벌써 한 달째 맥간에 머무는 동안의 마마와 파파의 하루일과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두 분이 사원 마당 벤치에 앉아 독경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요가센터와 게스트하우스의 전경, 주변의 풍경을 차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치치엔은 좋은 아들이네요. 두 분 곁에 늘 그림자처럼 따르나 봐요. 사진에 이 구석 발은 치치엔 거죠? 하하하. 그리고 이 요가센터 맘에 들어요. 게스트하우스도 오케이. 결정했습니다. 그리로 하죠, 뭐. 하하.”


“이렇게 하죠. 아직 남갈사원에 못 가보셨을 거 같네요. 그곳을 돌아본 후 게스트하우스로  함께 택시로 가실래요? 그 배낭 매고 걷기엔 좀 무리가 될 거 같네요.”


“아! 네. 그럼 저야 물론 좋지요. 감사합니다.”

 

그만 말로 표현한 것이라곤 그것이 전부였지만, 우연히 지나던 한 외국인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고 따뜻한 인정을 베풀어준 그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여행 중뿐 아니라 살면서도 드물다고 여겨지는, 참으로 명품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름다운 가족이었다.

 

맥그로드 간지의 심장, 남걀사원
 
남걀사원으로 가는 템플 로드를 걷고 있다. 마마가 거리에서 산 구운 옥수수를 입에 물고서. 남걀사원은 맥간 버스 스탠드 아래쪽 길 그러니까 템플로드에서 걸어서 10여분 가까운 거리다. 이곳은 티벳 망명정부의 중앙사원으로서 티벳 사람들에겐 정신적인 지주인 달라이 라마가 사는 쫄라캉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마침 제일 큰 법당 안에서 하루 아침을 여는 의식으로 티벳스님들의 악기합주 연주회가 열리고 있었다. 법당 밖에서 이를 구경하는 외국인들 표정도 자못 진지하다.

 

마니차(Manicha)가 법당 한 쪽 벽면에 원통 모양으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마니차는 손으로 돌리는 작은 것에서부터 우리나라 범종 크기의 커다란 것까지 크기가 다양하고, 속이 텅 빈 원통에 경전을 말아 넣은 것으로 한번 돌릴 때마다 경전 한 권을 읽은 공덕을 쌓는 것과 같다고 한다.

 

상글리라 레스토랑 근처에서 템플로드로 이어지는 좁은 지름길에도 이 마니차가 있었다. 그리고 지나는 사람들마다 그냥 지나는 법이 거의 없다. 아마도 이곳 티벳 사람들에겐 거의 생활과 다름없이 친숙한 구도 의식인가보다. 치치엔을 따라 열심히 돌렸다.

 

“옴마니 밧메훔 옴마니 밧메흠…”

 

이 주문은 본래 산스크리트어로 ॐ मणि पद्मे हूँ;로 표기하며 ‘연꽃 속에 진리가 있다’로 해석된다고. 특히, '옴(OM)'은 '인도의 힌두교와 기타종교에서도 모든 만트라(진언)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신성한 음절'로 그 발성에서부터 하늘, 땅, 대기의 삼계를 의미한다고 한다.

 

오음~ 오음~ 하며 흉내 내듯 소리를 꿀꺽 삼켜마셔 보는 것도 재밌다. 그리고 이곳에서 옴의 무늬(ॐ)는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문양이었다. 목걸이 반지, 티셔츠 등. 마치 우리나라 인사동에서 태극무늬가 흔한 거처럼.

 

오체투지를 하는 티벳 할머니 두 분과 아주머니, 그리고 한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사람 키 만한 나무판 위에 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바닥 아래 천을 밀어내며 온몸을 엎어 기도한다. 이 얼마나 애절한 기도의 모습인지.

 

이들은 대개 일주일에 한 번씩 이곳에 와서 오체투지를 한다고 한다. 이마에 구슬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지도 꽤 되었건만 멈출 줄 모른다. 티벳의 운명과 무관한 여행자로서 곁에서 지켜보는 것인데도, 쉽게 지나쳐지지 않는다.


“치치엔, 텔레비전을 통해 보았던 것과는 다르네요.”
“그렇죠. 모든 생명은 서로 무관할 수 없다는 말이 사실일 겁니다.”


“그래요. 아니면 우리가 저분들을 보고 느끼는 이 감정이란 뭐겠어요?”
“결국 자연히 마음이 움직이는 건 모든 생명은 서로 통한다는 우주의 섭리라고 합니다.”

 

“좋은 말씀이시네요….”
“만일 우리가 나 아닌 누군가에 대해 진정한 동정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순간 그는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자신의 신성(sanity)을 느끼는 거라는군요. 신성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닌 거죠.”

 

한 남자가 오체투지를 끝내고 쉬는지 널빤지 위에 걸터앉아 조용히 히말라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굽은 뒷모습이 작은 바위 같았다.
 
남걀사원 입구에서 안쪽으로 돌아가니 한 쪽이 절벽으로 막힘없이 탁 틔어 있었다. 그곳에 비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디서나 한눈에 들어오는 히말라야 고도 1800미터에서의 풍경들! 그 풍경은 마치 물을 잔뜩 머금은 수채화 같았다.

 

몬순철(장마철)이라서일까? 비구름들이 물안개처럼 퍼져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난간을 붙잡고 맘껏 가슴을 내밀었다. 손끝에 힘을 잔뜩 모아 난간을 틀어쥐고 그대로 서 있었다.

 

'산과 비구름과 사원이 하나로구나. 땅의 기운, 하늘의 기운, 인간세의 신성한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경계가 사라지고, 누가 누구를 품는 건지 분별할 수 없으니 그래서 혹자들은 이를 두고 아름답다고 말한다.'
 
시브 샥티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풀다

 

습한 공기에다 막 한바탕 비를 퍼부을 태세로 짙은 회색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다. 아직 대낮인데도 주변이 어둡다. 택시가 좁은 언덕길 티파 로드를 덜컹거리며 달리고 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효신씨와 함께였는데, 벌써 외국인가족과 하나가 되어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이다. 여행은 이토록 변화무쌍한 것인가?

 

길가 낡은 작은 나무 팻말에 '시브 샥티 게스트 하우스. 다른 전망을 보다!(Shiv Shakti Guest House. You have Different View!)라고 쓰여 있다. 택시에서 내려 왼쪽으로 들어가라는 화살표 따라 길에서 벗어나 산길에 걸어 오르니, 물안개에 감춰져 있던 허스름한 이층집이 보인다.

 

갑자기 멀리서 사나운 개 짖는 소리와 함께 부리부리한 인도인이 나타났다. 치치엔은 저녁식사를 약속한 후 숙소인 이 층으로 올라가고 안내하는 인도인을 따라 일층 빈방으로 들어갔다. 방구석에 백열등 하나, 매트리스는 곰팡내가 나고 베개는 얼룩덜룩. 욕실이 딸려 있지만 순간온수기는 불능. 하룻밤에 120루피다.  


그러나 일단 눌러앉기로 했다. 시끌한 중앙통에서 벗어나 왠지 한적한 숲 속에 위치한데다가 낡디 낡은 집이 주는 묘한 원초적인 느낌! 아침에 일어나 저 창문을 열며 꿈에 그리던 히말라야가 한눈에 들어올 것이다! 이 정도만 해도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요가센터가 이곳에서 가깝다고 하니 다니기도 수월할 테고, 굳이 시내로 나가지 않아도 하루 이틀쯤은 근처에서 어정거리며 시간 보내기에도 충분히 좋을 거 같다.
 
빗속에서의 광기

 

치치엔 가족과 이른 저녁을 먹고 방으로 돌아왔다. 여행 시작 후 배낭을 열고 처음 짐들을 풀어헤쳐 보니 간소하게 꾸린다고 했지만, 만만치 않은 살림살이다. 쏴아~ 철벅하는 빗소리에 잠시 일손을 멈추고 커튼 너머 창문을 보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말로만 듣던 히말라야 몬순의 장대비를 처음 경험하고 있다. 와아, 대단하다! 완전히 고장 난 샤워꼭지다. 그나마 한적한 산속인데다가 비까지 오는 터라 누구 하나 말릴 사람도 없고 안 보는 사이 뒤돌아서서 흉볼 사람도 없으니 잠시 기분도 내고, 식구들에게 국제전화도 걸 겸 풀어헤쳐 진 짐 정리도 잠시 미루고 먼저 밖으로 나왔다.

 

몇 분만에 홀딱 젖어 바들바들 떨고 있다. 생각해보니 우산을 챙겨오지 않았나 보다. 하지만 이 정도의 비라면 우산을 받쳐봐야, 우산은 생색만 내고, 맞을 비는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다 맞을 거 같다.

 

그런데 통쾌한 장대비 속에서, 이미 젖을 만큼 다 젖은 터라 알 수 없는 희열에 들떠… 이 기분이 뭐꼬? 뭔가 통쾌하다!

 

“하하하하하… 비가 온다아~ 인도의 비다아… 히말라야의 비다아… 야홋!”


태그:#인도여행, #맥그로드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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