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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간 나는 내가 바로 무쇠탈을 쓴 강도라고 생각했다. 칼만 안 들었지 강도나 한 가지인 셈이다 ..  - 김미순 <여교사 일기>(주간시민사 출판국, 1978) 21쪽

 

예전 어느 만화영화 주제노래에 “무쇠로 만든 사람… 무쇠팔 무쇠다리…” 하는 말이 나온 적 있습니다. 퍽 오래된 만화영화이고 주제노래라 잘 떠오르지 않는데, 다른 대목은 잘 안 떠오르지만 이 대목만은, ‘무쇠’가 어쩌고 하는 대목은 떠오릅니다.

 

 ┌ 무쇠탈
 ├ 소가죽
 │
 ├ 철면피(鐵面皮)
 └ 철판(鐵板)

 

단단하고 아주 센 것을 빗댈 때 흔히 ‘강철(鋼鐵)’을 듭니다. 낯가죽이 두꺼운 사람을 보고 “얼굴에 철판을 깔았느냐”고 하거나 “철면피를 뒤집어썼구나” 하고도 말합니다. 요즘 세상에 ‘소가죽을 뒤집어썼느냐’ 하고 말하는 사람 보기 어렵습니다. 소가죽을 보기 어렵기도 하지만, 지난날 시골말은 차츰차츰 잊히지거나 멀어집니다. 모두 도시에 사니까요.

 

우리 삶이 도시로 몰리거나 모이면서, 도시 삶도 서양 해바라기로 많이 치우치고 기웁니다. 가만히 옆을 돌아보셔요. 우리가 사는 집, 우리 집에 있는 물건, 우리가 입은 옷과 쓰는 갖가지 살림살이 어느 곳에 우리 문화와 전통이 깃들어 있을까요. 지금 우리 살림살이도 세월이 더 흐르면 우리 나름대로 고유한 살림살이가 될 수 있겠지만, 이렇게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내다 버리거나 내팽개치는 흐름이 이어가는 동안, 우리한테는 무엇이 남고 무엇이 새롭게 설까요.

 

우리 말이 뒤틀리거나 비틀리는 까닭은 이 한 가지가 중심이라고 느낍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우리 삶터를 망가뜨리기 때문이라고요.

 

우리 자신을 우리 스스로 사랑하지 않는데, 어찌 우리 말과 글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요. 우리 스스로 우리 말을 가다듬고 추스르고 가꾸고 키우고 살찌우지 않는데, 어느 누가 우리 말과 글을 아름답게 가꿀까요? 국어학자들이 할까요? 나라님이 할까요? 어느 똑똑이가 나와서 해 줄까요?

 

잠깐 드러누워서 옛 만화영화 주제노래를 더듬어 봅니다. 음, ‘마징가 제트’라는 만화영화 노래인 듯합니다. “힘이 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사람. 인조인간 로보트 마징가아 젵. 우리들을 위해서만 힘을 쓰는 착한 이. 악당들이 모두모두 벌벌벌 떠네. 무쇠팔 무쇠다리 로케트주먹. 목숨이 아깝거든 모두모두 비켜라. 마징가, 마징가, 마징가아 젵.”

 

이것 참. 어릴 적에 워낙 많이 보던 만화영화요, 동무들하고도 즐겨 부르던 노래였기에,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더듬으니 노랫말이 죄다 떠오르네요. 아무튼. 이 노랫말을 살펴보니 꽤 재미있어요. “힘이 센”이라 말하지요? “무쇠로 만든 사람”이라 하지요? “힘을 쓰는”이라 하고 “착한 이”라 합니다. “벌벌벌 떠네”라는 말도 좋고 “목숨이 아깝거든”과 “모두모두 비켜라”도 하나같이 깨끗하고 살가운 말입니다.

 

아니, 깨끗하고 살가웁기를 떠나 누구나 흔히 쓰는 말, 입말, 살림말입니다. 그러니 이런 노래가 세월이 가도 머릿속에 남고, 어렵잖이 떠오르겠지요. 아이들도 이런 노래를 즐겨 따라 부르고요.

 

지난 세월 민요도 마찬가지라고 느낍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늘 쓰던 낱말을 민요 낱말에 가락을 붙여서 불렀습니다. 옛날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우리가 살아가면서 스스럼없이 쓰던 말이 노래가 되었고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무슨 전문용어라고 해서 보도 듣도 못한 어렵고 딱딱한 말이 아니면 철학도 못하고 경제도 못하고 정치도 못하고 문학도 못하는 듯이 줄줄줄 읊습니다. 사진용어, 미술용어, 철학용어, 문학용어, 경제용어, 기술용어…… 끊임이 없습니다. 서양 해바라기도 참 큰 탈인데, 이처럼 우리 삶을 벗어나고 떠나 버린 말로 우리 생각이 무너지고 흔들리고 어수선해지는 일도 참 슬프고 안타까운 모습이라고 느껴요.

 

‘무쇠탈’이라는 말을 되살려 쓰면 좋겠지만, 되살리지 못해도 좋습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무쇠’나 ‘탈’은 살림말에서 멀어지고 있으니까요. 그래, 세월이 바뀌고 흐르는 만큼, 이 세월을 얕잡아볼 수 없습니다. 이 흐름은 흐름대로 가야겠지요.

 

다만, 지금은 이렇다 하더라도 앞으로는, 또 먼 앞으로는, 또 그보다 더 먼 앞으로는 지금 흐름처럼만 흐르지 않으면 좋겠고, 지금 흐름으로만 흐르지 않도록 마음을 쓰면 좋겠어요. 우리 목숨은 100해도 못 되어 끝나지만, 우리 말과 문화와 뒷사람들 삶과 삶터는 100해가 아니라 1000해도 가고 10000해도 갈 테니까요.

 

우리가 쓰는 온갖 지하자원과 물질자원은 ‘지금 우리들만’이 아니라 앞으로 태어나 살아갈 뒷사람을 생각해서 알맞게 아껴 쓸 수 있어야 좋듯이, 우리가 쓰는 말과 글도 지금 우리 자신뿐 아니라 앞으로 태어나 자랄 뒷사람을 생각해서 올바르게 추스르고 가다듬고 매만지고 돌보고 가꿀 수 있으면 좋겠어요.

덧붙이는 글 | 인터넷방 <함께살기 http://hbooks.cyworld.com>으로 찾아오시면, 우리 말과 글 이야기를 좀더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태그:#우리말, #우리 말, #우리 말에 마음쓰기, #무쇠탈, #철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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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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