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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이대근 정치·국제 에디터의 글은 언제 봐도 차갑다. 예리한 통찰력과 날카로운 직관, 치밀한 분석으로 일관한 그의 글을 읽는 것은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그가 드러낸 '진실'을 직면해야 하는 것은 불편함을 넘어 외면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일까. 그의 글에 열광하는 독자들이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술자리에서라도 그의 글이 화제에 오르는 경우는 적다. 너무 예리하고, 강하다. 또 진중하다. 화제에 올리기엔 너무 무겁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늘(8일) 그의 글 '여전한 이건희, 돌아온 이회창'도 그렇다.

 

그는 묻는다. 어찌해서 세계 초일류기업의 총수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호텔 할인권'과 '비싼 와인'을 돌리는 방법까지 예시하면서 시시콜콜 전방위 로비를 지시했는지, 아니 지시할 수 있었는지를 묻는다.

 

그는 또 묻는다. 어떻게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이명박 의혹’이 설령 사실로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그를 지지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지 묻는다. 어떻게 정치의 기본을 무너뜨리고, 정경유착으로 얼룩진 이회창의 출마 소문만 듣고 20%의 지지를 보낼 수 있는지 묻는다.

 

그의 물음이 서늘한 것은 그 신랄한 ‘화살’이 이건희와 이명박, 이회창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것을 용인하고, 나아가 적극 지지하는 한국사회, 그리고 한국의 국민들에게 향해 있다는 점이다.

 

원죄의 출발은 바로 우리들

 

모든 물음이 그렇듯이 그의 물음에는 대답이 들어 있다. 이미 3년 전에 세상에 알려진 ‘안기부 X파일’에 다 들어 있는 삼성의 로비 실태를 묵인하고 넘어간 ‘우리들’, 전두환·노태우 비자금이 나왔을 때, 혹은 1997년 대선과 2002년 대선 때의 불법 정치자금이 나왔을 때라도 그것을 발본색원하지 못한 ‘우리들’에게 바로 그 ‘원죄’가 있음을 이대근 에디터는 뼈아프게 지적하고 있다.

 

삼성과 이건희를 말리지 않은 우리 사회의 책임있는 당사자들과 기관들의 침묵과 비겁, 그리고 당연한 문제제기까지를 지레 포기한 체념이 그 자양분이 됐음을 환기시키고 있다. 이건희가 문제가 아니다. 바로 “우리 모두 병들었기 때문”임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건희 부패동맹의 한 파트너였던 이회창의 출마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삼성과 관료에 휘둘려 국정의 중심을 잃은 노무현에 대한 실망이 이명박으로 몰려들었고, 이명박에 실망한 이들이 불러낸 이가 결국 바로 이회창”이다. 노 정권의 무능이 이명박 현상을 만들고, ‘이명박 의혹’이 사실이더라도 지지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 ‘상식의 붕괴’가 결국 죽은 이회창을 되살리고, 불러냈다는 것이다.

 

그는 묻는다. 아무리 절망적이라도 ‘무능’ 아니면 ‘부패’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그는 또 묻는다. “어째서 부패라도 상관없다고 하기에 이르렀는가”를.

 

그의 이 마지막 ‘물음’ 속에 든 답은 결국 ‘무능’ 쪽에 방점을 찍은 것일 게다. 지면의 제약 때문에 생략했겠지만, 그의 마지막 물음에는 이건희의 ‘로비’를 용인하고, 이명박 현상을 자초하고, 결국에는 이회창까지 불러낸 집권세력과 이른바 양심세력, 혹은 진보세력의 ‘무능’을 질타하고 있다.

 

밥그릇 챙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큰 맥락에서 그의 말이 맞다. 하지만, 꼭 ‘무능’ 탓 때문일까. 무능해서 결국 이렇게 된 것일까. 그의 글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조심스럽지만 그의 이야기에 사족을 붙여보자.

몇 차례의 기회가 있었는데도 삼성과 이건희의 일탈을 막지 못하고, ‘이명박 현상’을 초래한 것은 말할 나위 없이 집권세력과 진보세력의 무능 탓이 크다. 하지만 비단 그것뿐일까.

 

이 대목에선 집권세력과 진보세력에 대한 전북대 강준만 교수의 ‘질타’가 새삼 다시 떠오른다. 집권세력과 진보세력에 대한 강준만 교수의 질타는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아마 그는 이미 포기한 것 같다. 그 같은 ‘작업’이 더 이상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듯싶다.

 

집권세력과 진보세력에 대한 강준만 교수의 질타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그들 또한 철저하게 ‘밥그릇’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기 밥그릇 챙기는 데 있어선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과거에 비하면 좋아졌다고? 강 교수는 ‘밥그릇의 크기’를 말했던 게 아니다. 큰 밥그릇은 큰 밥그릇대로, 작은 밥그릇은 작은 밥그릇대로 ‘자기 밥그릇’을 ‘철저히’ 챙기고, 결코 그 밥그릇을 나누려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점을 그는 강조했다.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태도’ 역시 ‘정치적 밥그릇’에 대한 자기주장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였다는 점을 두고두고 지적했다.

 

강준만 교수의 말이 모두 맞다고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의 질타에는 우리 사회의 상식이 붕괴되고, ‘무능’ 보다는 ‘부패’를 선택하기에 이른 이 어처구니없는 현상의 본질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엿보인다.

 

제 밥그릇을 챙기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는 항변이 있을 수 있다. 물론 땅 부자, 아파트 부자, 의사, 약사, 변호사를 비롯해 우리 사회의 상층 기득권 세력의 자기 밥그릇 챙기기를 보면 집권세력이나 진보세력의 밥그릇 챙기기는 소박한 편이라는 반론도 가능하다.

 

문제는 그 밥그릇이 ‘기득권의 밥그릇’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데 있다. 아예 밥그릇이 깨져 챙길 밥그릇조차 없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자신들의 밥그릇을 더욱 큰 밥그릇으로 바꾸려 하고, 결코 밥그릇을 나눠보려는 ‘자기희생’의 미덕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데 있다. 대기업 노조가 그렇고, 교육 문화 등 사회 각 부문의 진보세력들 또한 별반 차이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진보가 어느샌가 기득권의 장식물이 된 것은 아닐까.

 

그것을 ‘부패’라고 말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진보의 가치와 기준으로 보자면 그 또한 명백한 부패일 수 있다. 사람들의 눈에는 ‘큰 도둑’이나 ‘작은 도둑’이나 그게 그거일 수 있다. 그러니 상식인들 따져서 무엇 할 것인가. 자기 밥그릇을 잘 챙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상식’이 된 사회에서 어떤 도덕적 기준이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오늘 신문 지면을 장식한 이회창 대선 출마에 대한 온갖 도덕적 비난이 공허한 울림으로 느껴지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이번 대선은 전망을 열어나갈 수 있는 분기점

 

이리 보면 참으로 암담하다. 중요한 것은 이런 ‘진실’이 가리키는 방향이다. 부정과 부패가 용인되는 사회, 그 미래는 참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찌 보면 이번 대선에서의 정파적 대결과 그 승패는 이 도도한 흐름에 비춰보자면 극히 작은 분수령에 불과할지 모른다.

 

지금 우리는 ‘상식’과 ‘반상식’이 대결하는 가치전쟁, 혹은 시민전쟁의 한 복판에 있는지 모른다. 5년, 10년이 아니라, 21세기 한국사회, 나아가 한반도의 흐름을 좌우할지 모를 그런 분기점에 놓여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대근 칼럼’의 지적처럼 지금 우리가 ‘무능’과 ‘부패’의 양자택일을 강요받고 있다면 이미 ‘반상식’이 절반은 승리한 것인지 모른다. 왜 이리됐는지 우리 스스로 자문해 볼 때다. 그래야 그나마 전망을 열어나갈 수 있을 테니까.


태그:#이대근칼럼, #이회창, #대선정국, #이명박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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