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조선후기 화가인 김득신이 그린 짚신삼기 그림입니다. 갈비뼈가 앙상한 할아버지와 등 뒤에서 조심스레 아버지를 쳐다보는 손자 그리고 짚신을 삼기에 여념이 없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만약 극심한 가뭄으로 먹을 것이 귀해지면 이들은 어떻게 변할까요?
ⓒ 간송미술관 소장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에 보통 의식주를 꼽습니다. 그러나 그 중 '식(食)'과 관련된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피부에 와 닿는 일일 것입니다. 뭐, 날이 따뜻하면 벗고 다니고, 대충 움막이라도 지어 살 수 있지만 먹을 것이 없을 경우는 생존에 치명적이기에 먹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소위 말하는 '디지털 시대'가 되었건만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굶주림의 문제는 인류가 영원히 풀지 못할 숙제로 남아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이 문제로 발생하는 최악의 사태는 아마도 사람이 사람고기를 먹는 이른바 식인의 문제일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먹는다는 것은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상상할 수 없는 죄악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과연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447년, 세종 29년 11월 한글을 반포한 지 1년이 지난 후 내심 흐뭇해하던 세종에게 백성들이 사람고기를 먹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당시 조선의 기틀을 다지고 만백성의 어버이로 치세의 덕을 쌓는 것을 목표로 했던 세종에게 이같은 이야기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였을 것입니다. 오죽이나 나라를 잘못 다스렸으면 굶주린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일이 일어났을까? 이는 곧 임금의 잘못으로 비칠 수도 있었습니다.

세종, 사람고기 먹었다는 소리에 경악

이렇게 백성들이 사람고기를 먹었다는 내용은 당시 황해도관찰사로 굶주린 백성을 살피던 대사헌 이계린이 임금께 직접 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금년 봄에 기근이 너무 심하여 사람의 고기를 먹는 자까지 있었습니다" 라고 말하며 백성들의 굶주림이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세종은 자신의 치세에 이런 일이 생겼다는 사실이 못내 걱정스러웠는지 "지금 계린이 말한 그 사실을 끝까지 알고자 하니, 계린과 대관을 승정원에 나오게 하여 사실을 조사하고, 만일 알아내지 못하거든 법관에게 내려 추핵하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하며 끝까지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종이 이런 해괴망측한 일을 도대체 누구에게 들었는지 이계린에게 직접 묻자, 그는 "신이 반드시 사람에게 들었던 것인데 잊었습니다"라고 하며 말꼬리를 흐렸습니다.

이후 이계린은 형조에 불려가 국문을 받았고, 이후 사건의 전말은 조금씩 밝혀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음날 이계린이 기억을 더듬어 고자인 김한이 제 외종질 총통위 조수명에게 들은 것을 자신에게 이야기했다고 털어 놓았습니다.

그 즉시 세종은 승정원에 명하여 김한을 잡아들이고 내용을 캐물었더니, 조수명이 "한 소경 여자가 주림이 심하여 저절로 죽은 아이 시체의 고기를 취하여 먹었다"고 말했다라고 밝혔습니다.

이후 줄줄이 굴비 엮듯이 조수명이 불려왔고, 그는 "아비를 장사 지낸 후 '금년에 이 도에는 굶주려 병들어 죽은 사람이 개천과 구렁에 뒹구는 자가 몇천인지 알지 못하는데, 네가 장사지내었으니 다행이다'라고 했던 어미의 이야기를 한 것뿐"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후 대질 심문이 이어졌으며, 의외로 결과는 말이 중간에 와전되어 벌어진 사건으로 판명났습니다.

철저한 수사 촉구, 그러나 또 다른 사건의 발생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황해도 서흥군에서 인육을 먹었다는 내용이 보고되자 세종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그래서, 기왕 내친 김에 이 사건도 함께 처리하려 했습니다.

이 때, 인육을 먹었다는 내용을 말한 전리 김의정의 보고는 끔찍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당시 그는 사건의 정황을 이렇게 보고합니다.

"4월 보름 때에 이르러 나무하는 아이 다섯 사람이 동네 북쪽 산골에 갔다가 사람의 고기를 구워 먹은 곳을 보고 와서 이야기하기에 내가 동네 사람으로 더불어 초동을 데리고 가 보니, 굽던 나머지 머리와 다리가 아직도 있었습니다. 이달 23·24일 사이에 초동이 또 말하기에, 동네 사람 갑사 김을경, 선군 구사의로 더불어 가보니, 사람의 시체 네 다리가 내던져 버려져 있고, 불기운이 꺼지지 않았었습니다."

"동네에 선군 이우라는 자가 있는데, 일찍이 하는 일도 없이 밤 새벽으로 산속에 왕래하고 또 남의 무덤을 파서 그 의복을 벗기고 함으로, 이 사람의 한 짓이라 의심하여 가서 그 집을 수색하여 사람의 팔과 고기 두 덩어리를 얻었는데, 구어서 빛이 푸르스름하였고, 모두 사람의 고기였습니다." <세종실록 118권, 세종 29년 11월 17일>


정말 예전 TV 드라마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세종은 감사관 이인손에게 직접 김의정을 데리고 서흥에 가서 진위 여부를 확인하게 하였습니다.

이후 계속되는 추국 끝에 모든 것이 거짓이고 허망한 내용이라는 결론이 내려졌고, 김의정은 감옥에 갇혔다가 온 가족이 변방으로 쫓겨나는 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물론 앞에 일어난 사건 또한 이계린을 파면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수사결론들 모두가 거짓이고 그저 지어낸 말이었을까요? 혹시 이 사건을 조사한 담당자가 세종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하여 거짓으로 토설하게 한 것은 아닐까요?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가

당시 황해도나 평안도의 경우는 크게 흉년이 들 경우 굶어죽는 사람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배고픔에 눈이 뒤집어지면 그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어차피 기록된 역사 모두가 완벽한 진실은 아닙니다. 이후 숙종 22년(1696)에는 실제로 평안도에서도 굶주린 백성 이어둔이 인육을 먹었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임금이 "너무 굶주린 나머지 실성해서 발생한 일이라며 특별히 사형만은 시키지 말라"는 특별 지시를 내린 기록을 보면 이런 의심도 충분하리라 봅니다.

심지어 선조 9년(1576)에는 피부병의 일종인 창질에 사람의 쓸개가 특효약이라는 괴 소문이 돌아 사람들이 죽어가는 사태가 발생하자 현상금을 걸어 범인을 체포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당시 이와 관련된 엽기적인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서울 밖의 사람들이 인육과 사람의 간담을 창질을 치료하는 약으로 쓰기 때문에 흉악한 무리들이 어린 아이를 사람이 없는 곳으로 유괴함은 물론이고 비록 장성한 남녀라도 혼자 길을 가는 경우에는 겁략하여 모두 배를 가르고 쓸개를 꺼내었는데, 이는 그 쓸개를 팔면 많은 값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무에 묶여 배가 갈려진 자가 산골짝에 잇달아 있으므로 나무꾼들이 나무를 하러 갈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법을 만들어 현상금을 걸고 체포하게 한 것이다." <선조실록 10권, 선조 9년 6월 26일>

이 이야기를 살펴보면, 지나가는 아이를 유괴하고 또 다 큰 어른도 혼자 길에 다니면 납치해 쓸개만 꺼내 갔다고 하니 예전에 영화에 등장했던 구미호의 이야기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해에는 특히 가뭄이 심하게 들어 온 국토가 말라비틀어질 지경에 다다랐습니다. 심지어 선조가 뜨거운 햇살 때문에 조회를 하던 경복궁 근정전에 나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이토록 백성들의 삶터가 송두리째 흔들릴 상황이 계속됐으니 이후 임진왜란 시 초전에 제대로 된 전투를 치를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손가락 자른 피로 부모 살리는 게 효?

▲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유교적 가치관으로 인해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백성들의 훈육을 위해 만든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한 장면입니다. 내용을 보면 '이보가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고생하던 중 꿈에 어떤 중이 말하길 산 사람의 뼈를 먹으면 나을 수 있다고 하자 이보가 즉시 놀라서 깨어 손가락을 베어 약을 만들어 드리니 아버지의 병이 즉시 나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과거 지극한 효에 관한 이야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부모의 목숨을 살린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내어 그 고기로 부모의 기력을 회복시켰다는 것도 효자 이야기에는 한번 씩 등장하곤 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진정한 효의 모습일까요? 옛날부터 이에 대한 문제는 선비들 간의 토론에도 종종 등장했는데, 조선시대 이름난 학자인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도 이 토론의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이러한 행동들이 결코 효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조선 후기 실학자의 대표주자인 정약용은 그의 문집에 이런 내용의 글을 남겼습니다.

"아, 신체와 모발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므로 감히 상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부모가 아무리 위독한 병에 걸렸다 하더라도 자식의 몸을 해쳐 가면서 그 고기를 먹고 싶어할 리가 있겠는가. 인육을 먹는 것은 어리석은 백성들의 우견일 뿐이다."<다산시문집 제11권, 논>

이와 유사한 주장이 청장관 이덕무의 <앙엽기>에 실려 있는데, "간을 베어 부모에게 드리는 것은 효도가 아니다"면서 자신의 주장을 확고히 다졌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시대 열녀의 표상이었던 남편이 죽은 후 함께 따라 죽는 일을 과연 열녀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적어 놓았는데, 그는 "이는 열녀로 볼 수 없다"라고 명확하게 주장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남편이 죽는 것은 한 가정의 불행이기는 하다. 그러나 늙은 시부모를 봉양할 사람이 없고 어린 자녀들을 양육할 사람이 없으면, 죽은 남편의 아내 되는 사람은 당연히 슬픔을 참고 생활에 힘써야 한다. 그리하여 위로는 봉양할 사람이 없는 시부모를 봉양하다가 천수를 누리고 별세하면 장사지내고 제사지내주며, 아래로는 양육할 사람이 없는 자녀들을 양육하다가 장성한 나이가 되면 관례를 시키고 시집 장가보내주어야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인데 하루아침에 표독스럽게 '남편 한 사람이 죽었으니 내가 시부모를 위해 살아야 할 이유가 없고, 남편 한 사람이 죽었으니 내가 자녀들을 위해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각박하게 생각하고는, 전후 사정을 전혀 돌아보지 않은 채 횃대에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만다. 이런 사람을 어찌 모질고 잔인하여 매우 효성스럽지 못하고 자애롭지 못하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하의 올바른 도리는 하나뿐이다. 매우 효성스럽지 못하고 자애롭지 못하면서 유독 남편에 대해서만은 올바른 도리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백성을 다스리는 관장이 되어 이런 사람에게 그 마을에 정표하여 주고 호역을 면제해 주고 아들과 손자들에게까지 요역을 감면하여 준다면 이는 매우 효성스럽지 못하고 자애롭지 못한 일을 백성들에게 사모하여 본받도록 권면하는 것이 되니, 어찌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때문에 열부가 아님은 물론이고 소견이 좁은 소치인데 유사가 살피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 이야기를 살펴보면 당시 실학자들이 얼마나 현실을 중요시한 실사구시 학문을 했는지 이해가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헛된 명분이나 남의 시선 때문에 진정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잊어버리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실학자들은 바로 이에 대해 이렇듯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었던 것입니다.

당신이라면 살겠습니까, 먹겠습니까

그런데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적으로 식인의 문화는 꽤 오래된 악습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굳이 아프리카까지 멀리 가지 않더라도, 이웃 국가인 중국의 경우에도 한나라가 건국된 기원전 206년부터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까지, 식인의 기록이 220차례나 정사에 등장할 정도로 많이 발생했습니다.

물론 죄인을 벌주기 위한 내용이나 복수를 위해서 등 다양한 이유가 있었지만 식인의 풍습은 영원히 사라져야 할 악습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만약 영화 <얼라이브>에서처럼 조난자들이 생존을 위해 죽은 사람의 인육을 먹으며 버텨야만 할 정도로 피치 못할 상황이 발생한다면, 여러분은 과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덧붙이는 글 | 최형국 기자는 중앙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전쟁사/무예사 전공)를 수료하고 현재 무예24기보존회 시범단 단장을 맡고 있습니다. 무예 홈페이지 http://muye24ki.com 를 운영합니다.


태그:#인육, #조선왕조실록, #정약용, #실학자, #식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무예의 역사와 몸철학을 연구하는 초보 인문학자입니다. 중앙대에서 역사학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경기대 역사학과에서 Post-doctor 연구원 생활을 했습니다. 현재는 한국전통무예연구소(http://muye24ki.com)라는 작은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