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할머니께서는 결혼을 두 번 하셨다고 했습니다. 첫 결혼에서 자식을 낳지 못해 첫 남편과 헤어졌고, 두 번째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았지만 두 번째 남편은 일찍 세상을 떠나버리고 홀로 아들을 키웠다고 했습니다.

살기 힘든 할머니는 아들을 초등학교에 입학하라고 돈 500원을 쥐어서 혼자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내 아버지는 그 돈으로 학교에 가지도 않고 축구공을 하나 사와서 날마다 그 공으로 축구를 하고 학교에는 아예 입학도 하지 않았고, 그런 아버지를 할머니 또한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억지로 보내지도 않아서 내 아버지 학력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아버지는 시골에서 농사만 짓고 술로 숱한 세월을 보내시면서 학력의 중요성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자 나를 두고 서울의 어느 부잣집에 식모로 보낼까, 아니면 서울에 있는 봉제공장에 보낼까 늘 동네 어른들과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공장이야 동네 언니들이 다닌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괜찮았지만 남의 집 식모로 간다는 건 어린 나에겐 너무나 두려운 소리였습니다. 다행히 동네 언니의 추천으로 서울에 있는 봉제공장에 '시다'(보조원)로 취직을 하였고, 미싱사 언니들의 갖은 심부름을 하였습니다. 또 갖은 욕설을 들었으며, 관리자들의 눈치를 보며 다리미질을 하였고, 쪽가위로 날마다 옷에 붙은 실밥을 땄습니다.

낯선 서울에서 미싱사 언니들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술에 취해 늘 집안을 뒤흔들던 우리 아버지보다 더 무서웠습니다. 나는 그렇게 힘겨운 봉제공장 시다를 하며 같은 기숙사에 사는 미순이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나는 '시다', 미순이는 '경리'... 나와는 왠지 다른 세계의 친구 같아 슬펐다

미순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봉제공장의 경리로 들어온 친구였습니다. 미순이와 친구가 되긴 했습니다. 하지만 미순이는 사무실에서 깔끔한 의자에 앉아서 늘 볼펜으로 서류정리를 하고, 시간 나면 근무시간에도 늘 책을 읽고 커피도 마음대로 마셨습니다.

반면에 나는 늘 옷에 실밥을 더덕더덕 붙이고, 사무실에 한번이라도 들를라치면 내 옷매무새를 다듬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미순이는 나와는 왠지 다른 세계 친구 같아서 자꾸만 슬펐습니다.

같은 공장 아저씨들은 시다를 하는 나에겐 늘 '공순이'라 부르면서도 경리를 하는 미순이에게는 늘 깍듯하게 대했습니다. 한참 사춘기였던 나는 자꾸만 나 자신이 초라해짐을 느꼈고, 또 아무 죄 없는 미순이와도 서먹하게 되었습니다.

그즈음 우연히 길을 가다가 전봇대에 붙은 전단지를 발견했습니다. 어느 교회에 있는 야학인데 밤에 공부를 가르쳐 준다고 했습니다. 늘 배움에 갈증이 난 나는 앞뒤 가릴 것도 없이 그 야학을 찾아갔습니다.

서울 양평동 뒷골목 어느 교회의 지하실로 내려가니, 대학생들과 직장인들이 대부분인 선생님들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한글부터 고등학교 과정까지 검정고시를 볼 수 있게 도와주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망설일 이유가 내겐 하나도 없었습니다. 책값만 내면 고등학교 과정을 다 배울 수 있다고 하기에 등록을 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꿈에 부풀어서 하루종일 서서 시다를 하고서도 힘든 줄도 모르고 야학에 다녔습니다.

선생님들은 힘든 우리들을 위해 공부가 끝나면 떡볶이도 사주고, 가끔 나이 든 직장인들에겐 막걸리도 사주곤 했습니다. 선생님들은 내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였습니다. 공장에서 야근을 하는 날이면 일을 하면서도 마음은 늘 야학에 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야근을 밥 먹듯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엔 힘든 나날들이었습니다. 많은 날들을 울었습니다. 라디오에서 슬픈 노래가 나와도 울었고, 옆자리 친구가 엄마 이야기만 해도 함께 부둥켜안고 울었고, 옥상에 올라가 밤하늘의 별을 세면서도 울었습니다.

하지만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날마다 일기를 쓰기로 했습니다. 물론 울며 일기를 쓴 날이 울지 않고 쓴 날들보다 많았지만, 그렇게 일기를 쓰고 또 쓰다 보면 속이 후련하게 뚫렸습니다. 그런 나를 알던 야학 선생님께서 YMCA대학생부에서 공모하는 '직업청소년문예대상'에 응모를 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울며 쓰기 시작한 '일기', 그리고 '직업청소년문예대상'이 내 삶을 바꾸다

미순이에게 열등감이 있던 나는 '동갑내기의 슬픔'이라는 주제로 시를 한 편 써서 공모전에 보냈습니다. 많은 세월이 흘러 내용은 다 생각나지 않지만, '같은 나이에 같은 공장에서 일하며 너는 참 깔끔한 데서 일도 하고 책도 보고 부러운데, 중학교만 졸업했다는 이유로 난 늘 실밥 덕지덕지 붙이고 살아가야 하고 공순이라 불리는 것도 싫고,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다, 우린 분명 나이도 같고 친구인데…'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얼마 후, 야학으로 공모전에 당선됐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나보다도 야학 선생님들이 나를 얼싸안고 더 좋아해 주셨고 많은 상금도 받았습니다.

그 후, 자신감을 얻은 나는 라디오 방송에도 사연을 써서 보내 당선이 되었고, 선물도 받곤 했습니다. 나는 더 이상 공장에서 미순이에게 뒤처지는 친구도 아니었고, 더 이상 아저씨들이 공순이라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본사에까지 소문이 나서 사장님도 나를 보면 대견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고, 본사 직원들도 나를 알아보곤 예뻐해 줬습니다.

너무나 힘든 공장생활 때문에 야학을 다 마치지도 못했고, 고등학교 졸업장을 갖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미순이에 대한 학력 열등감 때문에 쓰기 시작한 일기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를 '학력콤플렉스'에서 벗어나게 해주었고, 학력이 어린(?) 나를 행복하게 키우고 있습니다.

물론 나는 언제라도 기회만 되면 공부를 시작할 것입니다. 학력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고등학교 과정은 뭘 배우고, 대학교에서는 뭘 배우는지 사실 너무 궁금하니까.

덧붙이는 글 | <내가 겪은 학력 콤플렉스> 응모글입니다.


#학력 콤플렉스#시다#공순이#야학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