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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꽃은 대체로 높은 산악지대인 설악산 대청봉이나 공룡능선에 많이 피는 꽃이다.
ⓒ 서종규
구름이 가득한 설악산 대청봉 오르는 길은 10m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난 길을 따라 앞으로만 나아가야 한다. 중청대피소를 지나 눈잣나무숲을 지나 바위길을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눈에 들어오는 것이 분명 하얀 바람꽃이었다. 세찬 바람에 하얗게 흔들리면서 바람을 맞는 꽃이다.

하얀 꽃이 흔들린다. 꽃잎들은 바람들이 낸 생채기들로 별로 온전한 것이 없다. 그래도 바위틈새에 무더기 져 피어 있는 바람꽃은 지독한 안개와 지도한 바람에도 하얗게 웃고 있는 것이다. 하얗게 바람에 흔들리면서 꽃을 피워내는 놀라운 생명력의 경이가 가슴 가득 밀려온다.

설악을 생각할 때마다 늘 머리에 가득한 것은 하얀 바람꽃이었다. 몇 년 동안 대청봉이나 공룡능선을 등산할 때 그렇게 순수하게 다가오던 꽃이었다. 설악산 높은 봉우리에만 사는 꽃, 그래서 늘 설악산의 봄꽃들이나 가을의 단풍이나 겨울의 설경이 압권이지만 여름 설악의 대청봉에 피어 있는 바람꽃이 더 그립다.

▲ 대청봉도 보이지 않은 지독한 구름 속에 하얗게 피어서 바람에 눕고 있는 꽃이 눈에 들어왔다.
ⓒ 서종규
8월 1일 오전 10시, 산을 좋아하는 '풀꽃산행'팀 7명은 설악산을 향하여 광주에서 출발하였다.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영동고속도로 호법나들목에 접어들자 정체가 되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어렵게 원주로 들어가 일행 한 명을 더 태우고 중앙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홍천나들목으로 나가 인제를 지나 한계령 아래 마을로 찾아들었다.

한계령으로 오르는 길은 작년 여름에 내린 폭우로 생긴 생채기들은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차들은 임시 도로로 겨우 다니고 있지만 전체 구간에 걸쳐 복구 작업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직도 파괴된 채 개울 한가운데 버려진 집들도 있었다. 거대한 홍수가 삼켜버린 설악의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저녁 8시에 민박에 들었다. 파괴된 마을이었고, 복구 작업에 한창인 마을이었지만 우리가 깃들 민박은 있었다. 민박집에서 저녁을 짓고 있는데 쏟아지는 빗줄기가 한층 굵어졌다. 그리고 밤 동안 몇 번 많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 구름 속의 소나무들은 모두 수채화처럼 우리들의 시야에 멈추어 있었다.
ⓒ 서종규
2일 새벽 5시에 한계령(1004m)을 향해 출발하였다. 비는 그쳐 있었다. 지독한 안갯속이다. 아니 구름 속이다. 설악산을 가득 사로잡고 있는 구름이다. 10m 앞도 보이지 않는다. 새벽의 일출과 운해를 기대하고 무거운 사진기와 삼각대까지 등에 멘 류홍렬 선생의 간절함이 안타깝다.

우리는 구름 속을 뚫고 지나갔다. 오직 보이는 것은 구름밖에 없었다. 10m 안쪽의 계단이며 바위며 소나무들은 모두 수채화처럼 우리들의 시야에 멈추어 있었다. 간간이 눈에 들어오는 하늘말나리며 동자꽃 등이 붉은 점으로 다가와 사라진다.

▲ 바람꽃은 하얀 꽃잎이 당당하게 설악산 대청봉의 바람을 맞아내고 있었다.
ⓒ 서종규
한계령에서 대청봉까지 8.4km를 그렇게 걸었다. 서북능선과 대청으로 갈라지는 한계삼거리를 지나 끝청(1604m)과 대청(1708m)까지 지독한 구름 속이다. 그 수려한 설악의 봉우리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봉우리 사이 가득 채워지던 운해도 보이지 않았다. 푸르게 다가오던 멀리 동해바다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간혹 작년 폭우로 난 생채기들을 복구하고 있는 계단이며 돌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전 10시, 끝청을 지나 봉우리를 내려가자 문득 눈앞에 중청대피소가 나타났다. 보통 끝청을 지나 봉우리에서 중청대피소와 대청봉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다 내려와도 중청대피소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중청대피소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 어떤 꽃은 벌써 몇 개의 꽃잎이 바람에 날려갔는지 빠져 있는 것들도 많았다.
ⓒ 서종규
▲ 지독한 구름 속에 싸인 설악산 대청봉의 모습
ⓒ 서종규
중청대피소에서 잠시 한 숨을 돌린 뒤 대청봉으로 향하였다. 중청대피소에서 대청봉까지는 100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오른 길도 험하지 않은데 바위를 밟고 올라야 한다. 대청봉도 보이지 않은 지독한 구름 속에 하얗게 피어서 바람에 눕고 있는 꽃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한계령에서 끝청을 지나 이곳까지 올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하얀 꽃이다. 바로 바람꽃이다. 혹시 눈에 띌까 봐 여기저기 자세히 보았는데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대청봉 오르는 길목에 무더기 져 피어 있었다. 그렇게 늘 머릿속을 자리 잡고 있던 하얀 바람꽃이 말이다.

어떤 꽃은 벌써 몇 개의 꽃잎이 바람에 날려갔는지 빠져 있는 것들도 많았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얀 꽃잎이 당당하게 바람을 맞아내고 있었다. 거친 바람을 다 이겨내며 흔들거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달려가 꼭 안아 주고 싶었다. 모자가 날려갈 정도의 바람이 계속 부는데 더 당당하게 몸을 맡기고 있다.

▲ 설악산 대청봉에 핀 바람꽃
ⓒ 서종규
▲ 설악산 대청봉에 핀 바람꽃
ⓒ 서종규
바람꽃은 대체로 높은 산악지대에 피는 꽃이다. 특히 설악산 대청봉이나 공룡능선에 많이 피는 꽃이다. 한라산에서는 세바람꽃이 자란다. 꽃은 7∼8월에 하얗게 핀다. 바람꽃은 서양에서 '사랑의 괴로움'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다. 아네모네라는 미모의 여인이 꽃으로 피어난 것이다.

옛날 꽃의 신 플로라에게는 아네모네라는 미모의 시녀가 있었다. 아네모네를 플로라의 남편인 바람의 신 제피로스가 사랑하였다. 이 사실을 안 플로라는 아네모네를 멀리 포모누의 궁전으로 쫓았다. 그러나 제피로스는 바람을 타고 곧 그녀를 뒤쫓아서 둘은 깊고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결국 새로 변한 플로라는 두 사람이 사는 곳으로 날아가 그 광경을 보고 질투에 불탄 나머지 아네모네를 꽃으로 만들었다. 슬픔에 젖은 제피로스는 언제까지나 아네모네를 잊지 못하고 매년 봄이 오면 늘 따뜻한 바람을 보내어 아네모네를 아름답게 꽃피운다고 한다. - <바람꽃 전설>


▲ 설악산 한계령 - 대청봉 - 오색약수터를 향하는 발길
ⓒ 서종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행들이 대청봉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바람꽃과의 만남은 순간이 되었다. 짧은 만남과 긴 이별의 시작이 된 것이다. 지독한 안개와 빗방울까지 맞아가며 몇 장의 사진으로 설악산 대청봉에서 만난 바람꽃과의 상봉은 끝이 났다.

대청봉에서 몇 장의 사진을 찍고 오색약수터로 내려왔다. 오색약수터로 내려가는 길은 무수히 많은 계단으로 되어 있다. 나무로 된 계단도 있고, 돌들을 쌓아 놓은 계단도 있다. 거의 대청으로 오르는 5km의 모든 길이 계단으로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하얗게 흔들거리는 바람꽃을 그냥 남겨 두고 떠나온 아쉬움이 못내 발걸음을 더디게 한다.

▲ 오색약수터에 내려와 본 한계령
ⓒ 서종규

태그:#설악산, #한계령, #대청봉, #오색약수터, #바람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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