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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의 이맘때, 이메일을 열어보다가 한숨을 쉬며 쓰게 웃었다. 연세 지긋하신 모 대학 사학과 교수님께서 보내준 자료가 온통 한문이었던 것이다.

역사를 쓰는 작가를 희망하여 해당 분야에서 쓰이는 대부분의 단어와 전문용어쯤은 어렵지 않게 독해하는 나로서도 그 자료는 아예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약간의 주석(註釋)을 제외하면 온통 한문으로 작성된 그것은 난해한 암호에 가까웠다.

3년간의 고통스런 독학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자료였지만, 끝내 한글 번역본을 요청하지 못했다. 교수님께 다시 한 번 도움을 청하지 못한 것은 서울 변두리의 삼류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전부인 학력이 들통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수고스럽게 자료를 보내준 교수님은 내가 동양사학을 어느 정도 레벨 이상으로 수강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출신학교와 지도교수에 대해서는 대충 얼버무렸지만 곧 이어진 질문을 겸한 토론은 그런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그 교수님이 출판한 저술을 모두 구입하여 통독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자신이 낸 책을 시기와 주제별로 나누어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노트를 보고 크게 기뻐하던 그분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만일 그 교수님이 사실을 알았다면 과연 만나주었을까 의문이다. 만나주기는커녕, 재수 없다고 소금을 뿌릴 확률이 컸다.

실제로 나는 그런 푸대접을 당하는데 익숙했다. 유명 신문사인 <한국일보>의 기술직이어서 먹고사는 데 그리 지장이 없던 내가 어느 날 느닷없이 역사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다음부터 학력은 절대 분리될 수 없는 족쇄로 기능했다.

공고에서 제대로 된 역사를 가르쳐 줄 리가 만무한데다, 졸업한 지 20년이 넘었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지식은 중졸 수준도 되지 못했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도 모르던 나로서는 대학의 사학과에 전화할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통화가 되어 용건을 이야기하면 첫 마디가 "우리 학교 출신이냐"는 것이었다.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대부분 전화가 끊겼다. 지금은 바쁘니 내일 전화하라고 하여 그 시간에 전화하면 거의 100% 연결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학력 때문에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할 뻔했던 일도 있었다.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한 유명한 의병장에 대한 고증이 필요하여 그쪽 문중에 전화를 하였는데, 이름과 경력을 묻기에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그랬더니 대뜸 "너같이 이름도 없고 무식한 놈이 우리 조상님에게 누를 끼치게 할 수는 없다"며 흥분하는 것이었다. 계속해서 "만일 네 책에 그 사실이 나오기만 하면 당장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말하는 데는 절로 눈물이 쏟아졌다. 어렸을 때 부모님 말씀 안 듣고 베짱이처럼 놀아댄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다.

사실 학력에 대한 콤플렉스를 체감한 것은 그 이전이었다. 1988년에 <한국일보>에 특채된 직후부터였으니까 거의 20여년 전부터였다. 주변에서는 <한국일보>에 근무한다고 하면 기자로 알기 일쑤였다. 기자가 아니라고 말하면 출신 대학과 학번을 물어보는 것이 정해진 코스였다.

그저 고졸의 기술자라는 것을 알게 된 그들은 눈에 띄게 냉담해졌다. 그들이 지레 그렇게 짐작한 것인데도 내가 학벌을 속이기라도 한 것처럼 되어버리기 십상이었다. 그 이후 나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인쇄소에 다닌다고 말했다. 무식한 기술자의 직장으로는 인쇄소가 아주 제격이었다. 그렇게 한 다음부터 덜 당혹스러워졌지만 그럴수록 학력에 대한 콤플렉스는 더욱 짙어졌다.

겨우 학벌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은 마침내 출판 작가의 반열에 든 다음이었다. 가장 어렵다는 역사소설을 장편으로서도 보기 드문 7권이나 출판한 즉시 신분이 수직상승 되었다. '공고를 나와 겨우 먹고사는 무식한 기술자'에서 하루아침에 '유식한 작가선생님'으로 환골탈태(換骨奪胎) 한 것이다. 백조로 변신한 미운 오리새끼의 심정이 충분히 공감되었다.

첫 작품을 완성하기까지의 3년은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웠지만 대가는 충분했다. 방금 갈아낸 먹으로 선명하게 자자(刺字)된 같던 콤플렉스가 상당히 희석된 것으로도 충분히 기쁠 수 있었다.

이후로 매년 1편 이상은 발표하였고 올해도 이미 2편 이상의 출판이 예약되어 있다. 그리 유명하지 않더라도 역사를 쓰는 작가로서 게으르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한 것이겠지만, 지금까지 출판된 책에서는 최종학력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오는 9월에 출판될 인문서적의 원고에도 작가의 학력은 소개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책의 판매량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출판사의 권고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나 자신부터가 학력을 공개하는 것을 원치 않은 결과다. 인문서적까지 낸 역사 작가가 2년제 대학도 나오지 못했다는 것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두렵다.

주변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강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나 가능할 일이다.

내가 만일 지방 대학이라도 나왔다면 굳이 작가가 되려는 결심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작가로 만들어 준 것은 대학을 나오지 못하고 몸으로 먹고사는 계층에게 사람대접을 하지 않는 냉혹한 사회구조였다. 보다 정상적인 사회였다면 작가가 될 필요는 없었으리라. 밤새워 독학하고 작품을 집필하는 기간과 노력은 직업에 투자되어야 마땅했다.

직접 밥을 먹여주는 기술을 대성하는 것이 개인과 국가경쟁력에 도움이 되겠지만, 그렇게 해본 들 결국 무식한 천민(賤民)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거기서 탈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작가를 선택한 것이었다.

문제는 양반과 상놈의 이분법적 구도에서 발원했다. 지배계층인 양반과 건너편의 상놈과 확연하게 구획되는 특질은 배웠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홍패(紅牌)가 대학졸업장으로 대치되고 합격의 순위는 대학의 퀄리티에 대입하면 무리가 없어 보인다. 아무튼 양반 행세를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상놈이 있어야 할 것이다.

몸으로 먹고사는 고졸 이하가 피지배 계층으로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처우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겪었던 고통 역시 우리를 견고하게 구획해버린 이분법적 구도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비록 작가가 되어 불학무식한 상놈 대접은 받지 않게 되었지만 최종학력의 흔적은 억지로 지운 문신처럼 흉측하고 눌어붙어 있다.

정작 아이러니한 것은 모든 국민이 양반이라는 점이다. 자신이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이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족보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혹시 없더라도 적절하게 통용될 수 있는 이유가 준비되어 있다. 국민의 전부가 양반이라는 것은 대학졸업장이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약간만 생각해보자, 과거에 모두가 양반이었다면 누가 그들을 먹여 살렸다는 말인가? 사병은 한 명도 없이 오직 장군만으로 편성된 군대와 직원은 전혀 없이 100% CEO로 구성된 회사가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그런 나라에서 정상적인 상식이 적용되기 어렵다. 인격과 학력을 동일시하여 상대적 우위를 누리려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이 바뀌지 않는 한 바람직한 국가로의 진행은 PPM 단위로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학력 콤플렉스' 응모 글입니다.


태그:#삼류 공업고등학교, #학력 콤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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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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