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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쯤, 한국문단의 원로 시인 임강빈 선생께서 내게 '집 한 채'를 보내주셨다. 한 달 동안 임강빈 선생께서 보내주신 그 '집 한 채'에 머물면서 배움을 많이 얻었고 내내 행복했다. '집 한 채'는 도서출판 황금알에서 나온 임강빈 시인의 열한 번째 시집 제목이다.

마당이 없는 집으로 이사했다

처음엔 잔칫날 같아 들뜨기도 했지만
사글세 전세로 자주 전전하면서
내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았다

삼십 년 넘게 쌓인
먼지를 털었다

마당에 서 있는 감나무
그 나뭇잎이 간댕거린다
섭섭하다는 표정

마지막이지 싶다
다음은
이삿짐 챙길 일도 없을 것이다

- '이사' 전문


시집 맨 첫머리에 실려 있는 시다. '무욕(無慾)의 시학, 평범의 시학'이라는 임강빈 시인의 시 세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시편이다. 임강빈 시인의 시는 내용과 표현의 양 측면에서 억지가 전혀 없다. 모호하거나 난해하지 않고, 진솔하면서도 명징하다.

삼십 년 넘게 사셨던 집에서 '마당이 없는 집' 즉 아파트로 이사를 하신 모양이다. 선생과 같이 지구라는 별에, 이 세상에 함께 이사를 와서 인사를 나누고 시집을 주고받으면서 공부를 하게 된 것이 참으로 행복하다.

조영서 시인은 시집 표4의 글에서 임강빈 시인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대전을 생각할 때마다 임강빈 시인이 떠오른다. 임강빈 시인은 대쪽같이 곧은 선비시인이다. 흐트러짐 없이 고고하다. 맑고 순결한 참눈을 가졌다.

언젠가 <현대시학>에 '참눈, 참시, 참시인'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는 맑은 눈으로 하늘과 땅의 숨결을 마시고 햇빛과 바람을 만진다. 풀꽃이나 풀벌레 소리에서도 우주를 보고 듣는다. 빛과 어둠을 넘나들며 주옥같은 시를 빚어낸다. 자연과 인생, 우주의 섭리와 이치를 깨닫고 끝없는 상상의 날개를 펼친다.

이 같은 일이 어디 예사로운 일인가. "아픔 반 눈물 반/혼자 만들어낸 나의 흔적/깊은 철야 속/반짝이는 별처럼"('애지중지') 지금도 시인은 말을 갈고 닦는 피 말리는 산고를 겪으며 고독과 싸우고 있을 것이다."


시집 <집 한 채>는 <한 다리로 서 있는 새>(리토피아,2004) 이후 3년 만에 나온 임강빈 시인의 열한 번째 시집인데, 77편의 신작시와 시인의 얼굴과 육필 원고, 시작 노트, 연보 등으로 꾸며져 있다. 임강빈 시인은 자신의 시 세계를 '간단명료'라는 시에서 '간단명료'함이라고 부르고 있다.

"흔히들 나의 시를 보고/간단명료하다고들 한다/칭찬인지 폄하인지는 몰라도/별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무엇을 따진다거나/복잡한 것은 질색이다//간단명료"('간단명료' 부분.)

그리고 시작 노트인 '나의 문학 주변, 기타'에서도 '간명함'의 시학은 계속 이어진다.

"시는 요설보다는 간결미,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상상력의 문학이다. 시는 감정을 바탕으로 깔고 거기에 얼마간의 지성과 결합할 때 아름다운 시가 된다. 개성이 없는 시는 죽은 시, 스스로를 포기한 행위이다. 그리고 서정시는 경제적이어야 한다. 적은 언어로 많은 의미의 울림을 줄 줄 알아야 한다."

어머니가 쓰신
얼레빗 하나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 '낮달' 전문


단 4행만으로 이루어진 이 시를 두고 어떻다고 말해야 할까? 선생의 말씀처럼 "적은 언어로 많은 의미의 울림을 줄 줄" 아는 시는 바로 이를 두고 이르는 게 아닐까. 고희(古稀)를 훌쩍 넘긴 나이의 노시인이 이생에 내 생명을 빚어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절절한 마음이 시의 행간에 그 여백에 가득하다.

어떤 독자가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좋은 시 쓰세요/후줄근한 이 세상/그늘에서 죽어가는 사람 많아요/건강한 시 남기세요")를 들으면서 자신의 시 세계를 되돌아보고 창작의 마음을 붙잡아매는 '좋은 시 쓰세요'라는 시편도 평범하면서 큰 의미와 울림을 담고 있다.

"가로수 위로 올라갈수록/점점 커지는 공간"의 예지를 꿰뚫고 있는 임강빈 선생의 시편들이 더 오래, 많이 창작되어 세상의 그늘을 살려내는 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 '이종암의 책 이야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임강빈 시인

1931년 공주 출생. 1956년『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당신의 손』『동목』『매듭을 풀며』『등나무 아래에서』『조금은 쓸쓸하고 싶다』『버리는 날의 반복』『버들강아지』『비 온는 날의 향기』『쉽게 시가 쓰여진 날은 불안하다』『한 다리로 서 있는 새』, 시선집 『초록빛에 기대어』가 있다. ‘충남문화상’ ‘요산문학상’ ‘상화시인상’ ‘정훈문학상’ 수상.


집 한 채

임강빈 지음, 황금알(2007)


태그:#임강빈, #집 한 채, #황금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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