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금나라(박신양)는 자신이 모시는 사채업자 마동포(이원종)가 부모님을 죽인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난처하기도 하다. 자신의 꿈을 이루려면 마동포가 꼭 필요하니, 그를 처치할 수 없는 금나라 처지다. 그의 꿈은 큰돈을 버는 것. 사채업이면 어떠한가.

부모의 복수라는 명분을 이룰 것인가, 아니면 현실에 순응해 묵묵히 돈을 벌 것인가. 독고철(신구)은 울분에 찬 금나라에게 호통을 친다. 그깟 감정하나 조절하지 못해 큰 뜻을 어떻게 이루겠느냐는 것. 금나라는 명분보다 현실을 선택한다.


드라마를 보지 않는 이도 요즘 웬만하면 다 아는 SBS 드라마 <쩐의 전쟁>중 한 장면이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치욕을 감내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치욕을 감내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 이보다 더 인간을 괴롭혀 온 화두가 없다.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이 겪는 일이기도 하다.

소설 <남한산성>을 통해 김훈은 말한다. '삶은 치욕이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자존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란다. 죽어서 살아남는다는 말은 없다. 치욕과 자존은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금나라는 부모님 원수와 동업하는 치욕을 선택했다.

영화 <캐러비안의 해적 3>에서 잭 스패로우는 해적의 철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열심히 싸우다가 재빨리 도망가는 것". 멋진 영웅인척 하지 말고 위험한 상황에서 자신의 목숨을 우선 챙기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신념에 따른 거창한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어깨에 힘주기를 포기한다. 그러한 덕분인지 그는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화려한 영웅담이나 용기, 활극이 아니라 죽을 고비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에 그는 위대한 선장 잭 스패로우가 되었다. 그에게 삶의 목표는 우선 살아남기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치욕을 감내하며, 무엇이든지 해야 한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성공을 위해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아야 한다. 돈이 없다는 사실은 비참하고, 치욕을 주며 자존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IMF 체제 10년의 치욕을 비참하게 겪은 사람들의 심리적 기반이다. 사채 대부업이건 굴복이건 그리고 줄행랑이건에 관계없다. 그런 과정에서 자신은 살고, 남들을 몰살시킬 행동은 이기적 유전자 탓으로 맡기면 된다.

"청병이 곧 들이닥친다는데, 너(뱃사공)는 왜 강가에 있느냐?"
"청병이 오면 얼음 위로 길을 잡아 강을 건네주고 곡식이라도 얻어 볼까 해서…."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의 뱃사공은 죽었다. 다른 생명들의 죽음에 무심했기 때문이다. 인조는 생명들을 살리기 위한 항복으로 살았다. 잭 스패로우는 생명을 빼앗으려는 이들에 대항했기에 살았다. 쩐(돈)을 위해 다른 생명을 앗아가는 사채업자가 될 때 금나라는 어찌될까. 죽음이 죽음을 파괴하고, 삶이 삶을 파괴하는 법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스메이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금나라, #쩐의 전쟁, #잭 스패로우, #남한산성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