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아시아의 대표로 멕시코를 밟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일본은 외국인 감독을 통해서 선진 축구를 도입하려고 하였다. 일본의 감독(엄밀히 말하면 기술 고문)으로 선정된 사람은 1954년 월드컵에서 헝가리를 꺾고 서독을 우승시킨 바 있는 독일의 제프 헬베르거의 수제자 중 한 명인 디트마르 크라머였다. 크라머는 이후 일본과 깊은 인연을 갖게 된다. 그는 비록 본선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1962년 칠레 월드컵 지역예선전에 일본팀을 이끌고 한국과 대결하기도 했으며,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는 남미의 아르헨티나를 꺾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일본 축구는 크라머를 통해서 한단계 한단계 업그레이드 되고 있었다. 1967년 9월 27일부터 일본 도쿄에서 열린 지역예선 A조에는 일본, 한국, 베트남, 레바논, 대만(자유중국), 필리핀의 6개국이 한 장의 본선 티켓을 놓고 풀리그 전을 벌였다. 이들 중에서 한국과 일본이 1위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일 것이라는 예상 속에 양 팀은 약체로 지목된 팀들을 하나씩 격파해 나갔다. 일본이 필리핀과의 경기에서 15-0이라는 엄청난 스코어를 기록한 것은 크라머 감독의 결단력의 결과였다. 이미 5-0, 6-0의 스코어로 승리가 확실해진 상황에서 크라머 감독은 나중에 득실차를 다툴 때까지 생각하면서 선수들에게 계속 공격을 주문했다. 결국 일본과 한국은 4승 1무를 기록하여 골득실을 따지게 되었고, 크라머 감독의 예상대로 일본이 골득실에서 우세하여 멕시코 본선 진출을 확정짓게 되었다. 여하간 1968년 일본 축구 대표팀 사령탑을 맞은 크라머 감독은 일본팀을 이끌고 멕시코 본선 무대를 밟게 되었다. 물론 삼류 국가들과의 예선이라고 하더라도 4승 1무, 26득점 4실점(그중의 3실점이 한국과의 경기에서 나왔다)이라는 지역예선에서 보여준 일본팀의 득점력은 그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기에 충분했다. # 조별리그, 브라질을 따돌리고 결승 토너먼트에 오르다 멕시코 올림픽 본선에서 일본은 강팀들과 한조가 되었다. 유럽 챔피언을 지낸 바 있는 스페인,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남미의 브라질, 그리고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가 그들의 상대였다. 일본으로서는 브라질은 올림픽과 인연이 없다는 징크스와 오늘과는 달리 나이지리아는 당시에는 만만한 팀이었다는 사실에 운명을 걸기로 작정한다. 일본의 첫 상대는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였다. 일본은 나이지리아와의 경기에서 3-1로 승리를 거두며 귀중한 1승을 거두었다. 원하던 승리를 챙긴 일본의 다음번 상대는 남미의 강호 브라질이었다. 브라질은 첫 경기에서 스페인에게 0-1로 패하고 당황해하고 있었다. 일본은 크라머 감독의 용병술에 의하여 브라질과 1-1 무승부를 기록하였다.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는 2승으로 선두를 달리고 있는 스페인과의 경기였다. 일본으로서는 최소한 비기기만 해도 자력으로 8강이 겨루는 결승 토너먼트 진출을 확정지을 수 있었다. 일본은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0-0으로 무승부를 기록하였다. 다른 한편에서 브라질은 나이지리아와 3-3으로 비기며 2무 1패로 1승 2무의 일본에게 밀리며 조 3위를 기록하고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다. # 아시아 국가로서는 처음 획득한 값진 동메달 준준결승에서 일본은 유럽의 강호 프랑스를 만나게 되었다. 전반을 1-1로 비긴 일본은 후반에 두 골을 넣으며 3-1로 승리하고 준결승에 진출하는 감격적인 순간을 맞이하였다. 일본은 이미 자신들의 목표를 초과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은 결승으로 가기 위해서 디팬딩 챔피언 헝가리와 맞붙었는데, 헝가리는 그동안 일본이 만났던 상대들과는 달리 한 차원 높은 팀이었다. 결국 일본은 헝가리에 0-5로 패하며 3-4위전(동메달 결정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동안 아시아의 국가 중에서는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인도가 4강에 진출해서 불가리아에 0-3으로 패하며 4위를 차지한 것이 최고의 성적이었다. 아시아로서는 12년 전에 인도가 아깝게 놓친 동메달을 획득하기 위해서 일본이 나선 것이다. 일본은 동메달 결정전에서 개최국 멕시코를 2-0으로 꺾으며 아시아 국가로는 처음으로 축구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루게 되었다. 지역예선에서 접전을 벌이며 아깝게 탈락한 한국의 입장에서는 부럽기 그지없는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아시아로서는 1966년 월드컵에서 북한의 8강 신화에 이어 1968년 올림픽에서 일본이 동메달을 차지하며 더 이상 세계무대에서 들러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성적을 통해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 일본 축구의 아버지, 크라머 감독 크라머 감독은 일본 축구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그는 선수 개개인의 심리적인 상태를 체크하며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데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20여년 후, 한국의 올림픽 대표팀 총감독으로 부임한 크라머가 한국인 코칭스태프와 불화를 일으키며 중도에 하차하지 않았더라면, 한국 축구는 히딩크보다 10년 전에 세계를 놀라게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본은 크라머 감독(엄밀히 말하면 기술 고문)의 지도에 절대적으로 신뢰를 했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올림픽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크라머 감독은 1962년 칠레월드컵 지역예선에 이미 일본 대표팀을 맡아 한국과 대결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 한국 대표팀을 높게 평가하며 “언젠가는 한국 대표팀을 맡아보고 싶다”고 말했던 크라머 감독은 30년 만에 그 소원을 이루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당시 대표팀의 일원이었던 선수들이 기억하는 크라머 감독은 온화하고 선수들을 배려하는 감독이었다고 한다. 다른 코칭스태프들은 크라머 감독 때문에 우리나라 선수들이 훈련을 게을리 한다고 불평을 하였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한 나라의 대표로서 훈련을 게을리 하는 것은 감독의 책임보다는 선수 개개인의 책임이 큰 것이다. 결국 김삼락 감독을 대표하는 코칭스태프와의 불화는 올림픽 본선 이전에 크라머 감독이 해임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독일의 크라머 감독은 1992년 우리나라 대표팀 총감독으로서 선수들에게는 사랑받는 지도자였지만, 코칭스태프와 축구협회에는 인정받지 못하는 지도자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들 중에 히딩크와 아드보카트 정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감독들이 한국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아쉬움 속에 떠나갔다. 물론 그들 중에는 한국 대표팀과 맞지 않았던 사람들도 있겠지만, 후에 돌이켜보면 성급한 판단과 깎아내리기의 결과가 아니었나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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