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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모내기를 하려고 논을 다루어 놓았네요. 마리산 끝자락이 조용히 물 속에 드리워져 있습니다.
ⓒ 이승숙

비 내리자 사방이 고요해졌습니다.

좀 전부터 비가 내립니다. 하늘이 어두워져 온다 싶더니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졌습니다. 꽃밭에 나 있는 잡초를 뽑던 저는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비가 쉽게 그칠 거 같진 않습니다.

비가 내리자 논에 있던 기계들도 다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기계 소리가 웅웅대던 사방이 다시 조용해지고 들리는 건 오직 빗소리뿐입니다. 비 오는 들판엔 아무도 없습니다.

겨우내 조용하던 들판이 깨어나기 시작한 건 지난 3월부터였습니다. 모판을 만드는지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또 조용해졌습니다. 비닐 온상 속의 모판에선 어린 벼들이 저 혼자 자라고 있었습니다.

진달래가 온 산을 붉게 물들이더니 곧 이어서 산벚꽃들이 피었습니다. 그러더니 물수국이 물이 올랐습니다. 몽실몽실 꽃망울들이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물수국이 피면 모내기를 하지."

옆집 송씨 아주머니는 딸 같은 저에게 그리 말했습니다. 물수국이 피면 모내기를 한다고. 그러고 보면 자연의 시계는 한치 흐트러짐도 없이 세세년년 잘 돌아갑니다.

▲ 물수국이 몽실몽실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물수국이 피면 모내기를 합니다.
ⓒ 이승숙

절기에 따른 농사, 지금은 보리 환갑철

팔순을 앞둔 친정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여쭤 보았습니다.

"아부지예, 옛날에는 뭐보고 농사를 지었심니꺼?"
"그때사 절기에 맞차서 농사 지었제. 그런데 요새는 종자가 다른강 옛날보다 한 보름 정도 일찍 시작하더라. 그 때는 하지 전에는 모내기 안 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보름 정도 일찍 모내기 한다."
"그라마 다른 거는 우에 했심니꺼? 씨 뿌리고 거두는 거는 우에 했심니꺼?"

귀가 약간 어두운 아버지는 제 말을 못 알아 들었나 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더 소리쳤습니다.

"아부지예, 옛날에는 우에 농사를 지었심니꺼? 요새는 달력 맞차서 농사 짓지만 그때는 뭐 보고 농사 지었심니꺼?"
"아, 그때사 어른들 말 따라서 안 했나. 춘분 지나마 봄채소를 심었제. 상추 같은 거 말이다. 그라고 밤나무에 앉은 삐둘키(비둘기)가 안 보일 때 미엉(목화)씨를 냈제. 곡우 때가 되면 나뭇잎이 성하게 한창 피거등. 그라마 밤나무에 앉은 삐뚤키도 잘 안 보일꺼 아이가. 그 때 미엉씨를 심었제."
"아, 농사를 그래 지었심니꺼? 그라마 그런 거 또 있심니꺼?"

아버지는 24절기를 줄줄이 말씀해 주십니다. 절기에 맞춰서 농사 짓던 옛날 이야기가 물꼬가 터진 것처럼 술술 나왔습니다. 휴대폰 통화요금이 슬며시 걱정되었지만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이런 이야기를 듣나 싶어서 아버지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망종은 보리 환갑인기라. 보리가 누렇게 익기 시작하고, 또 이내(곧) 타작을 해야 돼. 그 때부터 한 달 보름 정도 밤잠 못자고 일해야 했어. 일 년 중에 그 때가 제일로 바빴제."

▲ 사방 오 리도 더 되는 저 너른 들에 사람이라곤 몇 뿐입니다. 이제 농사는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다 짓습니다.
ⓒ 이승숙

예전보다 보름은 빨라진 농사, 종자가 달라서 그런지...

귀가 약간 먼 아버지와 전화통화를 하면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하다 보면 목이 다 아플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전화받는 아버지도 신이 났고 전화를 건 저도 재미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지금은 어찌된 셈인지 예전보다 뭐든 빠르다고 하십니다. 종자가 달라서 그런지 아니면 온도가 높아져서 그런지 보름 정도 일찍 시작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하지 전에는 모내기를 내지 않았는데 지금은 6월 조금 지나면 모내기가 시작된다고 하십니다.

"강화는 여게(여기)보다 날이 추우니 아매도 더 일찍 모내기를 할끼라. 여게는 인자 감꽃이 핀다."
"예, 아부지 여게는 요번 주에 모내기 다 할 거 같애요. 청도는 언제 모내기 합니꺼?"
"청도도 인자는 빨라져서 6월 초순이면 모내기 다 끝난다. 전보다 보름씩 빨라졌다 뭐든지."

아버지는 또 한동안, 말하자면 지구 온난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옛날 농사 짓던 시절로 돌렸습니다.

"백로에는 나락이 거꾸로 운다 캤다. 그 때 쯤 되면 나락(벼)이 충실해져서 고개를 숙이는 기라. 그 때 고개 안 숙이면 속이 안 차서 나락이 안 된다 캤어."
"그라고 또 뭐가 있어요? 아부지, 참 재밌네요. 또 없어요?"
"한로에는 논 뒤에 도구(고랑)를 다 팠어. 물 빠지게 말이야. 그라고 상강에 서리 내리거등. 상강 전에 서리가 내리면 그 해 겨울이 따시고 상강 후에 서리가 내리면 겨울이 어시(매우) 추웠디라. 그라고 입동 전에 보리를 가는데 그 참 희한하제. 입동 지나서는 보리를 갈지 마라 캤어. 입동 지나서 보리 갈면 보리싹이 안 올라 와."

친정 아버지는 당신이 한창 농사를 짓던 장정 시절로 돌아가신 듯 하나하나 옛 농사법을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저도 예전 어릴 때로 돌아간 듯했습니다. 보리 타작하고 모내기할 때, 그 바쁘고 힘들었던 그 때로 돌아간 듯했습니다.

▲ 물 속에 하늘이 숨어 있습니다. 사방은 조용합니다.
ⓒ 이승숙

기계가 농사 다 지어주지만 그래도 물수국은 피어

일 년 중 제일 바쁜 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합니다. 그 때는 일이 한꺼번에 몰려 있어서 아버지 말씀을 빌리자면 "한 몫에 일 하느라 어시(매우) 바빴다" 합니다.

보리를 베고 타작하는데 약 보름 정도의 시간이 걸렸고 또 모 찌고 논 다루고 모내기하자면 스무 날 정도 바쁘게 몰아쳤다 합니다. 그 한 달 동안은 밤잠도 못 자고 일해야 했답니다. 일꾼들이 참말로 고생 많이 했다 합니다.

이제 농사는 기계가 다 지어줍니다. 숨 돌릴 틈 없이 바쁘게 몰아치던 농번기도 이제는 며칠이면 끝납니다. 물수국이 피면 모내기를 하고 밤나무에 앉은 비둘기가 안 보일 만큼 잎이 우거지면 목화 씨를 심어라라고 가르쳐 주던 어른들은 이제 뒷전으로 물러났습니다. 절기에 맞춰서 농사를 짓고 욕심 없이 살던 무채색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뭐든지 빨라야 살아 남을 수 있습니다.

찬바람이 채 가시지도 않았던 3월에 못자리 만드는 걸 봤는데 어느새 모내기철이 되었습니다. 옆집 사는 송씨(63) 아줌마가 한 말이 떠오릅니다.

"물수국이 피면 모내기를 하지."

그러고 보니 물수국이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군요. 모내기철이 되었나 봅니다.

태그:#모내기, #물수국, #강화도, #24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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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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