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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2년 여신금융협회 주최 신용카드 윤리강령 선포 및 자정결의대회(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권우성

11일 오후 한 시중은행 서울 남부지점의 구내식당. 식당 입구 게시판에 직원별로 카드회원 유치 실적을 표시해 놓은 '상황판'이 큼지막하게 걸려있다. 실적이 가장 좋은 직원의 이름 앞에는 흡사 다단계 판매회사의 '판매왕'을 연상케 하 듯 별모양의 스티커가 붙어 있다.

이 지점에서 근무하는 김 아무개씨는 "본사에서 지점 별로 카드회원 유치 목표를 정해 놓고 이를 채우도록 독려하고 있다"며 "심지어는 식당에도 유치실적을 스티커로 붙여 놔 밥 먹는 동안에도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국내 선두급 은행 본점에 근무하는 최 아무개씨는 최근 회사의 카드회원 모집 지시를 접하고 깜짝 놀랐다. 6월말까지 1인당 10좌 이상의 카드 모집 할당이 떨어진 것. 본점 직원까지 카드 회원 모집에 동원된 것은 은행 설립 이후 처음이다.

최씨는 "그 동안 본점 직원에게까지 카드모집을 요구한 사례는 한번도 없었다"며 "올해 들어 회사가 카드 영업에 '올인'(다걸기)하는 분위기여서 반발하지도 못하고 부모님과 친구들한테 가입을 부탁하고 있다"고 말했다.


담보대출 막힌 은행들, 카드가 '살 길'

금융 기관들 사이에 신용카드사업이 최대 화두로 떠올랐다. 지난해 카드업계가 2조원의 순이익을 거둔데다 연말 카드연체율이 사상 최저 수준인 5.5%까지 떨어지면서 카드업은 '서자'에서 '효자'로 탈바꿈했다. 특히 은행들은 부동산 규제로 주택담보대출을 통한 수익 창출이 가로막히자 "이제 먹고 살 길은 카드 하나 뿐"이라며 경쟁적으로 카드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처럼 은행들이 당장 수익이 날 만한 카드업으로 몰리면서 과당경쟁을 빚고 있다. 이른바 '쏠림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금융권 관계자들은 은행들의 경쟁은 당장 고객들에게는 이익이지만 카드업계의 대형 부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전체 금융시스템을 불안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며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은행들이 카드 영업에 집착을 보이는 이유는 기존 사업의 수익성이 크게 악화됐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지난 1분기 사상 최대의 실적을 올린 것으로 나타났지만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민, 우리, 신한, 하나, 외환 등 주요 시중은행의 지난 1분기 순이자마진율(NIM)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0.13~0.36%포인트 하락했다. NIM은 은행들의 핵심 경영 활동을 나타내는 지표로 이 같은 결과는 은행들의 성장 잠재력이 계속 약해지고 있다는 의미다.

여기에 은행의 실질적인 이익창출 능력을 나타내는 총이익률은 2005년 2.98%에서 지난해 2.82%로 떨어졌다. 결국 새로운 수익원 발굴이 '지상과제'가 된 은행 입장에선 비이자 수익을 강화하기 위해 카드 사업에 주력하며 회원 늘리기를 목표로 과당 경쟁을 벌이고 있다.

카드 영업대전 불댕긴 '박해춘 카드'

▲ 국내 은행들 수익성 현황.
ⓒ 오마이뉴스 한은희
카드 회원 유치 경쟁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특히 LG카드가 신한금융지주에 편입되고, LG카드 사장 출신인 박해춘씨가 우리은행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은행들의 '카드 영업대전'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시중은행 가운데 여기에 가장 열을 올리고 있는 곳은 우리은행. 우리은행은 지난해 46조원이나 자산을 늘리며 덩치를 키웠지만 카드 부문에서는 여전히 시중 은행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했다.

박 행장은 취임 일성으로 "카드 부문의 경쟁력을 키우겠다"고 공언한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카드 영업 확대를 언급했다.

그리고 취임 한 달인 지난 7일 카드 영업 과당 경쟁에 불을 댕기는 첫 작품을 내놨다. 이른바 '박해춘 카드'로 불리는 '우리V카드'를 출시한 것. 이 카드는 그동안 항공마일리지 적립 대상에서 제외됐던 현금 서비스에 대해서도 업계 최초로 5000원당 1마일을 적립해 준다.

무엇보다 이 카드의 가장 큰 특징은 체크카드로 발급받은 뒤 6개월 후 신용도를 평가해 신용카드로 전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신용카드 발급 기준에 못 미치는 저신용자나 20대를 우선 체크카드 고객으로 확보한 뒤 나중에 신용카드 고객으로 흡수하겠다는 전략이다.

우리은행은 이에 발맞춰 최근 카드 영업소장 10명을 선발하고 영업소 1개당 10~20명의 카드모집 설계사를 확보했다. 또 2004년 폐지했던 카드 모집인 제도를 올해부터 다시 도입해 2개 영업소에 30여명의 모집인을 두고 있다.

전업계 카드사들도 '결전' 맞서... 과열 확대

▲ '우리V카드' 지면 광고.
우리은행의 이 같은 공격적 영업은 지난 2003년 카드대란의 원인이 됐던 현금서비스 과당 경쟁마저 불러오고 있다.

우리은행은 오는 6월까지 현금서비스 사용실적이 없는 우량고객에게 업계 최저 수준인 7.7%의 수수료율을 적용해 현금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하는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다른 은행들도 즉각 수수료 인하로 맞섰다. 기업은행은 다음달 13일부터 현금서비스 수수료율을 현행 11.25∼26.8%에서 8.0∼27.4%로 조정할 예정이다. 하나은행도 지난 2월부터 이용기간을 기준으로 18.72∼25.52%를 적용하던 현금서비스 수수료율을 신용도에 따라 9.9∼26.9%를 적용하는 방식으로 변경했다.

이에 대해 우리은행 신용카드 담당자는 "현금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도 우리은행 고객인데 그동안 이들에게 너무 혜택을 안줬다는 내부 비판이 있었다"며 "적립률이 높지 않은 편이어서 과도한 서비스라고 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 같은 은행들의 경쟁적 카드 영업은 금융감독당국의 지도로 한풀 꺾였던 카드사간 과열을 부추기고 있다. 삼성·현대·롯데 등 대기업 카드사들은 그동안 방어적이던 은행들이 대공세에 나서자 결전에 대비하고 있다.

현금서비스 비중이 가장 높은 LG카드는 최근 일부 고객에게 현금서비스 수수료율을 10∼20%까지 내렸고 삼성과 비씨카드도 일부 고객에 대한 현금서비스 수수료율을 7%대까지 낮추면서 은행계 카드사의 공세에 대응했다.

과당경쟁→수익성악화→동반부실 악순환 가능성

이처럼 은행계에서 촉발한 카드영업 경쟁이 업계 전체로 번지면서 당장 고객들에게는 이익이 돌아오지만 카드업계의 대형 부실로 이어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2003년 발생했던 카드 대란처럼 과당경쟁은 결국 수익성 악화와 동반 부실의 악순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홍종학 경원대 교수(경제학)는 "법적 규제를 강화해 카드사들의 무분별한 카드 발급 자체를 막을 수 있는 규정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금융감독당국도 2003년 카드 대란의 '싹'을 미리 자르지 못했던 학습 효과 때문에 업계의 과당 경쟁 실태를 주시하고 있다. 최근 하나은행이 파격적인 혜택을 제시한 '마이웨이카드'에 대해 판매 중단을 지시한 것을 비롯해 몇몇 은행에 대해서는 이미 공개적으로 주의 조치를 내렸다.

김준현 금감원 여전감독실장은 "카드사들이 새 상품을 출시할 경우 보통 다른 카드사 회원을 빼앗아 오기 위해 더 많은 혜택을 제공하게 된다"며 "다른 카드사도 이에 맞서 대응할 경우 결국 이 같은 경쟁은 부메랑이 돼 카드 사들의 수익성 악화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태그:#신용카드, #카드대란, #은행, #현금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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