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정상에 선 김미곤 대원
ⓒ 김창호

"베이스캠프, 베이스캠프, 여기는 정상…. 지지직"

5월 4일 아침 8시 22분(네팔 시각). 김미곤 대원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베이스로 날아오다가 끊어진다. 세계에서 4번째로 높은 로체 정상(8516m)에서 온 목소리. 순간 환호가 터졌다.

어제 밤 11시 40분에 C4를 출발한 강연룡·김미곤·윤중현 대원은 8시간 40분 동안 온 밤을 꼬박 걸어서 마침내 에베레스트 봉이 보이는 로체 정상에서 아침을 맞았다.

"여기는 정상"... 베이스캠프에서는 환호성이

로체(8516m)봉.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로부터 정남쪽으로 3㎞ 떨어져, 남쪽 봉우리라는 뜻의 봉이다. 첫 등정은 에베레스트 최초 등정 3년 후인 1956년 5월, 스위스 원정대가 했고 우리나라는 88년에 처음 올랐다.

로체봉은 베이스캠프에서 출발, C3(7100m)·C4(7650m)를 거쳐 빙하·청빙지역을 올라 긴 꿀와르 지대를 통과해야 한다. 적설량이 적으면 낙석지대를 로프를 설치해 통과해야 한다. 정상은 구들장 같은 바위지대 위에 만년설이 덮고 있다. 로체정상에 서면 에베레스트가 손에 잡힐 듯이 솟아 있다.

이번 등정은 올해 봄 시즌 네팔 쪽 베이스캠프에서는 첫 번째 8000m급 등정이다. 현재 베이스캠프에는 상업원정대를 비롯해서 30여개 원정대가 에베레스트 봉에 서기 위해 한 달여 전부터 캠프를 차리고 준비 중이다. 모두 수백 명이 이번 시즌 에베레스트 혹은 로체봉 등정을 준비 중인 것이다.

로체 등정 이후 베이스캠프에서 만나는 이들은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한국도로공사 원정대의 축하의 악수를 해온다. 우리 원정대가 과감하게 치고 나가서 시즌 첫 등정의 상쾌한 출발 신호를 울린 것이다.

강연룡과 김미곤은 36세 동갑나기. 윤중현은 2살 위다. 이들 3명은 '힘·기량·겁 없음'의 '고산등반 3박자'를 두루 갖추었다. 대학에서부터 산악부 활동을 시작한 이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산악계의 차세대 기대주들이다.

이들이 이번 봄 시즌에 에베레스트 산다람쥐인 세르파를 긴장시켰다.

로체봉 여신을 감동시킨 한국 산사나이들

이번 로체등반에는 4명의 세르파가 돕기로 했다. 그러나 한 명의 세르파 왕추는 고소증세로 도중에 하산했다. 나머지 3명의 세르파들도 등반을 앞장서서 돕기는커녕 우리 원정대원들 을 뒤따라오기 바빴다. 하산 때는 도르지라는 세르파가 정상 바로 아래에서 미끄러졌다.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추락사 일보 직전까지 가는 상황을 연출했다.

세르파의 역할이 무엇인가. 고산과 추위에 강한 천부적인 체질을 갖춘 전문가로 대원들의 등반을 돕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히려 이들이 우리 대원들 덕분에 목숨을 건지고 로체 정상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르파가 놀란 이유는? 로체등정에서 우리 대원들이 '세미 알파인 스타일'의 등반 방식으로 올랐기 때문. 세르파들이 기겁을 한 대목이 이것이다.

대개 히말라야 원정은 '극지법'을 사용한다. 즉 베이스캠프에서부터 C1·C2·C3·C4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고소적응과 체력관리를 한 연후에 정상에 오르는 등산을 말한다. 이 경우 원주민인 세르파가 '홈 어드밴티지'를 누리는 것은 당연.

그러나 이번 로체등정에서 우리 대원들은 C2를 출발하고 C3·C4에서 잠깐 눈만 붙이고 그날로 정상으로 치고 올라갔다. 이 알파인스타일은 고소적응을 한 뒤에 국내 산행처럼 당일치기로 정상으로 치고 올라가는 것이다.

이 스타일은 초단기 공격용이라 개인별 짐이 많고 체력소모가 많아 무리가 따르는 등반법이다. 그러나 세 명의 우리 대원들은 고소적응이 끝났고 체력적으로 자신이 있는 데다 서너 번의 8000m 등정경력 등 고산등반 노하우를 완비해서 8시간만에 정상등정을 해치운 것이다.

이 속도전과 체력전에 천하의 에베레스트 세르파들도 혀를 내두르고 뒤집어진 것이다. 오죽했으면 에베레스트를 두 번이나 올랐던 세르파 사다인 도루지(35)는 "원정대원이 우리가 보아왔던 대원들이 아니다, 너무 강해서 세르파가 필요 없는 원정대들이다"라고 혀를 내둘렀을까.

[윤중현] 죽음과 싸우면서 새까많게 탄 얼굴

윤중현은 대학 산악부에서 기초를 다지고 97년 낭가파르밧 등반을 시작으로 98년 중국 본토의 최고봉인 공가산(7556m) 북동릉을 세계 초등정했다. 2000년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K2(8611m)를 등정했다. 에베레스트를 오르면 3좌 등정이 된다. 여건이 된다면 산을 오르겠다. 딱히 큰 욕심은 없다. 기회가 있으면 오르겠다는 조금은 달관한 자세다.

윤중현은 180㎝ 키에 70㎏. 단단한 몸이다. 그의 K2 정상 등정 사진은 모교인 조선이공대 학장실에 대형사진으로 걸려 있다. 이번 등정은 지난 7년간 산을 떠나 있어서 다른 의미가 있다. 그간 한 순간도 설산의 매력을 잊은 적은 없었다. 그래서 박상수 대장의 원정제안을 받고 그날로 원정대에 합류했다.

이번 등정에서 공백 기간 때문에 늘 체력이 염려됐다. 이번 로체 등반에서 애로는 히말라야의 추위와 허기,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찾아오는 '죽음의 전령사' 졸음과의 싸움이었다. 이 상황에서 촬영 담당까지 수행했다. 정상에 선 것은 무념무상의 한걸음 한걸음의 종합판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로체 정상을 밟고 베이스캠프로 돌아온 윤중현은 며칠 사이 새까맣게 그을어 손을 댈 수 없을 정도가 된 얼굴을 만지며 "하산이 정말 어려웠다"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시즌 초등이라 눈이 남아 로프 없이 올랐으나 하산길은 한순간 헛발질이 수천미터 추락사로 이어질 만큼 위험했다.

"강 대장과 김미곤 후배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고 윤중현은 거친 숨을 몰아쉰다. 그는 안전벨트를 풀기도 전에 인공위성 전화로 10여년째 사귀어 온 삼성SDI 종합기술원 오 박사에게 무사귀환을 전한다. 에베레스트 등정도 앞둔 윤중현은 "원정의 최종목표도 꼭 이루고 싶다, 에베레스트 여신이 허락한다면"이라고 한다.

▲ 등반 준비중인 윤중현(좌),강연룡(우))
ⓒ 김창호
[강연룡]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 초인

이번 등정에는 지난해 가을 티벳 쪽으로 에베레스트를 이미 밟았던 강연룡이 로체등반대장을 맡았고, 김미곤이 에베레스트와 로체 동시등정 허가를 받아 원정팀의 살림살이 격인 행정을 맡았다.

강연룡과 김미곤은 산꾼으로서 기본자격인 천우신조는 타고난 것 같다. 김미곤은 2005년 루팔 벽 등반에 나서서 간신히 정상까지 루프를 다 깔아놓고도 해발 7550m쯤에서 집채만한 바위가 떨어지면서 쏟아지는 돌에 맞았다. 불운이었다. 하지만 당시 어깨근육 파열과 오른쪽다리 깁스 정도로 목숨은 건졌다.

강연룡은 2000년 초오유봉(8201m) 등반 때 C3(7300m)를 구축한 직후 눈사태를 맞았다. 지척에 있던 3명의 고소 세르파와 텐트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그는 비운 속에서도 생환하는 행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지금도 히말라야 원정 때마다 세르파 유가족을 만나며 돌본다.

강연룡은 이번 로체등정으로 에베레스트, K2, 시샤팡마에 이어 8000m 고봉을 4좌 째 올랐고 김미곤도 초오유·마칼루·가셔브룸에 이어 4좌 째다. 둘 다 한국도로공사 산악팀 소속이다.

강연룡은 고산거벽등반 기술이 탁월하다. 바위타기의 명수이다. 어떤 루트든 앞장서 길 찾는 능력이 빼어나다. 경남 진주 출신인 그가 진주 클라이머들이 즐겨 찾는 삼천포 와룡산 상사바위에 12개의 새 길을 낸 것은 지금도 전설이다.

그의 얼굴선은 투박한 산사람의 이미지와는 달리 여리디 여리다. 키는 172㎝에 몸무게는 60㎏. 호리호리해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한 체격이다. 그러나 산악구보로 다져진 체력은 초인적이다. 마치 산에 달라붙으면 영원히 안 떨어질 것 같다.

대학 산악부에서부터 산을 익힌 그는 입학 9년만에 졸업할 만큼 산에 빠졌다. 산에 오르는 이유는 즐거움이란다. 하얀 산에서 힘든 과정을 겪으며 정상을 향하다 보면 살아 있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고 한다. 그의 취미는 술 마시기다. 그는 얼굴색 하나 안 바뀌면서 네팔 양주에 맥주를 섞어서 쉼 없이 넘기는 주량을 가졌다.

강 대장은 하산 후 "로체봉을 오르고 나니 너무 개운하다. 바로 이 맛이다"며 "예전에 비해 장비나 기상정보가 좋아 무리 않으면 큰 사고는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살살 다니다 보면 8000m 14좌 봉은 한 번씩 오르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런 목표를 밝힌다.

[김미곤] 지리산이 낳고 기른 '인간탱크'

지리산이 낳고 기른 김미곤. 전북 남원군 인월면이 고향. 5형제의 막내인 그는 중학교 때부터 이미 배낭에 감자·김치·쌀 등 무게 30㎏쯤 되는 배낭을 지고 3박4일씩 지리산 종주를 하면서 일찌감치 산사나이 생활을 시작했다. 대학시절에도 산에 미쳐 취직할 생각도 없었다.

김미곤은 165cm 단신에 65㎏. 상체와 하체가 정확히 반반씩 상하대칭형이다. 그만큼 하체가 강하다. 김미곤 하면 루트메이킹 전문으로 알려질 정도.

암벽등반, 신루트개척 등반에 감초 격으로 참여해 왔다. 지구력으로 밀어붙이는 힘은 압권이다. 별명이 '탱크'다. 암벽을 기어오르는 '인간탱크'. 그의 기초체력은 태권도 5단, 합기도 3단이 설명한다.

김미곤은 암벽등반 때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는 것이 마치 무술 대련 때의 긴장감이 느껴져서 즐겁다고 한다. 그에게 산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즐거움일 뿐이다.

에베레스트 등정을 앞두고 있는 김미곤에게 심정을 묻자 "94년 중반 대학산악부 초년시절 하얀 산의 꿈을 꾸자 한 선배가 지속적인 운동과 금주금연을 명해서 지금도 담배를 안 피운다"며 "13년 그 오랜 준비를 마무리할 기회에 가슴 설렌다"고 한다.

김미곤은 로체와 에베레스트 동시등정으로 그의 무산소 등정 계획이 변해서 아쉽다고 한다. 김미곤은 그러나 로체를 오르면서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 '에베레스트와 로체봉의 동시 릿지등반'이 그것이다. 오르면 새 세상이 보인다던가.

태그:#로체, #에베레스트, #히말라야, #한국도로공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뉴스 아이디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