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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청계산

▲ 봄냄새가 물씬 풍기는 청계산의 초입
ⓒ 이희동
청계산이 최근 언론에 연이어 오르내리고 있다. 몇 달 전 가수 이효리가 다이어트 목적으로 청계산을 오른다고 보도되더니, 이번에는 국내 굴지의 그룹 총수가 술집 종업원들을 끌고 가서 폭행한 것으로 짐작되는 곳으로 청계산이 등장했다. 산이 산 자체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위의 장소로서 기록되는 꼴이다.

그러고 보니 개인적으로도 청계산은 항상 어떤 목적이 있어야 향하는 공간이었다. 대학원 연구소 동료는 매해 이맘때쯤 과 사람들과 청계산을 오르곤 했는데 그것은 산이 좋다기보다는 단체행동을 중시하던 교수님의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였다. 같이 청계산 정상에 올라 플래카드를 붙잡고 사진을 찍느냐 마느냐가, 그리고 하산 뒤 막걸리 한 잔 같이 하느냐 마느냐가 그 해 대학원 생활을 좌우한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었다.

몇 해 전 연구소를 다니면서 가끔씩 보았던 토요일 오전 청계산의 인산인해. 아마도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은 앞선 나의 설명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산이 좋아 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어서 산을 올라야만 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나지막한 청계산은 고역의 현장이요, 업무의 연장인지도 모른다.

과연 무엇이 청계산을 이와 같은 생활전선의 현장으로 만들었을까? 이 시대 청계산이 갖는 얄궂은 운명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어중간한 높이와 지세... 청계산의 수난의 이유

그것은 아마도 청계산이 가지고 있는 어중간한 높이와 지세 때문일 것이다. 비교적 험하지 않은 500m대의 청계산은 평소 산을 타던 이들에게는 동산 수준이지만 산을 타지 않던 이들에게는 그런 대로 한번쯤 도전할 만한 곳이다. 따라서 전자가 후자에게 시답잖은 도전 운운하며 생색내기 참으로 안성맞춤인 공간인 것이다.

나들이도 나들이지만 회사 야유회 장소로서 청계산이 각광받는 이유는 바로 이에 연유한다. 아직까지 집단의례를 중요시하는 우리 회사들은 단체행동 등을 통해 구성원들에게 소속감을 심어주려 하고, 그 과정 속에서 선후배 간의 서열을 확고히 하려고 하는데 여기에 등산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청계산의 위치는 대부분의 회사가 밀집되어 있는, 또한 많은 회사 간부들이 기거하는 강남에서 제일 가까운 측에 드니 금상첨화일 수밖에.

어쨌든 4월의 어느 주말. 난 이와 같은 청계산을 처음으로 향했다. 예전 우면산에 관한 기사에서 잠깐 밝힌 바 있듯이 내게는 청계산 자체가 곧 부담이었지만 이번 산행은 그 동행과 처음이었기에 비교적 걷기에 부담 없는 청계산을 골라야만 했었다.

청계산의 천 개의 계단

▲ 4월의 청계산.
ⓒ 이희동
친구와 사당에서 만나 양재역에서 내리니 벌써 그곳 거리는 울긋불긋 등산복으로 물들어 있었다. 처음 가는 산행이었지만 당황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청계산이 거론되고 있는 바, 우리는 무작정 그들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미어터질 듯한 마을버스를 타고 도착한 청계산. 이미 벚꽃이 지고 있는 서울 시내와 달리 그곳은 이제야 노오란 개나리가 활짝 얼굴을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 산행 역시 이른 발걸음이었던가.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것이 자연의 모습일 터. 다 그 나름대로의 멋이 있으렷다. 자, 오늘은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길목의 청계산 풍경을 감상해 볼까나. 등산로 초입에 개나리가 피어 있었으니 산 중턱에 봄꽃이 폈을 리는 만무했고,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오히려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스산함을 더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을 정작 심란하게 만드는 건 곧이어 등장한 까마득한 계단이었다. 산중턱에서부터 시작해서 끝 간 데 없이 뻗어 있던 나무계단. 그나마 철이 아닌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는 게 위안이면 위안일까, 계단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산을 오르는 이들에게 위압감을 주고 있었다. 계단이 정 필요한 구간에만 설치하면 될 것을 왜 산의 처음부터 끝까지 저렇게 늘어놓아야 했을까?

▲ 끝없이 펼쳐진 계단들과 그곳에 새겨진 욕망.
ⓒ 이희동
이런 나의 궁금증을 풀어줄 단서는 청계산 계단의 남다른 모습이었다. 청계산 계단은 여느 산들의 계단과는 달리 모두 하나씩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계단마다 "선영아 사랑해", "서초 구민의 행복을 위하여" 등 그 순번을 뜻하는 숫자와 짧은 문장이 들어가 있는 푯말을 달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서초구청이 이 계단을 만들며 그 후원금 명목으로 걷어들인 금액의 표현일 테다.

돈이 필요했던 구청과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든 증명하고 싶어 하는 욕구의 만남. 그것은 그 효용성이 의심스러운 계단이란 공공재를 핑계로 공적기관이 사적자본을 끌어 쓰는 현장이었으며, 남이야 어찌 되었든 자신들의 욕망에만 충실한 각 개인들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공간이었다. 존재의 증명마저도 자본을 통해 소비하면서 할 수밖에 없는 이 시대의 가벼움. 아마도 구청은 끊임없이 밀려드는 존재에 대한 욕구의 표현을 쉽게 거부하지 못했을 것이며, 덕분에 계단은 쓸데없이 길어졌을 것이다. 결국 애꿎은 청계산만 그 허망된 욕구의 상처를 묵묵히 짊어지게 된 것이다.

계단은 계속 이어졌다. 골짜기에만 있을 줄 알았던 계단이 능선을 타고 결국 1000번이라는 숫자를 넘기고 있었다. 맙소사. 그 나지막한 산등성이에 천 개나 되는 계단이라니.

돌이끼를 몰아낸 자리에 들어선 하얀 대리석

▲ 설마설마 했건만 기어이 천 개를 넘긴 계단.
ⓒ 이희동
문득 대학시절 어처구니없이 바라봐야 했던 노천극장이 떠올랐다. 10년 전 오늘 같이 화창한 날이면 할 일 없이 가서 사색에 잠기곤 했던 노천극장. 비록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곳에서 느낄 수 있었던 지나간 세월의 흔적은 내가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선배들에 대한 빚이자, 대학생활의 위안이었다.

그러나 제대 이후 찾은 노천극장은 전혀 딴 판이 되어 있었다. 고색창연했던 돌이끼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하얀 대리석이 악귀처럼 번쩍이며 들어 앉아 있었던 것이었다. 무조건 화려하고 새것이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그 천박함이 나를 뜨악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천박함의 화룡정점, 그것은 바로 돌계단에 새겨진 수많은 이름들이었다.

노천극장 신축을 명분으로 돈을 얻고자 하는 학교와 소위 명문대의 공간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의 타협. 학교는 모교 사랑의 징표니 하며 돌계단에 온갖 미사여구를 가져다 붙이지만, 결국 그것은 간판이 모든 걸 좌우하는 한국사회의 웃지 못할 희극일 뿐이다. 또한 그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오히려 캠퍼스 출신이라는 사실은 학교가 간판을 볼모삼아 어떻게 돈을 벌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혹자들은 최근 대학 캠퍼스 내에 지어지는 '이명박 관', '이학수 관' 등을 보면서 지성의 전당이 자본에 종속된다고 비판하지만, 한낱 계단에다가도 자신의 존재를 증명코자 하는 이들이 많은 우리 사회이고 보면 적지 않은 이들은 이를 오히려 부러움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청계산의 천 개의 계단. 그것은 단순히 산행을 돕는 구조물이 아니라 청계산에 각인된 이 시대의 욕망이다.

청계산 종주를 끝내고 청계사로

▲ 정상에 자리한 비극의 구조물.
ⓒ 이희동

▲ 뿌연 서울의 하늘.
ⓒ 이희동
계단이 끝나자 곧이어 정상,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청계사의 봉우리 중 민간인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가 나타났다. 그러나 우면산도 그랬듯이 청계산 역시 그 정상은 군의 몫이었다. 거대한 구조물들이 산꼭대기에 자리하여 이 시대가 아직 정상이 아님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도대체 산에 올라 언제까지 저런 무식한 구조물들을 봐야 하는 것인지.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 비록 날씨는 화창했지만 뿌연 날씨 덕에 시계가 좋지 않아 저 멀리 양재동 너머 서울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 과천 방향으로는 서울대공원에 한창인 벚꽃과 과천 경마장 옆 연푸른 신록이 가까스로 보였다. 친구는 아쉬워했지만 서울의 답답한 아파트 숲을 보지 않아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또한 정상에는 청계산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곳에는 청계산 이름의 유래가 적혀 있었다. 설명인 즉, 많은 이들이 착각하듯이 청계산의 이름은 '맑은 계곡'이 아니라 '푸른 닭'이라는 의미다. 산의 이름이 푸른 닭? 안내판은 이어서 청계산의 원래의 이름이 풍수 상 관악산과 짝지어져 좌청룡으로서 청룡산이라는 것도 덧붙이고 있었다.

청룡산과 청계산이라. 비록 안내판은 그 개명의 이유까지 밝히고 있지 않았지만 짐작컨대 그것은 일제의 짓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이름에서부터 반항의 싹을 자르려는 일본이었기에 용을 닭으로 바꾸지 않았을까? 아니면 17세기 중반부터 자신들을 소중화라고 칭하며 그 사대주의적 사관을 공고히 했던 조선 지배층들이, 청룡산에 감히 쓰이던 '龍'자를 지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청룡산은 청계산으로 바뀌었고, 그 바뀐 이름이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내려 온 것은 많은 이들이 나처럼 '청계'를 푸른 닭이 아니라 맑은 계곡으로 착각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싸 갔던 김밥에 맥주, 오이까지 먹었음에도 하산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나지막한 산을 계단 따라 왔으니 시간이 걸릴 리가 있겠는가. 우리는 하산 방향을 청계사로 잡은 뒤 청계산을 종주하기 시작했고 이제야 제대로 산을 타는 듯했다. 그래, 그래도 명색이 산인데 이렇게 바위도 타고 줄도 잡고 호젓한 오솔길도 걷고 해야지. 물론 종주라는 단어가 부끄러울 정도로 완만한 길이었지만 어쨌든 산행의 즐거움은 만끽할 수 있을 만큼의 발걸음이었다.

대체로 청계산은 그 느낌이 우면산과 비슷했다. 나지막한 산등성이들이 고르게 펼쳐져 있는 모습과 땀도 흘리지 않을 만큼 평탄한 종주길, 특히 정상에 위치한 군부대와 그 뒤로 자리한 정상까지 이어진 잘 닦인 도로, 큼지막한 헬기장은 이곳이 우면산인 양 착각하게 만들 정도였다. 다만 도심의 경계를 따라 위치한 우면산과 달리 양 옆으로 숨 막히는 도심 대신 산들이 펼쳐져 있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점점 사찰 트렌드로 굳어지는 동자승 인형들

종주의 끝, 청계사로 들어섰다. 개인적으로는 청계산의 유명세만큼이나 고색창연한 사찰을 기대했건만 청계사의 거의 모든 전각들은 최근 것들로 보였고 대신 그 유명한 청계사 우담바라 이야기만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사찰은 나같이 뜨내기손님보다는 기적을 찾아 한달음에 찾아오는 신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 청계사의 와불.
ⓒ 이희동

▲ 청계사 극락보전 뒤에 자리한 수많은 동자상들.
ⓒ 이희동
대부분의 전각들이 1955년 이후 중수되었다는 안내판을 보고 실망하고 있던 나의 발걸음을 붙잡은 건 극락보전 뒤에 대규모로 자리하고 있던 동자승 인형들이었다. 최근 사찰에 가면 사찰 곳곳에 드문드문 몇 개씩 사람들의 눈길을 끌던 그 인형들이 청계산 극락전 뒤에 수천 개 정도 모여 있었다. 갖가지 표정에 다양한 포즈를 잡고 있는 그 동자상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오마이뉴스>에서도 이 동자승들에 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계속 그 수많은 동자승들을 보고 있자니 조금씩 불편해졌다. 아까 사찰에 들어서면서 마주쳤던 큼직한 와불을 보면서도 느꼈던 바로 그 불편함이었다. 청계사만의 무언가를 만들려고 하는 인위적 행위에 대한 거부감. 어쩌면 몇 시간 전 봤던 계단의 잔영이 투영된 것이겠지만 점점 사찰의 트렌드로 굳어지는 그 동자승들이 영 꺼림칙했다. 동심의 순수함이 곧 종교적 이상향이라는 의미로서 열정을 기울여 만들어지던 그 동자승이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대량생산되고 그걸 마냥 귀엽다고 바라보는 이 시대의 천박함.

청계사를 뒤로 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 그곳은 벚꽃과 목련이 아직 둘 다 시들지 않고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봄 길이었다.

▲ 사찰의 봄.
ⓒ 이희동

▲ 벚꽃과 목련의 앙상블.
ⓒ 이희동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청계산#김승연#청계사#동자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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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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