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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여수 화정면 개도 보리밭과 기와집
ⓒ 임현철
막걸리에는 아련한 어릴 적 추억이 스며있다. 지금은 법으로 아이들에게 술, 담배를 팔지 못하도록 하였지만 우리가 자랄 때에는 막걸리 심부름은 응당 우리네 몫이었다.

양은 주전자를 들고 술도가에서 술을 받아 들고 오는 길에 한 모금씩 야금야금 마시던 아이. 마신 술로 인해 어린 심부름꾼들의 발그레한 볼, 빠알간 코끝, 꼬부라진 말을 하는 아이를 보며 어른들은 "허허, 이놈…"하고 웃고 말았었다.

어린 심부름꾼들이 홀짝홀짝 마신 막걸리가 어느새 줄어 어른들이 '이 노~옴' 호통할까 지레 겁먹고 물을 채워 '물 반 막걸리 반'이 된 주전자를 건네면, 한 사발 거나하게 드시면서 모르는 척 "막걸리 맛이 왜 이런다냐?"라고 하셨다.

그리고 양은 주전자들은 죄다 왜 그리 찌그러졌는지. 한쪽 귀퉁이나 뚜껑, 손잡이 등이 찌그러져 있는 손때 묻은 주전자들. 이런 주전자를 들고 다니면서도 우리는 낡고 찌그러진 주전자보다 정겨움의 표식으로 여겼었다.

혹여 심부름 길에 과자값을 얹어주시면 횡재한 기분으로 한걸음에 술도가로 달려가 찰랑이는 주전자를 총총걸음으로 들고 오다 넘쳐흐른 막걸리로 인해 양이 줄어 머쓱해 했었다.

섬, 개도(蓋島)보다 더 유명한 '개도 막걸리'

▲ 술독에서 익어가는 누룩
ⓒ 임현철
각설하고, 천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전남 여수시 화정면 개도(蓋島)는 아름다운 해안, 천제산과 봉화산 등산, 그리고 천혜의 낚시터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유명한 게 '개도 막걸리'다.

개도 막걸리를 만드는 김상만(63)씨의 주조장으로 들어가 주인장을 불러도 인기척이 없다. 한참 만에 방에서 슬그머니 '뉘시오?'하며 고개를 내민다. 영락없이 수더분한 술도가 주인 행색에 반가움이 인다.

"이 술도가 몇 년이나 되셨어요?"
"나가(내가) 전에 허던(하던) 사람한테 인수받아 한 지가 올해로 벌써 23년이나 되얏구만(되었다). 그간 고생 징허게 했지. 요놈의 손 좀 봐. 이리 험허니, 얼매나 고생 했것써? 이 손이 증거여, 증거. 이 손에 나 인생이 다 녹아 이써(있어)."

"고생 끝에 낙(樂)을 찾은 거죠. 어떻게 하게 되셨어요?"
"그러기야 허지. 암것또(아무것도) 모르는 나가 덜렁 술도가를 인수받고 보니 막막허대. 기술 배와야지, 배달해야지, 팔 곳 만들어야지, 사람들 입맛에 맞게 개발해야지, 여기저기 쫓아다니고 하믄서(하면서) 밤낮으로 일에 매달리야지 벨(별) 수 있나? 업는(없는) 놈은 뾰쪽한 수 업써. (돈) 벌라믄 몸땡이를 놀리야지."

"외지에서도 개도 막걸리 찾나요?"
"서울, 부산에서도 보내라고 주문이 와. 그람(그럼) 택배로 보내줘."
"고생했던 거 이야기 좀 더 해보시죠?"
"그때 생각허믄 말로 다 못해 아니여. 고만해…."


맛을 아는 사람만 찾는 '개도 막걸리'

▲ 김상만씨
ⓒ 임현철
말문을 여시려다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며 입을 닫아 버린다. 어찌 회한이 없을쏜가? 새벽같이 일어나 발효시킨 원료를 배합하는 과정. 섬에서 만들어 배에 싣고 육지로 내가야 하는 번거로움. 이 때 행여 태풍이라도 불면 어쩌나 가슴 조렸을 일들….

혹시 있을 수도 있는 반품 요청과 항의들. 현대인의 입맛에 맞추기까지의 노력. 외상 거래로 인한 가슴앓이와 말 못할 사정들. 어려웠을 적 자금조달 문제. 아이들 공부시키는 애로사항 등 많은 애환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맛을 안볼 수야 없지.

"막걸리 맛 좀 볼 수 있나요?"
"맛 못 봐. 여기도 막걸리가 업써. 허허."
"에이~. 개도에 개도 막걸리가 없다? 그것도 술도가에?"
"아이~. 증말(정말) 업당께."

"왜요?"
"막걸리를 그날그날 새빅에(새벽에) 맹그러(만들어) 육지로 보내는디, 오전에 다 보내불고(보내고) 업지. 주문 마칠라믄(맞추려면) 헐쑤 업써. 그래서 술도가가 있는 개도에도 막걸리가 업는 거여. 아, 한 군데 저 우게(위에) 동네 가게에 있다, 참."

"막걸리 판매는 어떻게 하나요?"
"아비는 막걸리 만들고, 아들은 팔고 그래. 아들이 여수서 대리점을 허는디, 거그서 다 공급해. 돌산 향일암이 있는 임포에서 젤(제일) 마니(많이) 나가고, 선소 옆 막걸리 집에서도 좀 나가고. 우리 개도 막걸리는 맛을 아는 사람만 찾으니께…."


각 섬에서 명품이 나왔으면...

개도 막걸리 주조장
ⓒ 임현철
조선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개도 막걸리는 수백 년 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주조장을 둘러보니 막걸리 발효 독, 정제하는 기계 밖에 없다. 맛의 비결을 찾을 수가 없다. 김상만씨는 맛의 비결에 대해 "개도 천제산 밑의 물이 특히 좋아서지"라고 말하신다. 막걸리가 물이 좋아야 제 맛이지, 물이 좋지 않으면 그 맛이 나겠는가.

개도 막걸리 주조장에서 막걸리 맛도 못보고 터덜터덜 여객선 터미널로 향한다. 사람들이 터미널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딱 한사발만 해" 권하는 소리에 못 이긴 척 받아 마신다. 입맛 땡긴다. "어, 없다던데 어디서 났어요?" 하니 "동네 가게에서 싹쓸이 해왔지" 한다. 염치 불구하고 "한 사발만 더 주세요?"란 말이 절로 나온다.

여수행 배에서 만난 인근 섬에 사시는 정정옥(67)씨는 개도 막걸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다.

"옌날(옛날)에는 찌꺼기가 마난는디(많았는데) 지금은 찌꺼기가 읎써. 지금은 또 웃국물만 무근께로 그러기도 하겄제. 은제(언제)냐 와, 나라에서 금주령 내리고 부텀 막걸리는 무그믄(먹으면) 배만 불러 섬에서도 막걸리에서 쐬주로 마니 바꿨지.

개도 막걸리는 맛도 마시(맛이)지만 묵고 나도 다음 날 아침에 골치(머리)가 안 아파. 글고, 트름도 안 나오고. 거 막걸리 묵고 트름 나오믄 그 냄새 보통 징(지독)해야지. 근디 개도 막걸리는 그거시 읎써, 조아."


요즘은 맛에 대한 자부심과 상표에 대한 보증이 없으면 브랜드로 각광받지 못한다. 오랜 세월동안의 노력만큼 자신만의 특성을 살린 '개도 막걸리'. 섬에서 종사하는 일은 대개 고기잡이 아니면 양식이다. 개도 막걸리를 보며, 일상적인 일에서 벗어나 새로운 브랜드의 많은 명품(?)들이 각 섬에도 쏟아져 나와 잘 사는 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 여수행 배를 기다리며 싹쓸이한 '개도 막걸리'를 마시는 등산객.
ⓒ 임현철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U포터에도 송고합니다.


태그:#개도 막걸리, #주전자, #어린 시절,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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