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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학작가회의의 깃발은 어디에서 썩어가고 있을까.
ⓒ 민작
한국문인단체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민족문학작가회의(줄임말 민작)가 이름에서 '민족'이라는 말을 떼는 것을 놓고 논쟁에 휩싸였다.

지난 27일 오후 3시 민족문학작가회의(이사장 정희성)는 광화문에 있는 대한출판문화회관에서 제20차 정기총회를 개최했다.

이날 총회의 가장 큰 논점은 단체의 명칭 변경이었다. 정희성 시인은 총회를 열면서 "국제화 시대에 걸맞은 명칭 변경이 필요함을 느낀다"고 서두를 떼었고, 상임고문인 백낙청 문학평론가는 "'민족'이란 말에 거부감을 갖는 젊은 문인들에게 문을 활짝 여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민주화 투쟁의 역사와 함께 한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학작가회의 탄생은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로부터 출발한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유신반대운동이 거세지자 1974년 1월 긴급조치를 발표했다. 그럴 듯한 족쇄를 마련한 박정희 정권은 그때부터 민중에 대한 탄압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같은 해 울분을 참지 못한 문인들은 집필실을 박차고 차가운 거리로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온갖 폭력과 고문이 난무하는 감옥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
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
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
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
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던 그 시간
다시 쳐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

- 김지하 시 '1974년 1월' 중에서


서슬 퍼렇던 박정희 정권 하에서 구속된 문인들의 석방을 촉구하기 위해 모인 문인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당시 대다수의 문인들은 온실인 한국문인협회에 그대로 남았고 고은 신경림 염무웅 박태순 황석영 조해일 양성우 이시영 이문구 송기원 백낙청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문학운동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이하 자실)를 창립하고 '문학인 101인 선언'을 발표했다.

선언문에는 시인 김지하를 비롯한 긴급조치로 구속된 지식인, 종교인, 학생들의 즉각 석방과 언론·출판·집회·신앙·사상의 자유를 보장할 것과 자유민주주의 정신과 절차에 따른 새로운 헌법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어느 때나 빼놓지 않고 골목 어귀마다 배치돼 있는 무장 경찰병력과 장갑차, 닭장차, 인도와 지하도에 깔려 있는 사복 형사, 정보원, 민간인 복장의 보안사 군인들과 그들이 벌이는 시도 때도 없는 불심검문과 신분증 제시 요구 등 시민들은 잔뜩 긴장한 채 겁을 먹지 않고서는 이 네거리를 지나다닐 수 없을 지경이었다. 더구나 세상 냄새에 예민한 문인들은 이같은 광화문 네거리를 돌아들 적마다 자신의 시대에 대한 슬픔과 억울함과 분노를 함께 일깨우지 않을 수 없었다"

- 박태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문예운동사' 제14회 중에서


당시 선언문을 낭독한 고은 시인과 선언을 주도한 7명의 문인은 경찰서로 연행됐으며 그 시기 이후부터 구속문인의 숫자가 크게 늘어났다.

자실의 역할은 실질적으로 이때부터 커지게 된다. 구속 문인들에 대한 석방운동과 함께 민주화 운동의 불을 지핀 문인들의 당시 투쟁은 고통과 피로 얼룩진 암흑의 시대이기도 했다.

'민족' 고집할 필요 있나 vs '민족'은 작가의 '운명'

▲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던 이들은 다 어디로...
ⓒ 민작
문인들의 투쟁은 민주화 운동을 비롯해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1987년 6월 항쟁의 중심에서도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 역할을 톡톡히 했다. 6월 항쟁 이후 자실은 조직의 확대를 위해 그해 9월 단체의 명칭을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서 '민족문학작가회의'로 개명한다.

실천적 문학인의 삶에서 이 땅의 민족을 아우르는 단체로 거듭난 민족문학작가회의는 민중의 아픔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갔으며 바람을 받아 펄럭이는 깃발은 살아있는 양심으로 대변됐다.

민족문학작가회의는 탄생 직후 통일 문제를 전면에 들고 나오며 1989년에는 남북작가회담을 추진했다. 고은 시인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버스를 타고 판문점으로 향했으나 정권의 탄압으로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이번 명칭을 개명하는 데 찬성하는 측에서는 지난해 10월 금강산에서 남북 문인들이 모여 '6·15민족문학인협회'를 만든 마당에 굳이 '민족'이라는 말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단체의 살림을 맡고 있는 김형수 사무총장도 "작가회의 내에 자유실천위원회와 민족문학연구소가 있으니 민족문학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라고 개명의 필요성에 동참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한 위원회로 흡수되듯 민족문학도 변화하는 세상에 맞춰 '작가회의' 안의 조직으로 흡수되는 게 바람직하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발도 크다. 고은 시인을 비롯한 많은 회원들은 "'민족'이란 것은 반드시 품고 가야할 작가들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명칭을 바꾼다고 해서 집안이 잘 되는 것 아니니 차라리 빛을 잃어가는 정체성을 되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의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찬성보다는 반대의 목소리가 훨씬 많다. 김준태 시인은 게시판과 총회장에서 "아직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깃발을 내릴 때가 아니다"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민족"을 버리겠나이까

버리시소서

푸르디푸른 피가 흐르는 "민족"
그 피를 내가 수혈 받겠나이다

너무 부끄러워 눈물이 납니다

- 박희호 글 '젊은 시인들이여'


박희호 시인은 위의 글을 게시판에 남겼으며 이적 시인과 김창규 시인도 반대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단체의 개명에 대한 논란에 대해 김창규 시인은 이렇게 참담한 심정을 피력했다.

"민주화와 독재시대 최루탄을 마시면서 감옥에 가는 것도 두려워 하지 않고 민족문학을 위해 싸웠습니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고 하지만 고문과 억압으로 살았던 저로서는 명칭 변경에 찬성 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을 수긍하고 따라야 할 일이 숙명처럼 놓여 있는 지금 이 순간 외롭습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앞날은 어디로

▲ 김남주 시인이 사용하던 방에 놓여있는 사진. 그는 요즘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어찌 생각할까.
ⓒ 강기희
1990년대 이후 민족문학작가회의 내부에서 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심심찮게 거론되었다. 작고한 이문구(민족문학작가회의 전 이사장) 선생이 이사장을 맡았을 때 한국문인협회 소속 회원들이 다수 가입하면서부터다.

이문구 선생은 "굳이 문단이 두 갈래로 나뉘어질 필요가 있냐"며 이들의 가입을 받아들이거나 권유했지만 기실 문단의 외양만 커졌지 민족문학작가회의만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은 모호해진 측면이 크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날 민족문학작가회의 총회는 유례없이 4시간이 넘게 진행됐고 중간중간 자리를 뜨는 회원들도 보이기도 했다. 결국 이날 단체의 명칭 변경 안건은 그 처리가 연기돼 논쟁의 불씨를 남겼다.

명칭 변경 문제가 마무리 될 때까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앞날은 안개속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듯싶다. 명칭 변경 문제로 내홍을 겪어야 할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세계속의 작가회의가 될지 민족을 품고 가는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될지 눈 크게 뜨고 지켜 볼 일이다.

이번 명칭 변경을 둘러 싸고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인물이 있다면 고은 시인과 백낙청 문학평론가다. 두 사람은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함께 시작한 동지였지만 이번 문제에서는 정반대의 의견을 냈다. 두 사람의 입장 차이가 새삼 관심스러운 것은 암울한 시대는 함께 살아왔지만 살아온 생각이 다른 궤적의 흐름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일로 인해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을 구성하고 있는 단체들의 고민도 깊어졌다.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민족'이란 명칭을 털어버리게 되면 민족사진작가회의, 한국민족서예인협회, 민족음악인협회, 한국민족극운동협회, 민족미술인협회 등의 단체가 어떤 대응을 할지 관심을 끈다.

태그:#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 #작가회의, #문학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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