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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엔 뭣도 모르고 이 일을 시작했죠. 교무실 사무보조로 1년 있었는데, 초등학교다 보니까 아이들이 너무 예쁘더라고요. 아이들과 직접 마주한다는 것만으로 큰 보람이었는데 제게 과학실 보조교사의 길이 열렸어요. 정식 교사 훈련을 받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더 공부하면서 매 시간 실험 실습을 통해 아이들을 만날 수 있어서 너무 기뻤어요."

 

서울C초등학교 이춘자(47) 교사에게는 보통 선생님과는 달리 설명이 조금 필요하다. 이춘자씨는 바로 '비정규직 과학 보조교사'다.

 

과학 보조교사는 말 그대로 수업 중 과학 실험을 할 때 일반 교사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일반 교사들이 다 준비할 수 없기 때문에 보조교사가 실험을 할 수 있도록 실험기구 등 수업 준비를 해준다.

 

이씨는 C초등학교에서 3학년부터 6학년까지 고학년들의 실험 자료를 책임지고 있다. 총 1100여 명의 학생들이 이씨의 실험 준비를 통해 과학을 배우는 것. 가끔 만들기 실험이 있는 날이면 이씨는 실험실뿐만 아니라 집에서까지 날을 꼬박 새운다. 꼭 해야 할 일이라는 책임감보다는 신기해할 아이들의 그 눈빛을 떠올리면 절로 그렇게 된다는 것.

 

보조교사지만 13년 근무한 학교 터줏대감

 

서울특별시교육청 산하 과학교육활성화추진단 조사에 따르면 이춘자 교사처럼 현재 서울시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근무하는 보조교사는 총 899명에 이른다(2005년 현재). 보조교사제도는 과학에 한정되어 1992년부터 도입됐으며 학교당 1~2명이 근무 중이다.

 

보조교사 1~2명이 전교생의 과학실험을 준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무엇보다 일반 담임교사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다. 미국의 경우 한 반에 자료 보조교사와 담임교사, 이렇게 두 명이 맡아 수업하기 때문에 훨씬 수월하지만, 우리나라는 교육 예산 문제 때문에 과학 실험에 한해 보조교사를 두고 있다.

 

이씨가 보조교사로 서울C초등학교에 온 지도 13년째에 접어들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울고 웃으며 지내다 보니 10년이 넘는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는 것.가난했던 어린 시절 겪어보지 못했던 아름답고 즐거운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그는 말한다.

 

"벌써 13년이라니……. 처음엔 몰랐는데 지금은 아이들과 학교에 너무 정이 들어 떠날 수가 없어요. 급식실에 근무하는 아주머니를 제외하고는 제가 가장 오래 근무하고 있어요. 이젠 눈 감고도 학교 구석구석까지 다 꿸 수 있는 걸요."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대학을 마치지 못했던 이씨는 어릴 적 꿈인 교사 생활을 하면서 해맑은 아이들을 매일 만날 수 있어 너무 보람되다고.

 

출근 시간만 2시간, 그래도 아이들이 있기에...

 

과학보조 교사는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시간 수당으로 계산해 최저 임금을 받는다. 이씨는 한 달에 80만원을 조금 넘는 돈을 받고 있다. 보조교사 일을 시작하던 13년 전 초봉은 30만 원이었고 2년 전만 해도 방학에는 수업이 없어 아예 월급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일을 구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방학 때는 개학을 기다리며 새롭고 재미있는 실험방식을 찾기 위해 여러 책자를 들추며 고민한다.

 

"과학보조교사는 임금도 적어서 이 일을 오래하는 사람들이 드문 편이죠. 아마 이춘자 선생님이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과학보조교사일 것입니다(보조교사는 교육청이 아닌 개별 학교와 계약을 하기 때문에 정확한 실태를 파악하기 어렵다). 특히 보조교사는 일반 교사들처럼 집과 가까운 곳에 발령이 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출퇴근의 애로사항이 많아요. 대부분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임시방편으로 이 일을 하곤 하는데 이춘자 선생님은 사명감이 무척 강해요."

 

함께 일하는 C초등학교 김은자 교사의 설명이다.

 

이춘자 교사의 집은 경기도 고양시. 서울 용산구에 있는 학교까지 출근하려면 버스와 전철, 다시 버스를 갈아타야 하고 2시간이나 걸린다. 이런 불편한 출퇴근에도 불구하고 13년째 보조교사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아이들 때문이다.

 

"저는 담당하는 학급도 없어요. 그래서 제자라고 부를 수 있는 학생도 없어요. 하지만 잡다한 듯 널려 있는 실습실에 들어서면 아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이따금 '선생님!'하며 아이들이 찾아오기도 하고 수업 시간에 잘 따라주니 너무나 행복해요. 제가 이 학교를 떠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죠. 특히 졸업하고 찾아오는 아이들이 있어 행복해요. 제가 이곳을 떠나면 그렇게 찾아온 아이들이 안타깝게 돌아서야 하잖아요."

 

"어떻게 하면 선생님처럼 되요?" 질문이 가장 곤란

 

늘 웃는 모습의 이씨는 자신처럼 늘 웃는 아이들이 좋다고 한다. 천상 초등학교 선생님인 것. 그래서인지 따르는 아이들도 많다. 아이들이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선생님, 너무 좋아요. 선생님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요?"라고 물을 땐 제대로 대답할 수 없어 안타깝다고.

 

"아이들은 어려서 잘 모르니까 그렇게 묻고, 저를 따르고, 저처럼 되고 싶다고 하는 거죠.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아이들에게 저 같이 되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물론 돈을 보고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명예나 지위를 따져서 한 일도 아니에요.

 

그저 내가 할 일이 있어 행복하죠. 많은 아이들에게 과학의 꿈, 미래의 탐구정신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더없는 행복감을 느껴요. 무엇이 되느냐 보다 어떻게 타인에게 사랑과 행복을 주고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요?"

 

이춘자 교사는 깔끔한 자료실 정리와 철저한 실습 준비 등으로 C초등학교가 과학교육감상을 수상하는데 공헌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식 교사가 아니기 때문에 겪은 외로움과 어려움이 있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특별한 명칭도 없이 교사들 사이에서 아줌마로 불렸어요. 뭐 제가 선생님이 되는 교육과정을 받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속이 상했어요. 선생님들끼리 다니시는 회식에도 낄 수도 없었고요. 그때 결심했죠. 비록 '선생님'은 되지 못하지만 학생들에게 '엄마' 역할은 할 수 있겠구나. 보조교사라는 말보다는 엄마라는 생각이, 이 땅의 강한 엄마라는 사실이 아이들을 더 뜨겁게 보듬게 하고 세상을 더 큰 가슴으로 껴안게 만들었어요."

 

이춘자 교사에게 다시 태어난다면 뭘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이씨는 주저하지 않고 "과학 선생님"이라고 말했다.

 

"다음에 태어나면 어렵지만 제대로 공부해서 정식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그러면 제가 좋아하는 아이들과 좀 더 가까이 지낼 수 있으니까요. 물론 정식교사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제 삶의 터전이자 아이들이 언제 '똑똑' 노크하고 들어설 두 개의 과학실과 자료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요."


태그:#보조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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