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름조차 생소한 박재혁 지사. 그는 치밀했고 대범했다. 현존하는 유일한 사진이다.
 이름조차 생소한 박재혁 지사. 그는 치밀했고 대범했다. 현존하는 유일한 사진이다.
ⓒ 퍼블릭도메인

관련사진보기

 
의열단원 박재혁이라는 독립투사가 있습니다.

103년 전 오늘 대구 감옥에서 순국한 의열단원입니다. 사형이 확정된 상황에서 "왜놈들에게 내 목숨을 맡기는 것은 치욕"이라면서 단식을 선택, 1921년 5월 11일 만 스물여섯 나이에 순국합니다.

개인적으로 박재혁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1895년 생인 그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의열단의 이름으로 이 땅에서 계속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입니다.

부산경찰서에서 폭탄을 터트렸던 그가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의열단 동지들이 '맹렬히 의를 실천하다' 산화돼 떠났습니다.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최수봉 의사가 그랬고, 조선총독부 폭탄 의거와 상하이 황포탄 의거를 이끈 김익상 의사가 그랬습니다. 1923년 겨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종로 한복판에서 1:1000의 싸움 끝에 산화한 김상옥 의사도 있습니다.

나이 마흔에 온몸에 폭탄을 두르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왕이 사는 왕궁 앞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 의사도 있습니다. 을지로 한복판에서 경제수탈의 주체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 의사도 있습니다. 민족시인으로 불리는 이육사 역시 의열단원으로 살다 베이징의 지하감옥에서 순국했습니다.

그래서 더 아쉽습니다. 만약 이들이 끝까지 살아남아 함께 광복을 맞이했다면, 해방 후까지 살아남은 의열단 동지들이 노덕술 등 친일경찰 출신들에게 모욕당하고 빨갱이로 몰려 '과연 고향까지 등졌을까'하는 생각이 계속 듭니다. 어쩌면 청년 박재혁을 비롯해 열거한 의열단원들이 하나같이 광복 전 '순국'했기에 모두 독립투사로 인정을 받았던  아닌가 싶습니다.

청년 박재혁이 동지들에게 남긴 유언 하나
 

박재혁, 정부 공훈록에 따르면 부산진보통학교와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전기회사 전차차장으로 근무했습니다. 이후 왜관에서 무역상회의 고용인으로 일하던 중 1917년 6월 자본금 700원을 얻어 상하이로 건너가 무역업에 종사했습니다.

한마디로 천부적인 '상재'를 타고난 탓에 무려 1910년대에 국제무역을 하는 상인으로 발돋움하게 되는 겁니다. 놀라운 것은 청년 박재혁의 확장력, 그는 자신의 무대를 싱가포르까지 확대합니다. 어찌 가능했을까? 아편으로 망조가 들려버린 당시 중국에는 아편 환자들이 넘쳐났고, 이에 대한 치료제로 우리 땅에서 만들어진 홍삼이 쓰였습니다. 그는 이 지점을 정확히 파고들어 공략했던 겁니다. 넘쳐나는 상재와 이에 못지않은 천부적인 언어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1920년 3월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의열단 초기 7인 단원 사진. 김원봉, 곽재기, 강세우, 김기득, 이성우, 정이소, 김익상이다.
 1920년 3월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의열단 초기 7인 단원 사진. 김원봉, 곽재기, 강세우, 김기득, 이성우, 정이소, 김익상이다.
ⓒ 국사편찬위원회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놓쳐선 안 되는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박재혁은 이미 부산진보통학교를 다닐 때부터 독립투사로서의 면모를 보였다는 점입니다.

1907년 만 12세에 불과했던 박재혁은 친구 최천택과 김영주, 백용수 등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을 진행합니다. 부산상업학교에 다닐 때는 '구세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동국역사 배포 사건' 등을 주도합니다. 천부적인 상재로 해외시장을 공략하던 청년 박재혁이 국제도시 상하이에서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원으로 거듭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1919년 11월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중심이 돼 만들어진 의열단의 첫 번째 의거는 실행도 되기 전에 밀정과 일본 경찰에 의해 실패하고 맙니다. 의거를 준비했던 의열단원 다수가 검거됐고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일부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의열단이 대대적으로 준비한 1차 의거가 실패로 끝난 뒤 의열단 단장 김원봉은 싱가포르에 머물던 박재혁에게 전보를 쳐 '상하이에서 만남을 갖자'고 연락합니다. 의열단 공약 10조 중에는 '초회에 필응할 것'이 명시됐습니다. 전보를 받은 박재혁은 곧바로 상하이에 돌아왔습니다. 이런 박재혁을 향해 약산 김원봉은 말합니다.
 
"동지들의 복수를 위해 부산(경찰)서장을 죽이고 오시오. 다만 (서장을) 죽이되, 그냥 죽여서는 안 되어. 제가(스스로) 누구 손에 무슨 까닭으로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지 알도록 단단히 수죄를 한 다음에 죽여야 하오."
 
명령을 받은 박재혁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고심합니다. 그리고 자산을 정리해 고서상으로 위장합니다.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橋本秀平)가 고서를 좋아한다는 첩보를 입수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박재혁은 그 길로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으로 향합니다. 과정에서 상하이에 있는 동지들에게 유언이 돼버린 '가기허다수익'이면 '불가기재견군안'이라 적힌 마지막 전보를 보냅니다. '많은 수익은 기약할 수 있을 것 같으나 그대 모습은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뜻입니다.

일본을 거쳐 어렵게 부산에 도착한 박재혁은 망설임 없이 부산경찰서로 향합니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서장 면담을 득했습니다. 홍삼을 팔아 준비한 고서상으로의 위장이 완벽했기 때문입니다. 부산경찰서 2층에서 서장을 마주한 박재혁은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이런저런 고서를 꺼내 건넵니다. 그리곤 의열단의 성명이 적힌 전단을 보이며, 유창한 일본어로 서장에게 말합니다.
 
"나는 상하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놈들의 소행으로 우리 동지들이 모두 구속돼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있다. 네놈들은 모두 우리의 원수다. 죽어 마땅한 줄 알고 있을 거다."
 
말을 마친 박재혁은 숨겨온 폭탄을 꺼내 탁자 한가운데 두고 터트립니다. 박재혁과 하시모토 사이의 거리는 두 척에 불과했습니다. 이 폭발로 하시모토는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근처에 있던 일본경찰 2인도 큰 부상을 당합니다. 박재혁 역시 중상을 입고 현장에서 체포됩니다. 이것이 바로 의열단의 공식적인 첫 번째 성공 작전인 부산경찰서 폭탄 의거입니다.

돌아보면 애틋한 연애편지처럼 보였던 그 전보에서 스물여섯 청년 박재혁은 거사를 앞두고 의열단 동지들에게 '수익은 기약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대 모습은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유언을 남기고 동지들 곁을 떠났던 겁니다.

후인으로서 바라는 두 가지
   
현충원 박재혁의 묘. 뒤쪽 언덕에 국가공인 친일파 신태영과 이응준이 잠들어 있다.
 현충원 박재혁의 묘. 뒤쪽 언덕에 국가공인 친일파 신태영과 이응준이 잠들어 있다.
ⓒ 이병길

관련사진보기

 
1921년 5월 11일 대구감옥에서 순국한 박재혁은 자신의 고향 부산의 공동묘지에 안장됩니다. 우리 정부는 박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박 의사는 7년 뒤인 1969년 10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76번 무덤에 모셔집니다. 그의 무덤 인근에는 의열단원 김상옥과 최수봉, 이종암, 곽재기도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박 의사가 광복된 조국에서 안녕한 채로 잠들었냐 묻는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다 답할 수 없습니다. 왜냐. 그의 무덤 머리에 일본군으로 30여 년을 복무한, 국가공인 친일파 신태영과 이응준이 잠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 히라야마 호에이라는 이름으로 산 신태영은 1943년 11월 17일 <경성일보>에 "조선인들은 한시바삐 제국의 신민이 되어 동아시아를 개척해야 한다. 내 첫 출진의 목표는 야스쿠니 신사(안장이)"라는 희대의 망언을 남긴 인물입니다. 이응준 역시 공개적으로 "조선의 청년들이 일본 군인이 돼 전쟁터로 나가 목숨을 바쳐 천황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라고 발언하고 신문에 "대원수 하의 고굉(손과 발)으로 황군의 일원으로 한번 죽음으로써 그 책무를 완수하는 것이야말로 명예를 완수하는 길이다"라는 기고했습니다.
  
1998년 5월 부산어린이대공원에 세워진 박재혁 의사의 동상을 많은 이들이 볼 수 있는 곳으로 이전하자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1998년 5월 부산어린이대공원에 세워진 박재혁 의사의 동상을 많은 이들이 볼 수 있는 곳으로 이전하자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 이병길

관련사진보기

 
실은 박 의사 순국일을 이틀 앞둔 지난 9일 박 의사의 후손인 김경은(종손녀/여동생 손녀)씨 전화를 받았습니다. 요지만 전하면 '박 의사를 제대로 선양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죄스럽다', '많은 시민이 노력한 탓에 의거지에 안내판이 설치되고 진보하고 있지만 여전히 개선해야 할 것들이 넘친다'는 말이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부산진구 초읍동 어린이대공원 성지곡 북단 가장자리에 위치한 박재혁 의사 동상입니다. 동상의 위치가 길목에서 한참이나 들어가 있어 그곳을 자주 찾는 시민마저 박재혁 의사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지하여 동상이 생긴 이래 지속적으로 이전을 추진해왔지만 여러 사정으로 현재까지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는 박 의사의 동상이 '부산 동구 범일동 부산진시장과 자성대 방향 사거리 교통섬에 자리했으면 좋겠다'고 콕집어 말했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박 의사 출생지인 좌천동에 근접한 곳이고 무엇보다 부산 시민들이 부산의 자랑 박 의사를 오가면서 만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고 밝혔습니다.

박 의사 순국 103주년을 맞아 박 의사 동상이 박 의사 후손의 바람대로 이동했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박 의사 머리 위에 안장된 국가공인 친일파에 대한 파묘 역시 반드시 이뤄지기를 희망합니다. 그것이 후인으로서 박 의사에게 보일 수 있는 최선의 모습 같습니다. 의열단원 박재혁 의사를 기억합니다.

태그:#박재혁, #의열단, #부산, #김원봉, #친일파
댓글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법조팀 취재기자. 오늘도 애국하는 마음.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