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한지 한 달이나 된 <인생은 아름다워>가 입소문을 타고 역주행을 하고 있다. 개봉 2주차에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 뒤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인생은 아름다워>는 뮤지컬 영화다. 진부함은 때로 흥행 참패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대박의 요소일 때가 더 많다. <인생의 아름다워>가 그렇다.

하지만, 단순히 기본은 하는 뻔한 이야기였다면 까다롭고 수준 높은 요즘 관객들에게서 이렇게나 찬사를 받지는 못했을 터. 이야기의 전개가 뻔히 예상되면서도 결코 전부 다 맞추게 두지 않는 똑똑한 클리셰가 영화의 재미를 더한다.
 
우리 인생에 늘 음악이 있었다는 깨달음

잊힐 만하면 나타나는 향수를 자극하는 소재의 영화나 드라마들. 영화로는 <쎄시봉>, <써니>가 그랬고, 드라마로는 <응답하라 1997>를 시작으로 시리즈가 이어지며 사랑을 받았다. 가장 최근 방영된 <슬기로운 의사생활> 역시 기저엔 향수가 있었다.

재밌게도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애잔함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들에는 대부분 음악이 큰 몫을 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끊임없이 창작되는 음악들은 만들어져 사랑받는 그 순간엔 트렌드이지만 조금만 지나면 한물 간 노래가 되었다가 세월이 더 흐르면 추억 소환의 버튼처럼 각자 인생의 몇몇 페이지에 함께 각인되는 사진과 같아진다.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세연(염정아 분), 진봉(류승룡 분)의 목소리로 불린 노래들은 X세대와 IMF를 기억하는 나이대의 관객들에게 추억 소환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영화에는 총 15곡의 노래들이 등장한다. 신중현과 엽전들 '미인' (1974)을 제외하고 1980년대 중후반의 곡들이 많고, 특히 이문세의 노래가 5곡이나 쓰였는데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주인공 세연과 진봉은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대 후반에 처음 만나 IMF로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던 시절에 결혼했다. 또 동탄이 신도시로 불리기 이전에 그곳에서 신혼생활을 했으며 수능을 앞둔 아들과 한창 중2병을 앓는 듯한 딸을 키우고 있는, 50대 초반의 부부다.

그런 그들에게 이문세의 '조조 할인'(1996) 'Solo예찬'(1998) '애수'(1999) '알 수 없는 인생'(2006)은 인생곡, 주제곡이라 해도 될 것이다. 같은 시대를 산 동년배 관객들 역시 각자의 젊은 날을 문득문득 떠올리며 영화 속 음악들을 즐겼을 터. 분명 익히 알고 나름 좋아했던 노래들임에도 노랫말들이 이렇게 깊이가 있었나 새롭게 알게 된 건 덤이다.
 
발끝 까딱이는 흥부자 관객 체험
 
 <인생은 아름다워>의 한 장면

<인생은 아름다워>의 한 장면 ⓒ 영화 포스터

 
최대한 사전정보를 차단하기로 마음먹고, 인터넷 기사 한 번 클릭하지 않고 극장에 들어섰다. 모르고 보고 싶었고,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뮤지컬 영화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의도된 유치함이 영화 전반을 채울 것을 짐작했고 아예 웃을 준비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예상은 적중했다. 관객을 제대로 웃기려면 철저히 뻔뻔해야 하는데, 특히 뮤지컬 영화 속 노래 장면은 무대 위 배우들처럼 다소 과장된 연기가 요구된다. 망가지려면 제대로 망가지고 기쁨을 표현하려면 팔짝팔짝 뛰어 주어야 제 맛이다.

<인생은 아름다워>의 배우들이 흡사 발리우드 영화 한 장면처럼 합을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하자 극장에서 지켜야 하는 에티켓은 잠시 접어두고 소리 내어 웃었다. 느닷없는 웃음 포인트에선 나도 모르게 손뼉도 한번 부딪쳐봤다.

도입부가 없어 당혹스러운 노래 이문세의 '조조할인'을 영화 속 첫 노래로 정한 것은 매우 영리하고 탁월한 선택이다. 염정아와 류승룡의 생활연기에 빠져 이야기의 흐름을 좇을 때 엉뚱한 소녀미를 지닌 중년의 세연이 갑자기 노래를 부르는 장면과 딱 맞아 떨어지는 노래다. 뮤지컬 영화임을 상기하자마자 전에는 느껴본 적 없는 흥과 설렘에 가슴이 콩닥댔다면 오버액션일까. 흔치 않은 흥행 역주행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흥겨움이 아닐는지.

영화의 클라이맥스이자 이왕 울리려면 제대로 울리기로 작정을 한 듯한 세연을 위한 마지막 잔치 장면에선 토이의 '뜨거운 안녕' (2007)이 큰 역할을 한다. 연인 간의 이별을 주제로 한 노랫말은 죽음으로 인해 이별을 할 수밖에 없는 부부의 상황과 맞아떨어진다. 이별을 노래는 주제에 흥겹다니. 의도된 부조화가 주는 뜻밖의 감동이다.

누구 하나 덜하지 않은 전 배우의 열연
 
 <인생은 아름다워>의 한 장면

<인생은 아름다워>의 한 장면 ⓒ 영화 포스터

 
아마 아는 사람이 많지 않겠지만 염정아가 영화에서 노래를 부른 것은 <인생은 아름다워>가 처음이 아니다. 염정아, 박해일 주연의 <소년, 천국에 가다>(2005)에서 염정아는 미혼모이자 밤무대 가수로 분했다. 몸만 자란 어린 아이 박해일의 순애보와 철없는 미혼모 염정아의 애잔한 삶은 배인숙의 '누구라도 그러하듯이'(1979) 덕에 절절해 보였다.

무려 1년이나 노래와 춤을 연습했다더니 '인생은 아름다워' 속 염정아의 노래는 '소년, 천국에 가다'에서보다 한층 발전돼 보인다. 염정아나 류승룡이 소름끼치게 노래를 잘 하는 배우는 아니지만 극중 세연과 진봉의 한 시절, 한 시절을 노래를 통해 표현하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노래뿐일까. 50줄에 들어선 명배우들이 20대 초중반을 연기하며 어색함 없이 깨발랄과 오두방정을 표현할 때,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 입장에서 고마움을 느꼈다. 명배우의 열연이나 명가수의 열창을 볼 때면 감동을 넘어 감사함마저 들 때가 있는데, <인생은 아름다워>의 모든 배우들이 내겐 그렇게 보였다.

주연배우 염정아, 류승룡은 물론이고 몇 장면 등장하진 않지만 신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한 고창석, 박영규, 염혜란, 김선영 등 여러 배우들의 연기와 춤은 '역시 배우는 배우다'란 얘기가 절로 나올 만큼 훌륭했다. 사실 더 감동이었던 부분은 단역 배우들의 연기였다. 지나가는 행인부터 술집 진상 손님과 중년의 여사장까지도 한 명 한 명 각자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짐작건대 현역 뮤지컬 배우들일 그들은 무대 대신 스크린에서 배역의 크고 작음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도록 춤추고 노래했다.
 
그래도 인생은 아릅답다는 명쾌한 결론

영화의 시작은 헌신적인 아내이자 엄마, 오십줄에 소녀미를 뿜는 천생 여자인 세연이 시한부판정을 받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아내가 두 달 후 죽는다는데 짜증과 분노만을 표출하는 남편 진봉의 모습에 관객은 세인의 불행에 더욱 몰입한다. 영화의 큰 맥락은 처음부터 끝까지 통속적인 신파극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요즘 영화답게 고구마 전개는 없다.

하필 시한부선고를 받자마자 생일을 맞은 세연은 가족들 누구 하나 자신의 생일을 기억하고 축하해주지 않자 설움 폭발, 급기야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절의 첫사랑을 찾아가겠노라 선언한다. 첫사랑 찾기의 여정으로 영화는 어느새 로드무비로 전환하고, 무심하다 못해 나쁘기까지 한 진봉의 캐릭터가 그 여정에서 빛을 발한다.

첫사랑과의 재회 여부와 관계없이 그 여정은 세연과 진봉이 삶을 돌아보며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시간으로써 그 역할을 해냈다. 찬란하고 빛났던 시절의 첫사랑, 이별, 어른의 연애, 결혼과 같은 평범한 삶의 순간들로 우리 인생이 채워진다. 억울하고, 불행한 삶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사랑 받는 아름다운 인생이었음을 깨달았다는 뻔한 결말이 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닐지.

누구나 죽지만 비교적 빨리, 어떻게 죽을 것인지 통보 받은 죽음은 영화의 단골 소재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삶을 돌아보고 주변을 정리하는 것은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니다. 아직 내게 그 때가 안 왔을 뿐 언젠가는 대부분 그렇게 죽는 것이 인생이니까.

인생이 사실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얘기는 누군가에게는 판타지일 수도 있다. 각양각색의 불행을 몇 겹씩 두르고 꾸역꾸역 삶을 살아내는 사람에게 "당신의 인생도 아름다워요!"라고 말한다면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영화 속 세연의 아름다웠던 삶의 순간들을 보면 행복하기 위해서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삶이 주는 기쁨은 대체로 소소한 일상에서 비롯되니까 말이다.
#인생은아름다워 #뮤지컬영화 #염정아 #류승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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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와 인류의 미래가 가장 큰 걱정인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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