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사기계 앞에서 일하는 안해영씨
경산이주노동자센터
해영의 일
연사는 옷을 만들기 위한 가장 아래 단계의 공정이다. 옷감을 만들 실을 뽑고 실을 꼬아서 매끄럽게 만들어주는 작업이다. 연사공장은 1년 365일 기계를 놀리지 않는다. 한겨울에도 반팔 티셔츠를 입고 일할 만큼 열기가 뜨거운 작업환경이다. 일은 많고 일손은 늘 부족했다. 대표적인 3D 업종으로 일손이 부족해서 일흔이 넘어도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다. 안해영의 나이대가 마지막 세대가 될 만큼 젊은 사람들이 없다.
안해영은 남들보다 더 많이 일했다. 한 사람이 기계를 두 대 돌릴 때 해영은 네 대를 돌렸다. 한 사람 반 이상의 몫을 거뜬히 해냈고, 바쁘면 두 사람 몫도 해냈기 때문에 공장 사장은 안해영을 인정했지만 불평등을 참지 못하는 해영은 차별을 느끼는 순간 사장과 싸웠다. 언제든지 직장을 옮겨 다녔다.
"미등록이었지만, 사장님하고 안 맞으면 많이 싸웠어요. 어차피 저는 일에 자신이 있었고, 다른 데 가서 일하면 된다고 생각해서 옮겨 다니기도 많이 옮겨 다녔어요. 저는 불평등한 걸 못 참아요. 차별받으면 싸웠어요."
당차기만 할 것 같은 해영이지만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한국에서 살아가는 건 늘 불안정했다. 외국인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단속을 시작하면 해영은 일을 그만두고 집에 숨어있어야 했다. 세상이 조금 조용해지면 다시 일을 찾아다녔다. 한국에서 지낸 시간은 길었지만, 단속을 피하고 제약이 많은 그는 아무리 부지런하게 일해도 돈을 모을 수가 없었다.
연사공장에서 만난 재중동포 남자와 연애하고 가정도 꾸렸다. 해영의 남편도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건너왔지만, 해영과 마찬가지로 비자를 상실했다. 해영이 사랑하며 의지할 사람이 생겨서 한국 생활이 고달프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남편은 뇌혈관 기형이란 병을 얻어서 10년 넘게 병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해영이 돌봐야 할 사랑이었지만 한국 사회는 이방인 취급만 하고 각박했다.
"우리가 미등록이니까 건강보험 급여냐 비급여냐 상관없이 우리가 다 내야 하잖아요. 저 혼자 벌어서 병원비 내고 생활해야 하니까, 그때 빚도 많이 졌어요."
왜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냐고 물었을 때 해영의 대답은 의외였다.
"제가 한국말도 잘하고 인간관계가 좋았어요. 중국에서 온 사람들 일자리도 알아봐주고 말이 안 통하면 회사 가서 통역도 해주면서 도움을 많이 줬어요. 그러니까 친구들도 내가 어려운 거 알고는 돈도 빌려주고 융통도 해줬어요. 그때 빚을 많이 졌어요. 이렇게 살아오다가 이제 아저씨가 괜찮아졌으니까 같이 벌어서 갚아야죠."
이 땅에서 일하면서 살아가지만 허락되지 않은 사람에게 건강보험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해영은 비싼 병원비 때문에 절망하기보다 지인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앞날을 헤쳐 나갔다. 해영은 돈을 빌려준 사람들이 다 한국에 있어 떠날 수 없다고 했지만 이만큼 온 길을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제가 스무살 때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잖아요. 중국에 있는 친구들은 이제 연락도 안 하고 여기서 아는 사람들이 더 많아요. 오히려 한국에서 친구들을 더 많이 알고 있죠. 한국이 사는 게 훨씬 낫죠. 이십 몇 년 만에 중국에 돌아갔는데 물도 한국이 좋고 생활환경도 좋고요. 일자리를 구하기가 너무 쉬워요. 한국은 내가 열심히만 하면 일자리는 많아요."
경산이주노동자센터 소장이 되다
남편의 병이 나아지자 해영은 더 늦기 전에 첫 아이를 임신했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이었다. 모아놓은 돈 없이 아이를 출산하는 건 해영에게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경산이주노동자센터가 문을 열고 이주노동자들의 고충을 상담한다는 전단이 붙은 걸 해영의 친구가 발견했다. 친구는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며 해영의 손을 잡고 센터를 찾아갔다. 해영이 임신 6개월이 되었을 때였다.
"센터에서 대구의료원에 진료의뢰서를 써줬어요. 대구의료원에서 진료를 받았어요. 입원하면 100% 무료였어요. 경제적으로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우리가 미등록이라서 진짜 많이 힘들었거든요."
경산이주노동자센터가 문을 연 2007년을 해영은 똑똑히 기억한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아이의 나이만큼 경산이주노동자센터와 인연도 쌓여갔다. 해영을 맞아준 센터 소장은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이주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서 헌신했다. 이를 지켜본 해영은 이주노동자도 당연히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가 끝나자 아이를 업고 경산이주노동자센터로 자원봉사를 나갔다. 일 년에 서너 번 하는 큰 행사가 있을 때면 주방일을 도맡아서 했다. 해영은 그림자처럼 뒤치다꺼리만 했다고 하지만 중국어 통역이 필요하면 통역했고,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하는 이주노동자가 있으면 동행했다. 이 모든 일은 연사공장에서 퇴근한 후에 했다. 하루도 쉬는 날 없이 공장을 다녔다. 아이는 경산이주노동자센터를 놀이터 삼아서 건강하게 자랐다.
"여름이면 민주노총 경북본부에서 개최하는 여름캠프가 진짜 재밌거든요. 아들이 어렸을 때 거의 다 갔었어요. 센터에서 차 타고 어디 가면 같이 놀러가고 어울리고 센터에서 찍은 사진에 우리 아들 얼굴이 거의 다 있을 정도로 우리는 모든 행사에 다 참여했어요."
개구쟁이 어린이는 어느덧 사춘기 중학생이 되었다. 엄마를 따라다니지 않을 나이가 되었지만, 고등학생이 되면 경산이주노동자센터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하겠다는 계획을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아들은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한국에서 계속 살고 싶다고 말한다. 엄마는 아들이 국적을 결정할 날을 기다리기로 했다.
세월이 흘러 앞장선 센터 소장 두 분이 임기를 마치고 자리를 내려놓았다. 센터에도 변화가 생겼다. 상근하는 여성 활동가는 이주노동자가 센터 소장을 해야 한다면서 안해영을 적극 추천했다. 안해영은 손사래를 쳤지만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저한테 맞는 옷이 아니지만 여성 활동가가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그냥 옆에 있는 게 도움이 될 거 같았어요."
해영에게 센터 소장이란 자리는 쉬운 결정이 아니다. 비자도 3년마다 자격을 따져서 연장한다. 300만 원 이상의 벌금형을 받으면 추방당할 수 있기 때문에 정부와 맞서야 하는 일이 많은 이주노동자센터는 해영에게 부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해영은 경산이주노동자센터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크다. 한국에서 살얼음을 걷듯 걸어온 세월동안 해영의 곁을 지켜준 곳을 지키기 위해서 해영은 큰 용기를 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