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유학을 왔다가 산재를 당한 후 공부도 일도 못하게 된 듀엔씨
명숙
듀엔씨는 산재가 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라 고향으로 갈수 없었다. 수술한 지 얼마 안 됐고, 통원치료도 해야 해서 한국을 떠날 수 없었다. 그는 프레스공장에서 손가락 네 개가 모두 절단되는 큰 산재를 당했다. 현재까지 총 10회의 대수술을 했다. 산재보험에 가입돼 있었고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 인정도 받았으나 10%는 본인부담이다.
"그때는 통원치료 중이었어요. 수술을 많이 했기 때문에 몸이 약해서 조심을 했어요. 감염될까봐 버스도 안타고 걸어 다녔어요. 몸이 약하니까 기침을 할 때도 있었는데 기침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는 게 느껴졌어요."
듀엔씨는 한국으로 온 유학생이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가 사고가 났다. 지금은 산재기간은 끝났지만 일도 공부도 할 수 없다. 대구 출입국관리소는 베트남에 다시 가서 유학 비자를 받으라고 했다. 치료를 받느라 체류기간이 2년인 유학비자가 아니라 질병으로 인한 치료를 받는 G1비자가 됐기 때문이다.
"제 꿈은 통역사였어요. 그런데 이제는 공부도 할 수 없어요. 베트남에 들어가서 한국에 다시 들어오려면 유학센터에 준 1500만 원을 갚아야 해요. 은행에서 돈 빌려서 온 거예요. 그런데 제가 지금 돈 없잖아요. 그런데 공부하고 싶으면 베트남에 들어가서 다시 비자 받고 오라고 해요. 출입국관리소에서 동의만 해준다면 저는 학비 400만 원만 납부하면 공부할 수 있어요. 손을 다쳤으니 한국어 공부해야 베트남에 가서 일자리라도 얻을 수 있어요."
손을 많이 다쳐서 현재 한국에서 돈을 벌 수 없다. 일을 할 수 없으니 생활도 걱정이다. 그래도 그는 본인은 나은 편이라고 했다. 사촌형과 같이 생활하고 있어서 생활비는 거의 안 들기 때문이다. 사고가 크게 났음에도 부모님께도 말을 안 했다. 농사를 짓는 부모님의 생활도 힘들 텐데 차마 말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그러나 고향 친구들이 치료비를 모금해서 부모님께 전달하는 바람에 집에서도 알게 됐다. 그렇지만 여전히 충격을 받을까봐 다친 손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지금 부모님도 아파서 매달 병원에 가야 해요. 한국에 와서 공부만 하고 싶었는데 생활비, 기숙사비, 학비 다 필요했어요. 유학 올 때 든 빚도 갚아야 해요. 말레이시아 갔다가 한국은 인권이 좋다고 해서 한국에 왔는데…. 외국인 노동자들 인권은 아무도 신경 안 써요. 저는 어떻게 사나요?"
그의 나이 스물일곱, 통역 공부는 어떻게 할 계획이냐고 묻자 한참동안 말을 못했다. 유난히 큰 눈에 그저 눈물만 그렁거렸다. 그는 교회 등 주변의 도움으로 휴업급여와 병원비는 받았고 현재는 회사를 상대로 장해보상금 등 사고 책임을 묻는 소송 중이다. "어떻게 사냐?"는 그의 물음에 아직 한국정부는 답이 없다.
최근 코로나에 감염된 사촌형을 돌보다가 그도 감염됐다. 하지만 돈 때문에 약국에서 구입한 코로나검사 진단키트로 검사하고 집에서 쉬기만 했다. G1 비자를 갖고 있었지만 건강보험은 없어서다. 수입도 없고 건강보험도 없는 그에게 검사나 치료에 드는 비용은 큰 부담이다. 다행히 증상은 심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숨쉬기가 좀 힘들고 피곤한 것이 오래간 정도라고 했다. 코로나 시기에도 건강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이주민들은 온몸으로 불이익을 감수하는 수밖에 없다.
"주변에 건강보험 없어서 걱정하는 사람 많아요. 건강보험 있는 사람들은 공짜로 검사 받는데 (건강보험) 없는 사람들은 아니에요. 병원비를 걱정해야 해요. 그래서 주변에 코로나 걸릴까봐 두려워하면서도 병원에 못 가는 사람이 많아요. 우리 같은 외국인들에게 너무 한 일이에요."
통역하던 유진씨도 아프면 건강보험 가입 여부에 상관없이 치료해줘야 하지 않냐며 맞장구쳤다. 미등록인 사람들도 보험에 가입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그래야 아프면 바로 병원에 갈 수 있지 않겠냐고.
목발 짚고 오산에서 대구까지 온 까닭
듀엔씨 옆으로 목발을 짚고 한 사람이 들어섰다. 유엔씨였다. 그도 유학생으로 왔다가 산재를 입었다. 해양대학교 한국어학당에 다니다가 생활비 때문에 공장에서 일하게 됐다. 유학생들 중에는 생활비와 유학을 오느라 진 빚을 갚으려고 일을 하는 학생들이 종종 있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유럽으로 유학 간 친구들이 그 나라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을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들도 다쳤을 때 이렇게 방치되었을까.

▲산재 치료 중에 코로나에 감염되었으나 비용부담으로 진단과 치료를 스스로 해결해야했던 유엔씨
명숙
유엔씨는 경기도 오산에 있는 TV 모니터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다쳤다. 추락했는데 다리가 꺾였다. 오송에서 수술한 후 도와 줄 사람도 의지할 거처도 없어서 수소문 끝에 대구로 내려왔다. 유진씨는 대구시 북부정류장에서 혼자서 목발을 짚고 걸어오는 모습이 참 안쓰러웠다고 기억했다. 두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니 응급차를 이용하는 게 좋지만 돈이 많이 들어 버스를 혼자 타고 온 것이다.
"산재로 인정돼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퇴원했어요. 퇴원했는데 어디로 가야 되는지 어떻게 해야 되는지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어요. 아는 사람이 베트남 누나가 대구 교회에 있는데 잘 도와준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멀리 외국에서 온 이주민을 위한 정책이 없는 대한민국에서 이주민들이 당장 의지할 곳은 국가별 커뮤니티다. 코로나 위기에서 정보라도 얻을 수 있고, 불이익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도 말이 통하는 신뢰할 만한 집단이 필요하다. 한국의 공식기관에서 생긴 불신과 의문 그리고 상처를 풀 곳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주민들에게 국가별 커뮤니티는 병원이자 학교이자 쉼터이다. 그가 대구까지 올 수밖에 없는 한국의 상황이 너무 씁쓸해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졌다. 부러진 다리에 박은 철심 제거 수술이 남았기 때문에 아직 일은 할 수 없다. G1 비자이기도 해 일을 할 수도 없으니 생활비는 친구들에게 손을 벌린다고 했다.
그가 코로나에 감염된 것은 올해 초였다. 열이 많이 나고 가슴이 아파서 보건소에 가서 검사를 했다. 보건소에서 지원해주는 약이나 물품도 없으니 주변 형들이 먹는 약을 같이 먹었다. 이제는 좀 나아졌지만 불안감이 가시지는 않았다. 코로나 확산이 잦아들어 방역에 소홀한 분위기에서도 유엔씨는 불안해서 마스크는 꼭 쓰고 다닌다. 수술이 남았으니 더 조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 명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예배 중 나온 성경 말씀이 겹쳐진다.
'말세에 고통 하는 때에 이르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교만하며…(디모데후서 3장 1절~5절)'
국적이 있는 자들만을 돌보는 한국의 정책은 성서의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바이러스는 국적과 인종을 가리지 않지만 치료와 피해지원은 인종과 국적을 따지는 현실에서 이주노동자의 피해는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코로나의 피해가 불평등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교회 벽마다 본국에 남겨 놓은 가족들과 찍은 사진, 한국에서 동료들과 놀러가 찍은 사진들이 붙어있다.
명숙
유엔씨와 이야기를 마치고 교회 안을 둘러봤다. 벽마다 본국에 남겨 놓은 가족들과 찍은 사진, 한국에서 동료들과 놀러가 찍은 사진들이 붙어있다. 사진으로 그리움을 달래고 새롭게 추억을 쌓고 있는 것이다. 오늘 만난 이주노동자들에게 과거의 사진은 어떤 의미일까. 한국에서 산재와 코로나를 경험한 그들에게 따뜻한 추억의 사진을 남기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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