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26 21:27최종 업데이트 22.08.27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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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이주자는 살아 숨 쉬는 자인가. 존 버거는 <제7의 인간>에서 이들을 가리켜 "불사의 존재, 끊임없이 대체 가능하므로 죽음이란 없는 존재"라 했다. 오직 노동하는 몸으로 기능하기를 요구받고, 표류함이 당연시 여겨지고, 존재할 권리를 국가의 허락에 구해야 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와 난민의 현주소이다. 체류권을 '허가'받은 이주민들조차 한국 사회의 성원권을 제대로 획득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국가는 잔혹하고, 사회는 무심하다. 그럼에도 사람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계속되는 일. 한국사회에서 살아 숨 쉬는 이주민들의 삶을 르포르타주로 담고자 한다.[편집자말]

2022년 경산이주노동자센터 후원의 밤 행사장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안해영 소장 ⓒ 경산이주노동자센터

 
경산이주노동자센터 안해영 소장을 처음 만난 건 코로나19 감염병 유행으로 숨을 참으면서 노동하는 이주노동자를 기록할 때였다. 그는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중국인 식당 노동자 장밍즈를 내게 소개해주고 통역까지 해주었다. 일 년이 지난 후에 다시 만난 안해영은 장밍즈가 식당에서 퇴직금 한 푼 받지 못한 억울한 사연을 들려주었다.

중국인 장밍즈는 남들보다 더 길게 일하지만 임금은 제일 적게 받았다. 사장은 월급날이면 장밍즈의 이름도, 금액도 적혀있지 않은 하얀 봉투에 현금만 넣어서 전달했다. 일을 그만두고 사장에게 퇴직금을 달라고 말하자 사장은 퇴직금은 고사하고 불법체류로 신고하겠다고 협박했다.


"장밍즈가 우리 센터로 찾아와서 억울하다고 울고불고 했죠. 노무사에게 보여줬더니 증거가 하나도 없어서 난색을 표하더라구요. 그래도 어떻게 해요. 일단 진정은 넣어야죠. 악덕 기업주가 너무 많아요."

안해영도 2020년 코로나19 감염병이 시작될 무렵 일손이 급한 공장이 수당을 더 얹혀주겠다고 해서 공장을 옮겼다. 일감이 줄어들자 다른 이보다 수당을 더 받는 해영이 먼저 해고당했다. 해영이 외국인이라고 만만하게 봤을지도 모른다. 해영은 사장에게 부당해고라고 설명하고 해고수당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사장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해영은 바로 노동청에 진정을 넣었다. 해고기간 임금은 받아낼 수 있었다.

"제가 (이주노동자)센터에 있으면서 기본권리도 못 찾는다면 그건 이상하잖아요. 맞잖아요? 기본급으로 해서 3개월분 해고기간 임금 다 받았어요."

안해영, 자신은 원래 싸우는 걸 좋아한다고 수줍게 웃지만 이주노동자가 차별을 당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니기 때문에 싸운다고 말한다. 재중동포로 한국에서 30년을 살았다. 멸시와 차별이라는 한국 정부 이주노동자정책을 몸으로 겪은 산증인이다. 지금은 국적만 없을 뿐 경산시민으로 살고 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 신세

재중동포 안해영의 이북 출신 할아버지와 부산 출신 할머니가 중국으로 이주해서 정착한 곳은 길림성 길림시다. 안해영은 길림시에서 스물한 살까지 살다가 산업연수생제도가 시작된 1993년에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산업연수생제도 1년 만에 한국땅에서 체류자격을 상실했다. 이후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21년을 살았다. '불법 인간' 21년 만에 재외동포에 대한 특례조치로 안해영은 다시 체류자격을 갖게 되었다. 지난 6월 13일은 안해영이 한국으로 이주한 지 30년이 꽉 찬 눈물겨운 날이다.

산업연수생 안해영은 서울 수유동에 위치한 컴퓨터자수 공장에서 한국 생활의 첫발을 디뎠다. 첫 월급을 받는 날부터 안해영 일행과 사장 사이에 불화가 시작되었다. 한국인과 하는 일이 똑같았지만 산업연수생의 노동시간은 더 길었고 월급은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안해영과 함께 온 재중동포들은 사장에게 항의해 3개월 만에 한국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조건에 비슷하게 맞출 수 있었다. 사장은 더 이상 산업연수생을 쓰지 않았다.

재중동포 산업연수생들은 모두 중국으로 돌아갔지만 해영은 돌아갈 수 없었다. 해영이 한국에 나와 있는 동안에 가족이 한국 사람에게 취업사기를 당했다. 큰 빚을 졌다. 해영도 빚을 짊어져야 했다.

한국에 온 지 일 년 만에 정부는 해영을 '불법체류자'라고 불렀다. 언제 단속당할지 모를 불안한 생활의 시작이었지만 다행히 그에겐 의지할 곳이 있었다. 부산에 사는 사촌언니가 해영이 한국 생활에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일을 찾아서 경북 영천의 연사공장에 취직했다. 연사기술을 배우고 1996년 경산으로 일자리를 옮겨서 지금까지 26년을 살고 있다.
  

연사기계 앞에서 일하는 안해영씨 ⓒ 경산이주노동자센터

 
해영의 일

연사는 옷을 만들기 위한 가장 아래 단계의 공정이다. 옷감을 만들 실을 뽑고 실을 꼬아서 매끄럽게 만들어주는 작업이다. 연사공장은 1년 365일 기계를 놀리지 않는다. 한겨울에도 반팔 티셔츠를 입고 일할 만큼 열기가 뜨거운 작업환경이다. 일은 많고 일손은 늘 부족했다. 대표적인 3D 업종으로 일손이 부족해서 일흔이 넘어도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다. 안해영의 나이대가 마지막 세대가 될 만큼 젊은 사람들이 없다.

안해영은 남들보다 더 많이 일했다. 한 사람이 기계를 두 대 돌릴 때 해영은 네 대를 돌렸다. 한 사람 반 이상의 몫을 거뜬히 해냈고, 바쁘면 두 사람 몫도 해냈기 때문에 공장 사장은 안해영을 인정했지만 불평등을 참지 못하는 해영은 차별을 느끼는 순간 사장과 싸웠다. 언제든지 직장을 옮겨 다녔다. 

"미등록이었지만, 사장님하고 안 맞으면 많이 싸웠어요. 어차피 저는 일에 자신이 있었고, 다른 데 가서 일하면 된다고 생각해서 옮겨 다니기도 많이 옮겨 다녔어요. 저는 불평등한 걸 못 참아요. 차별받으면 싸웠어요."

당차기만 할 것 같은 해영이지만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한국에서 살아가는 건 늘 불안정했다. 외국인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단속을 시작하면 해영은 일을 그만두고 집에 숨어있어야 했다. 세상이 조금 조용해지면 다시 일을 찾아다녔다. 한국에서 지낸 시간은 길었지만, 단속을 피하고 제약이 많은 그는 아무리 부지런하게 일해도 돈을 모을 수가 없었다.

연사공장에서 만난 재중동포 남자와 연애하고 가정도 꾸렸다. 해영의 남편도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건너왔지만, 해영과 마찬가지로 비자를 상실했다. 해영이 사랑하며 의지할 사람이 생겨서 한국 생활이 고달프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남편은 뇌혈관 기형이란 병을 얻어서 10년 넘게 병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해영이 돌봐야 할 사랑이었지만 한국 사회는 이방인 취급만 하고 각박했다.

"우리가 미등록이니까 건강보험 급여냐 비급여냐 상관없이 우리가 다 내야 하잖아요. 저 혼자 벌어서 병원비 내고 생활해야 하니까, 그때 빚도 많이 졌어요."

왜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냐고 물었을 때 해영의 대답은 의외였다.

"제가 한국말도 잘하고 인간관계가 좋았어요. 중국에서 온 사람들 일자리도 알아봐주고 말이 안 통하면 회사 가서 통역도 해주면서 도움을 많이 줬어요. 그러니까 친구들도 내가 어려운 거 알고는 돈도 빌려주고 융통도 해줬어요. 그때 빚을 많이 졌어요. 이렇게 살아오다가 이제 아저씨가 괜찮아졌으니까 같이 벌어서 갚아야죠."

이 땅에서 일하면서 살아가지만 허락되지 않은 사람에게 건강보험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해영은 비싼 병원비 때문에 절망하기보다 지인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앞날을 헤쳐 나갔다. 해영은 돈을 빌려준 사람들이 다 한국에 있어 떠날 수 없다고 했지만 이만큼 온 길을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제가 스무살 때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잖아요. 중국에 있는 친구들은 이제 연락도 안 하고 여기서 아는 사람들이 더 많아요. 오히려 한국에서 친구들을 더 많이 알고 있죠. 한국이 사는 게 훨씬 낫죠. 이십 몇 년 만에 중국에 돌아갔는데 물도 한국이 좋고 생활환경도 좋고요. 일자리를 구하기가 너무 쉬워요. 한국은 내가 열심히만 하면 일자리는 많아요."

경산이주노동자센터 소장이 되다

남편의 병이 나아지자 해영은 더 늦기 전에 첫 아이를 임신했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이었다. 모아놓은 돈 없이 아이를 출산하는 건 해영에게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경산이주노동자센터가 문을 열고 이주노동자들의 고충을 상담한다는 전단이 붙은 걸 해영의 친구가 발견했다. 친구는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며 해영의 손을 잡고 센터를 찾아갔다. 해영이 임신 6개월이 되었을 때였다.

"센터에서 대구의료원에 진료의뢰서를 써줬어요. 대구의료원에서 진료를 받았어요. 입원하면 100% 무료였어요. 경제적으로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우리가 미등록이라서 진짜 많이 힘들었거든요."

경산이주노동자센터가 문을 연 2007년을 해영은 똑똑히 기억한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아이의 나이만큼 경산이주노동자센터와 인연도 쌓여갔다. 해영을 맞아준 센터 소장은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이주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서 헌신했다. 이를 지켜본 해영은 이주노동자도 당연히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가 끝나자 아이를 업고 경산이주노동자센터로 자원봉사를 나갔다. 일 년에 서너 번 하는 큰 행사가 있을 때면 주방일을 도맡아서 했다. 해영은 그림자처럼 뒤치다꺼리만 했다고 하지만 중국어 통역이 필요하면 통역했고,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하는 이주노동자가 있으면 동행했다. 이 모든 일은 연사공장에서 퇴근한 후에 했다. 하루도 쉬는 날 없이 공장을 다녔다. 아이는 경산이주노동자센터를 놀이터 삼아서 건강하게 자랐다.

"여름이면 민주노총 경북본부에서 개최하는 여름캠프가 진짜 재밌거든요. 아들이 어렸을 때 거의 다 갔었어요. 센터에서 차 타고 어디 가면 같이 놀러가고 어울리고 센터에서 찍은 사진에 우리 아들 얼굴이 거의 다 있을 정도로 우리는 모든 행사에 다 참여했어요."

개구쟁이 어린이는 어느덧 사춘기 중학생이 되었다. 엄마를 따라다니지 않을 나이가 되었지만, 고등학생이 되면 경산이주노동자센터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하겠다는 계획을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아들은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한국에서 계속 살고 싶다고 말한다. 엄마는 아들이 국적을 결정할 날을 기다리기로 했다.

세월이 흘러 앞장선 센터 소장 두 분이 임기를 마치고 자리를 내려놓았다. 센터에도 변화가 생겼다. 상근하는 여성 활동가는 이주노동자가 센터 소장을 해야 한다면서 안해영을 적극 추천했다. 안해영은 손사래를 쳤지만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저한테 맞는 옷이 아니지만 여성 활동가가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그냥 옆에 있는 게 도움이 될 거 같았어요."

해영에게 센터 소장이란 자리는 쉬운 결정이 아니다. 비자도 3년마다 자격을 따져서 연장한다. 300만 원 이상의 벌금형을 받으면 추방당할 수 있기 때문에 정부와 맞서야 하는 일이 많은 이주노동자센터는 해영에게 부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해영은 경산이주노동자센터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크다. 한국에서 살얼음을 걷듯 걸어온 세월동안 해영의 곁을 지켜준 곳을 지키기 위해서 해영은 큰 용기를 내야 했다.
 

2021년 12월 18일, 대구 영남대학교 앞에서 벌인 세계이주노동자의날 캠페인 ⓒ 경산이주노동자센터

 
한국생활 30년 만에 내 공장의 꿈을!

경산이주노동자센터에 오기 전부터 해영은 길을 가다가 중국말이 들리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한국말을 전혀 모른 채 일하러 온 중국 사람을 길에서 만나면 고향사람을 만난 듯 반가웠다. 집에 데리고 와서 밥을 해 먹였다. 일자리를 알아봐 주고 통역을 해주었다. 낯선 타국땅에서 고단하게 살아갈 동포를 돕고 싶은 선한 마음이 그를 한시도 쉬지 못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처음에 와서 고생을 많이 했지만 우리는 말이 통하는데 그 사람들은 말이 안 통하잖아요. 일자리 구하기도 힘들고 안타깝잖아요. 근데 센터는 말이 통하는 사람보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죠. 어차피 부릴 오지랖으로 경산이주노동자센터를 돕는 거예요."

중국인 사이에도 센터가 알려졌다. 해영은 수시로 통역을 해달라는 주문에 시달려야 했지만, 일자리를 원하는 사람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알아봐 주고 연결해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무리 다급한 처지라도 최저임금을 지키지 않는 사업장은 연결해주지 않았다. 한국말을 몰라서 어이없이 부당한 일을 당하는 중국인들의 사연에 해영은 속태우고 눈물을 흘렸다.

한국에서 30년을 살 수 있었던 건 경산의 작은 공장에서 해영의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공장을 옮겨다니면서 만난 동료들 덕분에 일이 끊이지 않고 연결되어서 연사경력은 27년이 되었다. 경산에 정착해서 산 지도 26년이다. 그러나 일손이 부족한 연사공장은 문을 닫는다.

"아는 사장님이 공장을 그만둔다는데 세가 안 나간다고 해요. 누구든지 와라. 와서 보증금도 천천히 주면 되고 한 달에 얼마씩 다 할부로 잘라서 줘도 된다고 해서 제가 해볼게요 했어요. 그냥 제가 일하면 되니까 따로 사람을 안 불러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물량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저도 사람을 써야 할 정도예요."

구색을 다 갖춘 작은 공장이다. 공장세도 다른 곳에 비하면 싸지만 일할 사람을 구하지 못해서 문을 닫는 공장을 해영은 기회라고 여겼다. 가족을 다 동원해서 해영은 일을 벌였다. 27년간 쌓아놓은 연사공장의 인연들이 해영네 작은 공장을 돌봐주러 찾아온다.

"며칠 전에는 아는 부장님이 와서 우리집 기계를 고쳐줬어요. 주변에 사장님들이 많이 도와주시지만 자꾸 도와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아는 사람이 많으니까 좋긴 좋아요."

다른 공장은 단가를 후려쳐도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서 잠을 설치면서 일하지만 안해영은 기계를 세워놓더라도 단가가 맞지 않으면 생산하지 않겠다는 자신만의 경영원칙을 세웠다.

"저는 안 급해요. 돈이 안 맞는데 제가 왜 해요. 기계 세워놓으면 세워놓지 나 안 한다고 하면서 싸웠어요. 이달부터 개선이 됐습니다. 이제 원하는 대로 단가도 어느 정도 맞춰주고 그렇게 작업을 재개했습니다."

문을 닫는 공장이 늘어나고 있다. 폐업한다고 생산해야 할 물량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손에서 생산해야 할테니까 안해영은 일거리가 없을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다. 품질만 좋다면 물량은 돌아서 오게 되어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해영은 연사공장을 다니면서 소원했던 것을 꼭 이루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람 구할 때 나는 퇴직금 무조건 100% 준다에요. 일요일은 쉬고 싶은 대로 쉬라고 하고, 돈 벌고 싶으면 나와서 일하는 거고. 제가 제일 원했던 게 휴일날 쉬고 싶은 거거든요."

해영은 사장님 소리를 듣게 되겠지만 여전히 휴일도 없이 일한다. 옷감을 만드는 가장 아랫단계의 원재료 공장을 운영하는 사장님과 노동자의 처지는 얼마나 달라질까. 27년동안 갈고 닦은 경력과 기술로 자신의 공장을 갖게 된 건 성공 신화도 욕망도 아니다. 이주노동자에게 허락할 수 없는 꿈이라고 잔인하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해영이 국적도 없이 한국 사회에 바친 30년간의 삶과 노동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응원했으면 좋겠다.

* 필자 소개: 기록노동자 시야. 세상이라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노동자를 편들고 싶어서 취재하고 글을 쓴다.
덧붙이는 글 <이주민 르포 :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사람들>은 '익천문화재단 길동무'와 <오마이뉴스> 공동 기획으로 2021년부터 진행되고 있습니다. 익천문화재단 길동무는 한국사회 민주주의의 심화 발전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위한 소박한 일들에 힘을 보태기 위해 김판수·염무웅 선생님, 송경동 시인, 민변 조영선 회장, 김소연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 운영위원장 등의 발의와 참여로 만들어졌습니다. '길동무 청년문학학교', '길동무문학·예술창작기금', '한국사회기층문화보고' 등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gildongmu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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