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단순하다. 22명의 선수들이 90분간 공을 쫓아다니다 결국에는 독일이 승리하는 스포츠다."
by. 게리 리네커
"36살이 되면서 길고 환상적인 프로선수 생활을 뒤돌아보게 됐다."
by. 미하엘 발락

18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축구는 오늘날 전 세계인의 스포츠가 되었다. 오늘날 축구가 탄생한 이후 약 100년 이상의 역사가 만들어질 동안 우리는 수많은 스타플레이어들과 함께했다. 필자는 바로 이 스타플레이어들을 독자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었다. 이 글을 시작으로 축구 역사에 남을만한 전설적인 선수들을 소개하는 '선수 보고서'를 연재하고자 한다. 독자들은 매 순간 필자의 글과 함께 전설적인 선수들의 활약상을 다시 한 번 느꼈으면 한다.... 기자말

프리미어 리그 첼시행이 가시화 되고 있는 미하엘 발락. 프리미어 리그 첼시행이 가시화 되고 있는 미하엘 발락.

미하엘 발락. ⓒ 바이에른 뮌헨

2012년 10월 2일, 동독이 낳은 최고의 스타플레이어 한 명이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 '전차군단의 사령관'이라고 불리는 이 선수의 이름은 바로 미하엘 발락(Michael Ballack)이다. 발락은 188cm의 큰 키에 어울리는 공중볼 장악 능력을 주무기로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패스, 수비, 활동량, 피지컬 등 다양한 무기를 소유한 발락은 2000년대 최고의 미드필더 중에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래 전, 독일 국가대표팀이 '녹슨 전차'라는 별명으로 슬럼프를 겪었을 때에도 발락은 혼자서 독일을 이끌었다. 덕분에 독일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준우승,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3위라는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미하엘 발락과 함께 했던 감독들은 그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발락은 수비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측면 미드필더 등 어느 포지션에서든지 활약할 수 있는 선수였다. 또한 전술 이해도가 높은 선수였기 때문에 그가 활약했던 팀들에서는 발락을 중심으로 전술이 만들어졌다. 만약 중앙 미드필더에 발락 한 명만 기용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혼자서 충분히 중원을 지배했을 것이다.

동독에서 태어난 축구천재

1976년 9월 26일, 미하엘 발락은 동독의 드레스덴 구 괴를리츠에서 태어났다. 2부 리그 출신의 축구 선수였던 그의 아버지 스테판 발락은 아들을 축구 선수로 키우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발락은 7살 때부터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하게 된다. 부모님의 노력으로 성장하게 된 발락은 19살이라는 나이에 FC 켐니츠와 프로 계약을 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프로 데뷔를 시작하게 된다.

사람들은 그의 플레이에 감탄했다. 마치 한 명의 장군이 그라운드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에 사람들은 발락을 독일의 전설적인 선수 프란츠 베켄바우어의 별명인 '황제(Kaiser)'에서 가져온 '작은 황제(Little Kaiser)'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1995년 8월 4일, 미하엘 발락은 Vfb 라이프치히와의 경기에서 데뷔 전을 치르지만 팀은 2-1 패배를 기록한다. 1995/96시즌 동안 발락은 총 15경기를 소화했다. 하지만 FC 켐니츠는 레기오날리가(독일 3부 리그)로 강등 당한다. FC 켐니츠는 상위리그 재진출을 위해 미하엘 발락을 1군으로 승격시킨다.

켐니츠의 주전 선수가 된 발락은 34경기에서 10골을 기록하는 활약을 보여준다. 하지만 FC 켐니츠가 승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렇게 미하엘 발락은 FC 켐니츠와 함께 조용히 잊히는 듯하였다. 하지만 발락을 위기에서 구한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오토 레하겔(Otto Rehhagel)이다. 당시 카이저슬라운테른의 감독이었던 레하겔은 발락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와 계약을 체결한다. 이렇게 미하엘 발락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게 된다.

분데스리가에 등장한 작은 황제

1997/98시즌, 카이저슬라운테른은 19승 11무 4패를 기록하면서 2위 바이에른 뮌헨과 승점 2점 차로 분데스리가 우승을 하게 된다. 미하엘 발락은 이 시즌에 16경기를 소화했다. 레하겔 감독은 발락을 주전 선수로 기용하기 시작했다. 다음 시즌인 1998/99시즌, 미하엘 발락은 35경기를 뛰는 동시에 카이저슬라운테른은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진출에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바이에른 뮌헨에게 패배하면서 결승전 진출에는 실패한다. 1999년 7월 1일, 발락은 430만 유로의 이적료로 차범근이 활약했던 바이어 레버쿠젠으로 이적하게 된다.

미하엘 발락의 진가는 바이어 레버쿠젠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레버쿠젠 감독이었던 크리스토퍼 다움, 클라우스 토프묄러는 미드필더로 활약하던 발락에게 공격적인 임무를 부여했다. 미하엘 발락은 날카로운 공격 능력을 보여주기 시작하면서 바이어 레버쿠젠의 중심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바이어 레버쿠젠에서 활약하는 동안 발락은 총 110경기 37골이라는 준수한 활약을 보여준다. 미하엘 발락은 더 이상 재능 있는 선수가 아닌 독일을 대표하는 선수로 성장했다.

동독에서 탄생한 캡틴

1999년 4월 28일,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에서 미하엘 발락은 디트마 하만과 교체 투입되어 경기장에 들어간다. 이 경기는 발락의 독일 국가대표팀 데뷔 전이었다. 이후 발락은 유로 2000 독일 국가대표팀 명단에도 이름을 올리게 된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발락은 이 대회에서 출전한 시간은 고작 63분에 불과했다. 독일 역시도 1무 2패의 성적으로 조 4위라는 처참한 성적으로 대회를 마감해야 했다. 독일의 전차가 녹슬기 시작했다. 녹슨 전차를 수리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바로 미하엘 발락이었다.

독일 국가대표팀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2001년 9월 1일에 있었던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독일은 1-5로 대패를 기록한다. 이에 '녹슨 전차'라는 별명이 생기면서 독일이 2002년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많았다.

하지만 독일에는 올리버 칸, 미하엘 발락이 있었다. 올리번 칸이 지키고 있는 골문은 독일이 준결승전에 진출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미하엘 발락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결승골을 넣으며 독일은 결승전 진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발락의 활약은 거기서 끝이었다. 이천수의 공격을 막다가 경고를 받은 발락은 경고 누적으로 결승전에 출전할 수 없었다. 결국 발락이 지켜보는 가운데 독일은 브라질에게 0-2로 패배하면서 준우승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루디 펠러 감독의 후임으로 위르겐 클라스만이 독일 대표 팀의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한다. 그리고 클리스만은 올리번 칸이 아닌 미하엘 발락을 독일 대표 팀의 새로운 주장으로 임명했다. 역사적인 일이 일어났다. 독일이 통일한 이후로 동독 출신의 축구선수가 독일 대표 팀의 주장이 된 것은 미하엘 발락이 처음이었다.

비록 유로 2004에서는 조 3위로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했지만, 발락의 지휘 아래 독일은 2006년 월드컵에서 3위, 유로 2008에서 준우승의 성적을 거두게 된다. 독일 국가대표팀에서 총 98경기 42골을 기록한 발락은 부상, 나이 문제로 2010년 월드컵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뮌헨, 첼시, 그리고 레버쿠젠

2002년 월드컵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여준 발락은 레알 마드리드와 바이에른 뮌헨에게 관심을 받았다. 오랜 고민 끝에 발락은 1250만 유로의 이적료로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게 된다. 02/03시즌에 발락은 38경기에서 15골을 기록했고, 바이에른 뮌헨은 승점 75점으로 분데스리가 정상에 올라선다. 아쉽게도 03/04시즌에는 베르더 브레멘에게 밀려 리그 2위를 기록한다. 하지만 다음 두 시즌 연속으로 분데스리가, DFB-포칼 컵에서 우승하면서 2년 연속으로 더블을 달성하게 된다. 4년간 157경기에서 62골을 기록한 발락은 바이에른 뮌헨에게 성공기를 가져다주었다.

이번 시즌 바이에른에서 첼시로 유니폼을 갈아입은 발락 이번 시즌 바이에른에서 첼시로 유니폼을 갈아입은 발락

첼시로 유니폼을 갈아입은 발락 ⓒ 첼시 공식 웹사이트


2006년 5월 15일, 미하엘 발락은 자유 계약으로 첼시로 이적하게 된다. 1년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레알 마드리드, AC밀란, 인테르나치오날레에게 관심을 받았지만 발락은 스탬포드 브릿지를 선택하게 된다. 발락은 첼시가 자신의 마지막 커리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첼시에서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발락은 뮌헨에서의 기량이 첼시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또한 본인과 전혀 다른 역할을 수행하게 되면서 좋은 활약을 보여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락은 포기하지 않았다. 거스 히딩크가 첼시의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하는 동시에 발락은 180도 달라지게 된다. 발락은 순식간에 첼시의 중심이 되었다. 첼시 역시도 발락의 활약에 힘입어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준결승전에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2010년, 발락은 주급을 깎아서라도 재계약을 하기를 원했지만 결국 첼시와 이별하게 된다.

2010년 6월 25일, 발락은 친정팀인 바이어 레버쿠젠과 2년 계약을 맺으면서 황혼기를 보내게 된다. 발락의 플레이에서는 더 이상 예전의 기량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발락의 존재만으로 정신적 지주가 된 레버쿠젠은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성공하게 된다. 그리고 11/12시즌, 미하엘 발락 혼자서는 바르셀로나를 상대할 수 없었다. 바르셀로나에게 패배한 레버쿠젠은 16강에서 대회를 마감해야만 했다. 이렇게 미하엘 발락의 시대가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화려했던 플레이 속 숨은 '준우승'

미하엘 발락은 축구 역사에 남을 만한 인물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승컵은 항상 그의 카리어에 오점을 남겼다. '준우승'이라는 수식어는 항상 발락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2001/02시즌, 바이어 레버쿠젠은 미하엘 발락의 활약 속에 분데스리가, UEFA 챔피언스리그, DFB-포칼 컵에서 모두 우승할 기회를 가진다. 하지만 운이 따라주질 않았다. 레버쿠젠은 눈앞에서 우승컵을 놓치면서 모두 준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분데스리가 우승을 놓친 바이어 레버쿠젠은 현재까지도 분데스리가에서 우승하지 못하고 있다.

2002년 월드컵에서도 그의 불행은 계속되었다. '녹슨 전차'라는 비판 속에서도 미하엘 발락은 올리버 칸과 함께 독일을 결승전에 진출시켰다. 특히, 대한민국과의 4강전에서 발락은 대한민국의 이운재 골키퍼를 제치고 결승골을 기록하게 된다. 하지만 발락은 결승전에서 뛸 수 없었다. 이천수에게 반칙을 하면서 경고를 받게 된다. 경고 누적이 된 발락은 결승전 출전이 좌절되었다. 결국 발락은 본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브라질이 월드컵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장면을 지켜봐야만 했다. 유로 2008 대회에서 다시 한 번 결승전 진출에 성공한다. 하지만 토레스의 결승골로 발락은 또다시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첼시에서도 준우승은 계속되었다. 06/07시즌, 발락은 첼시에서 프리미어리그 준우승을 기록하게 된다. 07/08시즌에는 전 시즌보다 더 심각했다. 첼시는 칼링컵, 프리미어리그,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할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또다시 모든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발락의 마지막 챔피언스리그 우승 기회도 그렇게 사라졌다. 축구에 만약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만약 미하엘 발락이 모든 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면 어떤 평가를 받았을지 생각하게 된다.

[수상]
분데스리가 : 1997/98, 2002/03, 2004/05, 2005/06
DFB-포칼 컵 : 2002/03, 2004/05
DFB-리가 포칼 컵 : 2004
프리미어리그 : 2009/10
FA 커뮤니티실드 : 2009
잉글랜드 리그 컵 : 2006/07
잉글랜드 FA 컵 : 2006/07, 2008/09, 2009/10

UEFA 클럽 올해의 미드필더 : 2002
UEFA 올해의 팀 : 2002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 2002, 2003, 2005
FIFA 월드컵 올스타팀 : 2002, 2006
FIFA 베스트 일레븐 : 2002
FIFA 100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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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발락 발락 HISTORY PLAYER 독일 김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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