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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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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부처님, 이름을 바꾸다, 아니 되찾다

2006년 8월 18일 깊은 밤, 팔공산 깊은 산속의 사찰 파계사 한편의 작은 건물 안에서 사람들의 숨죽인 듯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곁에만 가도 냄새가 진동하는 해우소의 창을 막아 달빛조차 들어오지 못하게 한 그 속에서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은 한 장의 필름, 아마도 고려 후기 또는 조선 전기쯤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한 보살상의 엑스레이 촬영의 결과물이었다.

사람들은 점차 선명하게 현상되는 엑스레이 필름을 보며 놀라움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사진으로 보이는 그것은 지금까지 모두가 알고 있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결정적으로 엑스레이가 투과된 형태로 나오는 불상의 외곽선은 이 불상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흔히 목조불상에서 두께감을 보이는 외곽선이 흰색으로 나타나지 않고, 누가 보아도 선명하게 가는 선이 여러 겹으로 겹쳐진 것으로 보였다. 삼베였다. 목조 불상이 아니라 여러 겹의 삼베로 모양을 잡고 그 위에 다시 여려 겹의 천을 옻칠을 해가며 덧붙이면서 만들어낸 건칠 불상이었던 것이다.

1989년 나라의 보물 제992호로 지정된 지 17년 만에 '파계사목조관음보살좌상'에서 '파계사건칠관음보살좌상'으로 그 이름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2001년부터 조계종 문화유산 발굴조사단과 문화재청이 진행한 전국 사찰 문화재 일제조사의 과정에서 거둔 성과였고, 예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비파괴 광학 조사가 가능했기 때문에 알 수 있게 된 사실이기도 했다.

파게사건칠관음보살좌상의 엑스레이사진
▲ 파계사건칠관음보살좌상의 엑스레이사진 파게사건칠관음보살좌상의 엑스레이사진
ⓒ 불교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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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장륙사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993호), 경주기림사건칠보살반가상(보물415호)과 같은 건칠불은 지금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아 그 존재만으로도 상당한 문화재적 가치를 가지는 불상인데, 그 조성 방법이 꽤 많은 공력과 까다로운 과정을 거친다.

간단하게는 삼베를 옻칠을 해서 여러 번 겹쳐 만든다고는 하지만, 기본 바탕 몸체가 되는 소조불이 먼저 만들어지고, 거기에 삼베를 한 겹 한 겹 덧대어 가면서 만드는 과정을 거친다. 삼베를 덧대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옻칠이며, 옻칠은 삼베와 삼베를 이어 붙이고 겹겹이 붙이는 역할을 주로 하지만, 거기에 더해 천과 천 사이의 틈을 메우고 미세한 두께감을 더하여 불상의 전체적인 볼륨감을 높이는 데에도 한몫을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불상은 세밀한 조각 작업을 거치고, 내부의 바탕이 된 소조불을 파낸 후, 채색이나 금칠을 하여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지난한 과정을 거쳐 완성된 건칠불인데 후손들이 그것도 모르고 꽤 오랜 시간 동안 목조불상으로 알고 있었다. 바꿔 말하면, 우리 조상님들의 불상 제작기술이 상상이상으로 뛰어났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렇게 2006년의 조사 과정을 통해서 파계사의 보살님은 '목조관음보살'에서 '건칠관음보살'로 이름을 바꿨으니, 엄밀하게 말하면 이름을 바꿨다기보다는 제대로 된 자기 이름을 찾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보살님의 뱃속에 숨겨진 이야기들

앞서의 이야기처럼 우리가 '그럴 것이다'라고 믿고 있는 많은 부분의 역사적 사실들은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현재로는 그렇다'라는 개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현재의 역사적 사실들은 언제나 그 사실관계의 새로운 정립에 있어 가변적이며, 그것은 시간의 흐름과 사회경제적 기반의 고도화와 과학기술의 발전 정도와 같은 수많은 요인에 따라 발견되거나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현재의 역사적 사실'은 사실관계가 좀 더 명확해진다거나 아니면 전혀 새로운 사실관계가 밝혀지기도 하고, 그런 결과들은 당대의 역사학과 고고학이 진일보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준다고 볼 수 있다. 파계사의 건칠 보살님은 적어도 이 두 가지 모두에 대한 이야기를 갖추고 있으니, 앞서의 이야기가 전혀 새로운 사실관계가 밝혀진 경우라면, 1979년 보살상을 개금(금칠을 새로 함) 과정에서 발견된 복장(조성된 불상의 배속에 사리나 불경 등을 넣는 일) 유물들에 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 파계사에 전해 내려오던 사실처럼 여겨지던 이야기들을 명확하게 역사적 사실로 만들어버린 경우라 볼 수 있다.

영조임금의 도포라 알려진 청사상의
▲ 영조임금의 청사상의(도포) 영조임금의 도포라 알려진 청사상의
ⓒ 파계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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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개금불사의 과정에서 보살상의 복장 유물의 존재가 확인되어 수습했는데, 전체적으로 16품목 75점에 이르는 양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복장 유물들이 단순히 불경이나 불상류의 전통적인 형태가 아니라 꽤 많은 이야기를 담은 다양한 유물들로 세상에 나왔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이한 것은 옹정(청의 연호, 경종 3년~영조 11년) 시절에 작성된 발원문 2점과 건륭(청의 연호, 영조 12년~정조 19년) 시절에 작성된 발원문 1점, 그리고, '청사상의'라 불리는 영조 임금의 도포의 발견은 승탑 구역의 사적비에 적혀진 대로 파계사가 이 절의 삼창주인 현응스님과 숙종대왕의 관계로부터 시작되어 영조와 정조를 거쳐 순종에 이르기까지 조선 후기 왕실의 후원을 받은 원찰이었음을 '역사적 사실'로 증명해주는 근거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 이 보살상은 또 다른 이야기도 간직하고 있었는데, 파계사가 왕실의 후원을 받는 원당 사찰로서의 지위가 조선 후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미 조선 초기부터 그런 지위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명문의 발견이었다. 특히 이 글자들은 불상에 직접 새겨져있는 1차 자료인지라 그 역사적 의미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파계사, 세종 왕실의 후원을 받다

파계사가 조선 초기부터 왕실의 후원을 받는 사찰이었음을 짐작케 해주는 명문은 건칠관음보살상의 밑바닥을 덮은 목판과 불상의 복장 내부에서 발견되었다. 먼저 밑바닥의 목판에 새겨진 명문은 그 대략적인 내용이 복장 유물에서 보이듯이 보살상을 정통(명의 연호, 세종 18년~세종 31년) 12년, 즉 1447년에 중수(일정 규모를 수리 함)하였다고 적혀 있어 결국 이 보살상의 조성연대가 대략 조선왕조시대의 개창 전, 후 정도로 추측해볼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복장 내부에 새겨진 명문인데, 이 명문에는 보살상의 중수에 공력을 얹은 대시주들의 명단이 적혀있는 것이다. 세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었는데, 영응대군 이염과 신빈 김씨, 그리고 영해군 이장이 그 주인공들이었다. 이렇게 구체적인 사람의 이름이 거명되면 문화유산에 숨겨진 뒷이야기를 밝혀내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파계사건칠보살상도 마찬가지인지라 이 세 사람의 이름이 세상에 나옴으로 해서 파계사가 조선시대에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그렇다면 왕실의 사람들이 분명한 이 세 사람은 누구였을까? 가장 먼저 등장하는 영응대군 이염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사이에서 태어난 여덟 명의 왕자 중 막내였다. 익히 알다시피 그의 맏형은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이었으며, 둘째 형은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였다. 글씨와 그림, 운율에 뛰어나 세종의 사랑을 받은 막내아들이었지만, 애석하게도 34살의 나이인 1467년에 요절했다. 1434년에 태어난 이염은 8살에 영흥대군에 봉해졌다가 1443년에 역양대군, 다시 1447년, 14살의 나이에 영응대군으로 바뀌었다.

'영약대군 이염을 영응대군으로 삼고, 한확을 판중추원사로, 박종우를 이조판서로, 김윤수를 함길도 도절제사로 삼았다.' - 세종실록 115권, 세종 29년 3월 10일 임신 1번째 기사(1447년, 명 정통 12년)

이염이 영응대군으로 봉해지는 해와 보살상을 수리하는 해는 1447년이었다. 그리고 그 보살상의 대시주의 첫 자리에 이염의 이름이 올랐다는 것은 이 보살상의 중수가 단순히 불상에 시주하는 의미를 넘어서 그가 영응대군으로 봉해진 것을 기념하는 의미가 함께 담겼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짐작을 더욱 확신으로 느끼게 해주는 존재가 바로 이염의 뒤를 대시주로 등장하는 신빈 김씨와 영해군 이장인 것이다.

신빈 김씨는 세종의 세 번째 빈으로 소헌왕후 심씨 다음으로 많은 왕자를 세종과의 사이에서 낳았다. 특히 신빈 김씨는 내자시의 공노비였다가 소헌왕후 심씨의 궁인으로 발탁된 후 세종의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된 경우였다. 실록의 기록에서는 천성이 부드럽고, 매사에 조심스러워 세종의 사랑은 물론이거니와 소헌왕후의 신뢰도 받았다 한다. 일례로 소헌왕후는 막내아들의 유모 역할을 그녀에게 부탁하기도 하였다.

'소의 김씨로 귀인을 삼았다. 애당초에 임금이 도승지 김돈에게 이르기를, "...... 천성이 부드럽고 아름다워 양궁을 섬기는 데 오직 근신함으로, 중궁이 매사를 위임하고 막내아들을 기르게 하였으니, 성품이 근신하지 않았다면 중구이 하필 소생 아들을 기르게 하였겠느냐....."' - 세종실록 84권, 세종 21년 1월 27일 병오 2번째 기사(1439년, 명 정통 4년)

영해군 이장은 신빈 김씨가 낳은 여섯 명의 왕자 중, 5번째로 그 출생이 1435년으로 앞에 등장한 영응대군 이염과는 한 살 터울의 이복형제 간이었다. 하지만, 소헌왕후의 신뢰로 신빈 김씨의 품에서 자란 영응대군과 이복형제 간이었지만 한 어머니의 품에서 함께 자란 영해군 이장은 꽤나 돈독한 사이였을 것이며, 이런 세 사람의 인연이 바로 관음보살의 품으로 들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즉, 1447년에 이루어진 파계사관음보살상의 중수는 신빈의 영응대군에 대한 무한한 애정의 표현이었으며, 대군으로 봉해진 축하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관음보살, 현세의 안녕 바라는 간절한 기원의 대상

파계사건칠관음보살좌상 / 보물 제992호
▲ 파계사건칠관음보살좌상 파계사건칠관음보살좌상 / 보물 제9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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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사 원통전 내부
▲ 파계사 원통전 내부 불단 전체 파계사 원통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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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대승불교의 여러 보살 중에서도 한반도의 민중에게 유독 사랑을 받아 사찰의 중심불로 따로 모셔지기도 했던 세 분의 보살이 있었는데, 지옥을 관장하는 지장보살, 먼 미래에 인간 세상을 구원할 미륵보살, 그리고 현세의 중생을 구원하는 관음보살이 그들이었다.

이렇듯 관음보살은 광범위한 기원의 대상이기도 했으며, 오히려 어떤 시점에서는 귀천에 관계없이 노소에 관계없이 숱한 민초들의 기도를 들었던 보살님이었다. 특히 관음보살은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으로 인간세계를 살피고 보살핀다 하여 천안 천수관음보살의 형태로도 많이 조성되었지만, 복잡한 모습 없이 온화하게 불단에 자리 잡고 중생들의 기도를 들어주는 모습으로도 많이 조성되었다.

또한 관음보살은 중생의 고통에 따라 그 기원에 맞추어 모습을 드러내는 응신불이었기에 다양한 모습으로 많이 제작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어쩌면 그런 관음보살의 모습이 왕자의 무탈함과 행복한 성장을 바라는 신빈 김씨의 기원에 맞아떨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화려한 보관과 비록 천안 천수를 표현하지 않았지만, 근엄함을 잃지 않은 얼굴 모습, 다소곳이 들어 올린 수인은 그 앞에 서서 바라보고 있으면 절로 정성을 내어 기도하고 싶은 절로 일게 한다.

다만, 문화재를 보호하겠다는 마음이 앞서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아름답고 근엄한 모습으로 원통전의 불전을 홀로 지켜내고 있는 관음보살상이 답답한 유리함 속에 들어앉아 있다는 것은 왠지 모르게 처연하고 오늘날의 눈으로 관음보살의 진정한 모습을 가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보호한다는 것이, 전해내려주는 것이 그저 막아서고, 차단하고, 분리하는 것만으로 생각되는 요즘 사람들의 머릿속을 보는 것 같아 착잡한 마음만 들 뿐이다.

덧붙이는 글 | 본 글은 기자의 블로그 '바람길닷컴'(baramgil.com)에 함께 게재됩니다.



태그:#팔공산 파계사, #파계사건칠관음보살좌상, #파계사건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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