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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뉴 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압승한 버니 샌더스 민주당 대선경선후보
 지난 9일, 뉴 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압승한 버니 샌더스 민주당 대선경선후보
ⓒ 연합뉴스/E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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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오바마케어 가입을 거부했더니 올해 600달러(한화로 약 74만 원)가 넘는 벌금이 연말 세금 환급에서 공제됐어요. 올해는 연소득의 2%가 벌금이 될 거라고 합니다. 제 소득은 빠듯한데 의료보험 보조금도 받지 못해요. 저는 오바마케어의 불공정한 보험료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지난 2월 초, 버니 샌더스를 지지하는 뉴욕시 퀸즈 모임에 참석했을 때, 한 지역 주민이 했던 발언이다. '버니 샌더스의 혁명을 어떻게 승리로 이끌까?'란 주제 아래 모인 지지자들은 자유롭게 일어나 의견을 말했다.

주민들의 입에서는 화끈한 정치 전략보다 작금의 현실에 대한 개인적 소견들이 쏟아졌다.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뉴욕 지하철 시스템부터 월스트리트의 자본 독식까지 다양한 화제들이 등장했으나 주요한 불만은 역시 '오버머케어(O, Bummer Care 오, 실망스런 보험)'란 별명이 붙은 오바마케어에 대한 것이었다.

버니 샌더스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선 현재 오바마케어에 대한 상황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오바마케어는 전국민이 건강상태와 상관없이 고르게 민간 보험회사와 계약할 수 있도록 도왔다. 건강검진은 무료였고 출산을 위한 혜택도 확대됐다. 아프면 국민의료보험을 들고 의사를 찾는 걸 당연시했던 한국계 이민자인 나는 두 손 들어 오바마케어를 지지했다.

소득이 적었으므로 정부보조금을 받을 수 있어 한달 보험료는 2인 기준 50달러(약 6만 원)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보험회사들은 담합하여 보험료를 매년 올렸고 개인이 온전히 부담해야하는 초기 진료 부담금('디덕터블 Deductible'이라고 한다)도 급격히 높아졌다.

더군다나 올해 우리 집안 소득이 늘어나는 바람에 정부보조금 범위에서 벗어났다. 보험료가 600달러로 뛰었다. 거기에 학자금 대출 상환도 시작되어 부담이 더 커졌다.

샌더스의 '사이다' 공약

우리 집만 그럴까? 사회에 진입해 막 자리를 잡고 있는 198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 출생자들, 소위 '밀레니얼(Millennial)'이라 부르는 세대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젊고 건강하고 바쁜 이 젊은이들은 딱히 의사를 볼 일도 없을 것 같아 오바마케어에 가입하기보다 벌금을 내곤 했다.

시행 첫해 개인당 95달러(약 11만 원)였던 벌금은 작년에 325달러(약 40만 원)로 올랐고 올해는 695달러(약 85만 원)가 되었다. 보험회사들의 횡포로 직장 보험 가격도 뛰어서 피고용인 부담이 높아졌다.

반면 65세 이상이 되면 정부가 보조해주는 메디케어 보험으로 거의 무료이거나 저렴하게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정부에 돈을 내는 이와 혜택을 받는 이가 다르다는 생각에 밀레니얼들은 이 구조를 '세대 강탈' 정도로 여기고 있다.

이런 시점에 버니 샌더스가 공약으로 '정부가 관리하는 의료 보험, 모두를 위한 메디케어(Single Payer System, Medicare for all)'을 들고 나와 북유럽식 사회주의를 미국에 이식하겠다고 했을 때 젊은이들이 환호를 하는 게 당연해 보인다.


그가 내놓은 또 하나의 '사이다' 공약은 '대학 등록금 무료'다. 비록 정부에서 운영하는 대학으로 한정했지만, 학자금 대출의 늪에 빠져있는 젊은이들에게 정부 차원에서 이 학비 대란이 해결 가능하다는 실마리를 안겨주었다.

오바마 대통령의 집권 기간 동안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은 성실한 부모들이 금융위기로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아왔고, 고금리 학자금 대출이 입학의 필수조건이었으며, 의료보험 의무 가입이라는 (미국인으로서는) 생경한 체계에 적응해야만 했다.

더불어 이 세대는 디지털 문화 속에서 자랐고 과거 어떤 세대보다도 열린 사고를 가지고 있다. 때문인지 사회주의 개념에 대해서도 긍정적이다. 온라인 투표 사인트인 유거브(Yougov.com)의 지난해 5월 투표에 의하면, 65세의 75%가 사회주의란 단어에 비우호적인데 반해 18세부터 29세 사이 젊은이들 중 과반수 이상이 사회주의란 단어에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노년들에게 사회주의는 공산주의 이전 단계(!)나 좌파로 여겨지지만, 젊은이들은 사회주의라고 하면 정부가 의료와 교육을 책임지고, 시민들은 쾌적하게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북유럽 어느 도시를 떠올린다.

그리고 자칭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가 등장했다. 미국 젊은이들은 정부가 마땅히 행해야 할 공적 지원을 기업에게 넘겨버린 '주식회사 아메리카'에 분노하며, 샌더스의 '미국 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혁명 선언에 열광하고 있다. 이들은 샌더스의 주장에 대해 '버닝'하는 현상을 두고 '필 더 번(Feel the Bern)'이란 유행어도 만들어냈다.

구조를 바꾸려는 서민들 vs. 구조를 더 강화시키려는 부자들

버니 샌더스가 미국 코미디 프로그램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 출연하자 방송국 앞에서 지지 응원을 보내는 밀레니얼 세대 지지자들. 출처 : Millennials for Bernie facebook
 버니 샌더스가 미국 코미디 프로그램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 출연하자 방송국 앞에서 지지 응원을 보내는 밀레니얼 세대 지지자들. 출처 : Millennials for Bernie facebook
ⓒ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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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40년 넘게 시민 사회의 인권과 정의를 위해 싸워온 정치인 버니 샌더스에 대한 열광적 지지의 이면에는 현재 미국의 경제 구조에 지치고 질린 젊은이들이 존재한다. 해시태그를 붙인 #FeelTheBern과 샌더스의 어록으로 만든 '짤방'들이 소셜 네트워크를 뒤덮은 지 오래다.

여기에 '오큐파이 월스트리트(Occupy Wall Street)'나 '블랙 라이프 매터즈(Black Life Matters)' 등의 운동을 이끄는 조직들이 연대해 오프라인 조직력과 행동력을 강화한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페미니스트 민주당원들의 세대 분열이다. 여성의 성취를 대표하는 클린턴을 지지하는 엄마 세대와 샌더스를 지지하는 딸 세대가 연일 미디어에서 논쟁을 벌이고 있다.

'경제 체제를 바꾸자'는 급진적인 공약에 대한 젊은 층의 지지에 힘입어 버니 샌더스는 후보 지명이 확실했던 힐러리 클린턴을 계속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20일, 네바다주 당원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승리를 거두며 공화당 후보 자리를 굳혔을 때, 젊은 민주당원들은 이 선거 무대에 샌더스와 클린턴만 존재하는 게 아님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한 친구는 '미국 선거가 리얼리티 쇼가 되어가고 있다'는 우려의 멘트를 페이스북에 남겼다.

네바다에서는 클린턴이 4%P 차이로 샌더스를 이겼고, 그날 우연히 함께 있었던 헤지펀드 브로커는 클린턴의 승리를 기념하며 하이파이브를 날렸다. 그리고 문득 샌더스 지지 모임에서 들었던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버니 샌더스와 도널드 트럼프가 후보가 된다는 건 현재 미국 사회의 양극단을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구조를 바꾸고자 하는 서민들이 있고 구조를 더 강화시키고자 하는 부자들이 있는 거죠."

그리고 그 사이에 월스트리트와 의료보험 양쪽의 지지를 받고 있는 신자유주의 전문가 힐러리 클린턴이 있다. 극단적인 후보보다는 안정된 계획과 네트워킹으로 미국을 꾸려나갈 클린턴이 여전히 대중적 소구력이 크다. 트럼프를 막기 위해 민주당원들이 클린턴 아래로 집결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힐러리와 샌더스 중 누가 도널드 트럼프와 싸우게 될 것인가? 과연 샌더스는 미국인들은 '당신 해고야(You're fired!)'를 서슴없이 외치는 자본주의의 상징 트럼프를 무너뜨릴 사회주의 영웅이 될 수 있을까?

당락은 불분명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보인다. 샌더스를 지지하며 행동하는 민주주의를 배우고 있는 젊은이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들은 미국 민주주의에 대해 근본부터 따지며 정치인들과 함께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고 있다. 부디 미국의 미래가 젊은이들에 의해 바뀌길 빌어본다.


태그:#버니 샌더스, #샌더스, #미국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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