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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먹이사슬 구조로 지탱되는 한국 사회에서 오디션은 일종의 '별난' 구원책으로서 기능해오고 있다. 그곳은 또 하나의 경쟁터인 동시에 일상의 무한경쟁에서 잠시 해방감을 맛볼 수 있는 이중적인 공간이다. 숱한 관련 프로그램들이 연이어 제작되는 와중에 그 병폐를 진단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하지만 오디션 프로그램의 기세는 쉽게 사드라들리 만무하다.

단 몇분이라도 매스미디어에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자 오디션 현장에는 수천에서 많게는 수만명의 지원자들이 북새통처럼 몰려드는 형국이고, 심사위원들 앞에서 자신이 보유한 재능을 마음껏 드러내며 한 단계라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자 필사적인 힘을 자아낸다. 성공을 위해서 성형은 최후의 수단이 아닌 기본적인 예비 과정으로 사전에 시행되는 묘한 '오디션 문화'가 바로 이 땅에서 절찬리에 상영되고 있다.

차지량 작가
 차지량 작가
ⓒ 스토리온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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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러한 오디션의 일반적인 현상도 국내에서 최초로 방영된, 한국 현대미술을 알리는 <아트 스타 코리아>에서는 예외로 빗나간다. <아트 스타 코리아> (이하 아스코)는 첫 방영분에서 참가자들에게 미술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대중들의 고정관념을 깨라는 미션을 내렸다. 그리고 일련의 과정에서 최후의 13인에 든 차지량 작가는 자신을 탈락시켜 달라는 파격적인 발언을 하며 오디션 사상 초유의 사고를 저질렀다.

차지량은 미디어 퍼포먼스를 통해 CJ라는 거대 자본의 신진 예술가 발굴 오디션 조항들에 합의할 수 없으며 이 합숙 구조의 바깥으로 나가서 참가자들과 만나고 싶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차지량은 당당히 최종 우승후보 3인에 드는 역결과를 통지받았으며 이는 작가로서 퍼포먼스에 실패해다는 수모를 체감하게 만들었다. 심사위원과 제작진은 그의 도전이 제도권 내에서 얼마든지 실천가능한 하나의 패기로서 포섭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후 첫회 방송분이 방영되고 나서 차지량은 그의 SNS에 CJ와의 계약서를 공개해버리는 초강수를 뒀다. 그 내용 중에는 첨예한 논쟁을 부를 여러 조항들이 삽입되어 있었는데, 이를테면 참가자들에게 출연료 대신 재료비가 일괄 지급되며, 제작된 작품은 전속 CJ에 귀속된다는 등의 빼곡한 항목들이 담겨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를 어길시엔 프로그램 제작비에 맞먹는 고액의 소송이 제기될 것을 명시하는 경고 문구가 차갑게 나열되어 있었다. 차지량은 예술을 하는 작가로서 이처럼 거대해진 물질적 욕구가 지배하는 천민 문화자본에 하나의 강렬한 '어퍼컷'을 날리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올바른 문화적 규범을 선례로서 확립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규정과 법칙이 엄연히 존재하는 오디션 현장에서 이러한 도발적인 행동은 자칫 다른 참가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 수 있다. 또한 모두가 올라서기 위해서 혈안인 오디션 현장에서 탈락을 직접적으로 자처하는 사례 역시 전무했다.

물론 이러한 돌발적 사고가 가능한 것은 그것이 기존 제도의 전복과 대항 그리고 패러다임의 전환에 큰 가치를 두는 현대미술과 오디션 프로그램의 절묘한 조합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기이한 궁합 덕분에 시청자들은 '혁명'조차 팔릴 수 있는 상품으로 전환해내는 현대자본사회의 포섭논리 방식을 생생히 목격할 수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예술의 참 가치는 주어진 제도 안에서 좋은 작품을 제작하는데 국한되지 않는다. 역사에 이름을 당당히 남긴 작가들은 모두 기존의 틀을 깨며 패러다임의 전환을 초래했기에 예술의 참가치를 획득할 수 있었다. 살롱전에서 낙선한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그랬고, 독립미술가협회에서 매몰차게 거부당한 뒤샹의 <샘>이 그랬다.

아스코에서도 우리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차지량이 탈락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은 영상물 '사이즈'가 4분33초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작가 자신이 존 케이지의 <4분 33초>를 채용함으로써 기존의 판을 뒤엎기 위한 메시지를 함축하려는 의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심화된 공고한 권력체제 역시 가만히 앉은 채 언제나 아방가르드한 저항 방식으로부터 역공을 당하지 않는다. 일련의 과정 하에 성장한 신자본주의는 그 체제에 도전하는 '혁명'조차도 제도 내로 흡수하여 잘 팔리는 상품으로 재포장하는 기술능력을 습득하기 시작한 것이다.

크리스토퍼 그루넨버그는 미국이 잭슨 폴록의 추상표현주의 그림들을 냉전의 경쟁체제에 적절하게 응용했다고 기술한다. 미정부로서는 표현의 자유가 없는 사회주의와 달리 자본주의로 결집된 국가들에 사는 예술가들이 더욱 많은 지적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정치적 메시지를 은연 중에 선전해야만 했고, 폴록의 그림은 강대국 간에 벌어지는 헤게모니의 국지전에서 첨병대와 같은 역할을 충실히 도맡은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혹자는 같은 논리를 차지량 작가에게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CJ기업이란 문화자본을 발판삼아서 신진작가로서의 성공을 획득하려 했다는 불편함이다. 애초에 계약서 조항들에 부조리를 느꼈다면 참가를 거부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관계로 작가로서의 이슈화를 담보로 제도권을 역이용했다는 비판 역시 제기될 수 있다. 물론 차지량 본인으로서는 이미 작가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다져나가던 상황이었지만 시청자들은 이를 알 까닭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스코 제작진과 차지량 작가는 다름아닌 적대적 공생관계라는 신 항목을 계약서에 날인한 모양새가 된다.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권력 집단으로 화자되는 CJ로서도 차지량의 도전을 제도권에 포섭하는 아량을 베품으로써 자사의 상징적인 문화적 자본을 널리 선전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미국 정부가 잭슨 폴록의 페인팅을 체제 선전에 활용했듯이 말이다. 차지량은 계약서를 공개할 수 없다는 내부 규정을 위반함으로써 내심 CJ기업이 소송 절차를 밟기를 기대하는 입장이겠으나 (그것이 작가로서 이슈화에 더욱 유리한 까닭에) 상대의 계산 수도 만만할리가 없다. 물론 CJ입장에서도 소송을 거는 시늉을 하며 이 젊은 작가와 '정치적 공생관계'를 적극적으로 맺을 수 있을테고 일련의 과정에서 시청률은 더욱 담보될 것이다.

허나 <일시적 기업> 등의 작품으로 기존 권력체제에 강한 도전의 자세를 보인 차지량은 작금의 흘러가는 사태가 마냥 편할 리 없다. 작가의 의도와는 다르게 CJ와의 계약서 공개는 어떠한 파문도 낳지 못하고 있으며 이슈화에서 점점 거리가 멀어져가고 있으니 진정 그에게 도래한 첫 위기 사례로 진단할 수 있다.

더군다나 그의 행보는 아스코의 방영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현재진행중이라는 점에서 더욱 위태롭다. 이 당찬 퍼포먼스가, 역으로 포섭된 자본과 매스미디어의 프레임에서 어떤 미학적 방식을 구현하여 도망갈 수 있으며, 앞으로 어떠한 작업을 드러낼지 지켜보는 것이 이제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가 기억해야 할 것은 거대자본권력 역시 매우 넓은 아량을 보유하며 때때로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데 있다. 그렇기에 차지량이 의도한 것처럼 아스코가 쉽게 '고립된 시스템'으로 전락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차지량 작가는 "재료는 경쟁의 도구일까, 논쟁의 도구일까" 라는 유효한 질문을 영상의 포문에서 던졌으나, 거대 방송국에게 있어서 재료란 단지 포섭의 도구일 수도 있는 까닭이다. 이 재료를 둘러싼 이해집단들의 각기 다른 정치적 수 속에서 아스코를 시청하는 재미는 보다 다채로워질 것이다.

또한 올바른 문화예술의 가치를 정립하고 선점하기 위한 차지량 작가와 CJ제작진과의 치열한 헤게모니 다툼도 더욱 흥미진진해질 것이고, 그 사이에서 저마다의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다른 신진 작가들의 도발도 보다 강력해지며 프로그램의 재미가 배가될 것이다.


태그:#아트스타코리아, #아스코 차지량, #차지량 , #차지량 탈락 요청, #오디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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