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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비싼 외식보다는 집에서 만든 슬로푸드가 각광을 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물질적 부(富)가 아닌 삶의 질이라고 했다. 생식이니 선식이니 '웰빙(Well-being)'을 위해서는 밥상도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또 값을 좀 더 치르더라도 유기농 농산물을 사야 한다고 했다.

조금 지나니 공감과 위로의 가치가 주목받는 시절이 왔다. 건강보다 정신적 빈곤이 시급하다고 했다. 나침반의 침이 흔들리는 것은 그것이 옳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음을 뜻한다고 했다. 우리의 흔들림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했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했던 무한 긍정의 시절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말들 속에서 '힐링(Healing)'을 했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그의 저서 <행복론>에서 이야기한다.

"우리의 행복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명랑한 마음이고, 명랑함에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은 '건강'과 '내적 풍요'다."

건강과 내적 풍요를 향한 욕구가 표면화됐던 것이 바로 웰빙과 힐링이었다. 그러니까 웰빙과 힐링은 같은 뿌리에서 자란 배다른 형제였던 셈이다. 그리고 그 뿌리에는 행복이 있었다.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구체화되었을 뿐 행복은 우리 시대의 가장 끈질기고 일관된 소망이었다.

바야흐로 웰빙과 힐링의 시절을 보낸 우리 사회는 이제 '행복의 시절'에 이르렀다. 지난해 대표적인 힐링 저서인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밀어낸 것이 프랑수아 를로르의 <꾸뻬 씨의 행복 여행>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또,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첫 국정연설에서 국민들에게 '국민 행복 시대'를 약속했다. 경제민주화 법안도 8건이나 통과시키면서 의지를 보였다. 코레일은 최근 KTX 개통 10주년을 맞은 성명에서 국민들을 더 행복하게 하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노동자 수천 명을 직위해제해 '안녕들하십니까' 열풍을 일으켰던 주범으로서는 조금 낯간지러운 수사로 여겨지지만 말이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에 대한 공감대가 높게 조성되어 있는 시기다.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그리고 웰빙과 힐링의 시절을 보냈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불행하다고들 말한다. 왜일까? 2012년에는 1인당 국민소득도 2만불이 넘었고 사실 모두들 웬만큼은 사는 셈인데.

그래서인지 행복 담론은 곧잘 개인의 문제로 귀결되는 듯하다. 당연한 일이다. 행복은 개인이 향유하는 것이고, 따라서 개인에게서 비롯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행복하게도 하고 불행하게도 하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우리의 견해다."

쇼펜하우어의 말이다.

"행복은 우리가 합목적적으로 추구하는 것이지 부나 명예와 같이 우연적인 요소들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스스로 세운 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그것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하라."

칸트의 말이다.

그런데 어딘가 석연찮은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 맞는 말이기는 한데, 매우 찜찜하다. 한국의 자살률이 OECD 국가들 중 1위라는 사실은 이제 당연한 사실이 됐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한다.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다 생활고에 못 이겨, 자녀와 돈 문제로 다투다가 술을 마시고, 혹은 이성에게 선택받지 못한 데 대한 자격지심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그렇다면 이제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텐가. 이런 사람들을 두고 그건 네 탓이라고, 네가 불행한 건 네가 똑똑하게 굴지 않아서라고 누가 말할 셈인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너무 몰인정한 것이 아닌가?

행복은 개인의 자존감과 연관되어 있는 문제다. 높은 자존감은 행복과 근친 관계다. 그러나 자존감은 기질적인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자존감을 높이고, 누군가는 아무리 노력해도 너무나 쉬이 낮은 자존감에 매몰당한다. 이에 대해서는 쇼펜하우어도 인정하는 것 같다.

"주관적인 것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신의 권한에 속하기에 일평생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각자의 개성에 맞는 도야에 힘써야 한다고 말하지만, "멍청이는 결국 멍청이로 남는다"고도 말한다. 사실이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을 개인의 문제로만 국한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말할 수 없다.

사실 문제를 개인에게로 환원하는 것은 사회가 개인을 기만하는 오랜 방식이었다. 부분과 전체는 따로가 아닌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 영화 <관상(2013)>에서 내경(송강호)은 아들(이종석)의 죽음을 막지 못한다. 그가 개인의 상만 보았지 시대의 상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경은 한명회(김의성)에게 말한다.

"그대들이 아니었더라도 수양의 반정은 성공했을 것이오."

그는 개인에게 작용하는 시대의 기만을 말한 것이다.

마찬가지다. 외모지상주의, 스펙 등으로 평가받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자존감이 길러질 수 있겠는가. 모두가 똑같은 무언가를 소망하며 몰개성화되나 모두가 그 기준을 충족할 수는 없으므로 대부분 불행해진다. 그러고 나면 자신이 아닌 자신을 보면서, 낮을 대로 낮아진 자존감을 끌어안고 살아갈 밖에 도리가 없다.

지난 시대의 거울을 들어 현 시대의 화상(畫像)을 본다. 아테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민주적으로 죽였다. 소크라테스의 논리학이, 상황에 맞춰 임시방편으로 논지를 바꾸는 데 익숙한 소피스트들에게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민주주의에는 철학이 없었고, 바로 그 이유로 아테네는 망했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정치도 개인을 그저 관리하는 데 그친다. 개인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명분 아래 개인에게 철학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향점 없는 정치는 그렇게 표류할 수밖에 없다.

'철학 없음'의 빈자리는 '효율성'이라는 자연 상태가 들어와 메웠다. 효율성은 그 자신을 위하여 모든 것을 수치화하고 계량화한다. 그리고 그것에 따라 평가를 내린다.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은 그렇게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는 개인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는 없지만 최대한 불행하지 않도록 만들어줄 수는 있다. 그것이 행복에 대한 사회적 책무가 아닐까? 사회가 개인을 거기까지는 끌고 와야, 그 다음 개인에게도 뭔가를 요구할 수 있다. 행복의 시대를 맞아 행복을 생각한다. 우리는 웰빙으로도, 힐링으로도 안 되니 좀 더 노골적으로 행복 자체를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만큼 절박한 것이다. 그런데 어제나 저제나 눈 막고 귀 막고 행복 담론을 주도하는 이들은 '행복은 개인에게 달린 것이요, 행복은 개인에게 달린 것이요'를 되새긴다. 그렇다고 한들 행복이 찾아질 리 없다. 고개를 들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쳇바퀴에서 내려올 때다.


태그:#행복, #힐링, #웰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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