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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훈련 통지서가 나오고 오랜만에 총을 잡은 200여 명의 유예된 예비군들은 한 공간에 모여 스크린을 본다. 군가가 흘러나오는 뮤직비디오엔 무언가에 사로잡힌 젊은이들이 나오고, 간혹 국적을 알 수 없는 군인들의 전쟁 장면이 잡힌다.

그 고무된 화면과 달리 200여 명의 뒤통수는 피곤한 기색이 또렷하다. 뒤이어 나오는 우리 '주적'의 모습. 거부할 수 없는 국가의 부름은 봄이라는 계절을 빗겨가고, 일방향이다. 이 계절에도 그 주적이 동해안에 떨어뜨린 수십 발의 미사일엔 이 땅에 사는 개인들에 대한 고려는 없을 것이다.

미간에 주름이 생기다가도 피식하는 이상한 순간

전병길 지음/책마루 펴냄(2014)
▲ <공동관람구역> 표지 전병길 지음/책마루 펴냄(2014)
ⓒ 책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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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공동관람구역>은 그 계절과 개인들에 관한 책이다. 분단과 통일이란 말은 어느새 촌스러운 말이 됐다. 이는 반세기 동안 쓴 오래된 말이라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오래 쓰다 보니 말도 낡는다.

또 한편으로 우리 사회는 그 주적을 바라보다가 해리성 인격 장애를 앓게 됐는지도 모른다. 같은 땅에서 같은 언어를 쓰는 심지어 가족인 그들을 생각하며 어떤 정념에 사로잡히기라도 할 즈음, 미사일이란 실시간 검색어를 보고 뒤통수가 피곤해지는 것이다.

그 순환과 반복. 이 피곤함에 '영화로 통일을 읽다'는 이 책은 과연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배경이 되는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5년 전인 1945년,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진영과 소련을 위시한 공산진영은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 국민들은 분단에 대한 걱정보다는 일본이 패망한 후 독립된 새로운 나라가 세워진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는 것이 큰 문제가 되는 줄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가 달랐고 좌익과 우익,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들의 생각은 달랐다. 순진한 국민들은 좌익과 우익 사이 노선을 확실히 할 것을 요구받았으며, 이전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선동적인 정치문구를 접하기 시작했다. (<공동관람구역>, 23~25p)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돼 있다. '응어리진 상처 한국전쟁', '끝나지 않은 전쟁', '경계를 넘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다'. 각 장별로 8~9편의 분단영화를 분석한다. 아니 여기서 영화는 분석의 대상이라기 보단, 하나의 화제에 가깝다. 먼저 영화가 주어지고 저자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형식이다.

6·25 한국전쟁, 간첩, 빨치산, 핵, 외교, 탈북, 가족, 연애사. 분단을 소재로 한 한국영화는 우리처럼 다양한 인격을 가졌다. 때문에 책을 읽다보면 미간의 주름이 생기다가도 피식하는 이상한 순간을 경험한다.

흥신소 직원이 된 제임스 본드

1장 '응어리진 상처 한국전쟁'에서 저자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두 형제의 표정을 언급한다. 한국전쟁, 그 이면엔 수많은 개인들의 비극. 책은 제주 4·3, 빨치산, 학도병, 노근리 마을의 기억과 증언을 생생히 전한다.

2장 '끝나지 않은 전쟁'은 간첩과 비밀요원들이 화제로 돼 있다. 한국전쟁 이후, 단단한 세계 냉전구도는 점차 계절이 바뀌어 갔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추웠다. 북은 젊은이들을 청와대 코앞까지 침투시켰고, 남은 실미도란 섬에서 젊은이들을 훈련시켰다.

저자는 이들에게 나라와 조국은 어떤 의미였는지 물으며, 비전향 장기수 김선명의 '선택'과 함께 볼테르의 똘레랑스를 되새긴다.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으로 이어져 오면서 국가 정보기관에 의해 부분적으로 자행된 인권유린, 용공 조작, 국기문란 행위에 대한 일종의 불신과 공포심을 갖고 있다. 정보기관에 대해 바라는 바는 '제임스 본드'이지만 실상의 이미지는 '댓글 알바'와 '흥신소 직원'이다.

국가정보기관이 부정적인 이미지로 많이 덧칠이 돼 있지만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주어진 사명과 본분에 충실하며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정보요원들이 있다. 서울 내곡동 국가정보원 안보전시관 한 쪽에는 '조국을 위해 헌신한 순직 국가정보원 요원들을 추모하며'라는 제목 밑에 순직한 직원의 숫자만큼 별을 새긴 돌이 있다. 이들은 음지의 전사자이기에 죽고 나서도 이름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저 별 하나로 존재를 나타낼 뿐이다. (같은 책, 134-135p)

3장 '경계를 넘다', 4장 '절망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다'에선 금기와 그 금기를 넘는 상상력, 희망을 이야기한다. '통일을 읽다'라는 카피는 분명 텍스트에 관한 것이고, 그 문장 안엔 의지가 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를 불러도 거리가 먼, 통일은 지구력의 문제가 돼버린 것 같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그것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 시작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 기약엔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이 있다.

인민군과 국군, 연합군이 흘러들고 서로 다른 군복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팽팽한 긴장감 속에 대치되어 총부리를 겨누어야 했다. 동막골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의아하게 바라볼 뿐이다. 수류탄 꼭지가 가락지인 줄 알고 뽑아든 여일 때문에 얼결에 날아간 수류탄은 옥수수 창고로 떨어진다.

그 순간 "팡" 하고 팝콘들이 날아온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그간의 긴장과 불안이 일순간 해소되며 팝콘은 눈처럼 내린다. 과학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수류탄 팝콘은 상상의 샘을 자극하며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영화 <웰컴투 동막골>이 가진 힘과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바로 현실과 전혀 다른 세상을 꿈꾸는 상상력의 힘 말이다. (같은 책, 215p)

담론과 현실의 거리감, 그 사이를 관통하는 것은 역시 개인의 역사다. '공동관람구역은 혼자가 아닌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영화를 보고 생각을 나누는 감성과 이성의 공간을 의미한다'란 저자의 명명은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운다'는 예비군 표어와 같은 일상이 아닌, 관객으로 돌아가자는 말이기도 하다. 피곤한 뒤통수를 하고 군 뮤직비디오를 언제까지 봐야할까. 그러다 단 하나의 은유, 그 계절을 기다려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공동관람구역> 전병길 지음/책마루 펴냄(2014.2.25.). 282쪽. 13,800원.



공동관람구역 - 영화로 통일을 읽다

전병길 지음, 책마루(2014)


태그:#공동관람구역, #전병길, #책마루, #통일, #남북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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