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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멋진 날, 당연한 결혼식이 열렸다. 9월 7일, 국내 첫 공개 동성결혼식이었다. 이 날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동성결혼 그 자체도, 기독교 단체의 만행도 아니었다. 바로 위와 같은 문구로 전국기혼자협회에서 내건 플래카드였다. 참으로 발칙하고도 참신한 응원구호가 아닐 수 없다. 동성연인들에게 지옥을 선물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굳이 결혼이어야만 하는가

그간 동성결합과 관련한 수많은 논의가 있었다. 이미 동성결혼을 법적으로 허용한 나라는 14개국이 되었다. 여기에서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이 있다. '왜 굳이 결혼이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시민연대계약(PACS)' 제도나 네덜란드의 '동반자 등록(registered partnership)' 제도와 같은 새로운 논의가 가능하다는 주장도 있다. 1999년에 프랑스에서 도입한 시민연대계약은 세금과 사회보장 등에서 법률혼과 같은 수준의 혜택을 제공한다. 네덜란드에서는 그보다도 먼저 1995년에 '동반자 등록'을 통해 사실상의 동성결혼을 인정했다.

이처럼 동성 간의 '결혼'이 아닌 '결합'의 측면에서 해결을 시작할 수도 있다. 반드시 결혼이라는 기존의 제도를 고집하지 않고, 동성결합에 대한 논의를 시작으로 해서 점차 의식과 제도를 바꿔나가는 방법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지, 혼인 자체에 사활을 걸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 말에도 물론 일리는 있다. 실제 우리 사회에서 전통적인 가족의 개념은 붕괴하고 있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에 처한 세계와 가족의 미래>라는 책에서 국제결혼, 노동이주, 대리모, 동성결합 등 다양한 운명공동체가 이분법적인 기존의 가족 개념을 바꾸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더 넓은 의미의 가족 개념 확대라는 측면에서 동성 간의 '결혼'이 아닌 '결합'의 권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볼 수도 있다. 단순히 동성 간의 결혼 허용이 아닌 시민결합 등의 제도 도입에 힘쓰는 것이 현명해 보일 수 있다. 이 제도 하에서는 결혼이라는 '지옥'에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더라도 동성 간의 결합이 가능할 수 있다.

결혼이라는 지옥을 맛볼 권리

그러나 문제는 그간 동성연인들에게는 '지옥'을 맛볼 권리조차 없었다는 사실이다. 성경에서 지옥은 하느님,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죄를 저지른 악인들이 가서 영원히 고통 받는 장소로 그려진다. 동성애를 죄악으로 규정하는 성경의 논리에 따르면, 그들은 지옥에 보내져야 함이 마땅하다. 전국기혼자협회의 말대로 결혼을 '현실판 지옥'에 비유한다면, 그들에게는 현재 지옥을 경험할 권리조차 없는 셈이다. 먼저 그들에게 지옥을 맛보게 하는 것이 순리다. 뒤처진 부분에 있어서 출발선을 맞추는 문제는 추후 논의의 '필요조건'이다.

"동성애자가 하나님을 찾고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내가 어떻게 (그들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얼마 전 미국에서 LGBT의 권리를 옹호하는 대표적인 잡지로 꼽히는 '디 애드버킷(The Advocate)'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 리포터와의 인터뷰에서 위와 같은 발언을 했다는 이유에서다. 교황은 한 사람으로서 동성애자에 대한 판단을 보류했다. 동성애자든 아니든 간에 '선한 의지'만 있다면 누구든 같은 인간으로서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잡지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전임 교황들과는 달리 동성애에 대해 파격적인 발언을 했다는 점을 선정 이유로 들었다.

동성연인들에게 지옥을 허(許)하라

여전히 한국에서는 동성결혼 제도화에 대해서는 깜깜무소식이다.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은 기독교계의 표를 의식해 "동성애 허용법이 제정 안되게 노력"하겠다며 발뺌했고, 새누리당은 "대안 없이 동성애를 옹호하는 것을 반대하는 교계의 입장에 대한 원칙적 공감"만을 표시해 아직까지 쉬쉬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동성결혼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이 땅의 동성연인들에게 결혼이라는 지옥을 허하라. 그것이 지옥(地獄)이 될 지 지옥(地玉)이 될 지는 두고 봐야 한다. 더 큰 문제는 지옥을 경험한 그 다음의 일이 될 것이다. 언젠가 그들이 다시 그 지옥에서 꺼내달라고 하는 날이 오진 않을까.


태그:#동성애, #동성결혼, #LGB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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