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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시장을 만들었다? 조선역사를 통틀어 가장 멋진 왕 정조가 시장을 만들었다고? (훌륭한 것으로 따지자면 세종대왕이 좀 앞서지만!) 집현전도 아니고 성균관도 아닌 시장을 만들었다? 아니, 뭐하려고?

궁금해서 <왕이 만든 시장>(브랜드스토리 저, 멋진세상 펴냄)을 빼들었다. '왕이 만든 시장, 그곳에서 만난 유상들'이라. 제목에 이어 눈길을 끄는 단어가 있다. 유상? 유상이 뭐지. 어디서 듣던 말이다. 최인호 소설에서 봤던가, 김주영 소설에서 봤던가. 헷갈리더니 생각났다, 평양유상! 예로부터 개성상인은 송상으로, 서울상인은 경상으로 불렀으며 평양상인은 유상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정조가 만든 시장에서 만난 유상은 또 뭐란 말인가?

정조는 왜 팔달문시장을 만들었을까?

<왕이 만든 시장> 겉표지
 <왕이 만든 시장> 겉표지
ⓒ 멋진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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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 정조가 시장을 만들게 된 이유를 찾자면 그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세손 시절 정조 이산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보았다. 활달한 성격에 개혁적인 면모를 보였던 사도세자를 경계한 노론세력의 음모는 급기야 그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다. 출신성분의 약점을 딛고 노론의 힘을 입어 국왕의 자리에 오른 영조는 노론의 세력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목숨을 잃은 뒤, 정조는 왕위에 오를 때까지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냉철하고 엄혹한 자기절제가 없었다면 그의 운명이 어찌되었을지는 알 수 없을 터. 끊임없는 노론의 공격과 모함을 이기고 왕위에 오른 정조는 자신의 뜻을 펼치기 시작한다.

'개혁의 씨알을 뿌릴 도시는 기득권자 노론이 장악한 한양으로는 아니된다. 새로운 곳, 새로운 무대가 필요하리라!'

생각에 잠겼던 정조는 수원으로 시선을 돌린다.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길목인 수원. 정조는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기로 했다.

'신도시 수원을 상업도시로 만들자!'

실사구시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감지한 왕은 신분계급으로 정체된 조선의 힘을 증폭시킬 수 있는 것은 상업이라고 판단했다. 수원 팔달문시장이 왕의 마음속에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수원에 궁을 축조하라, 수원에 상인들을 불러들이라

팔달문시장을 만든 정조와 행차장면
 팔달문시장을 만든 정조와 행차장면
ⓒ 멋진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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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행궁 축조와 상업도시로의 구상은 노론정권에 좌지우지되는 조선의 정치판에서 정조가 꿈꾸는 개혁의 발판작업과도 같은 것이었다. 일단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에 이장한 정조는 방위와 교통을 염두에 두고 몇 년에 걸쳐 수원화성 축조작업을 진척시켰다. 그리고 사회기반시설을 하나씩 갖추어 나갔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수원에는 부족한 것이 있었다. 수원(水原)이라는 이름과 달리 수원에는 물이 부족했다. 어찌할 것인가. 문제가 있으면 해결책도 있는 법. 정조는 제방을 쌓고 버드나무를 심게 했다. 버드나무는 물이 많고, 튼튼한 뿌리로 제방을 잡아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수원천을 시작으로 수원에 흐르는 크고 작은 개천들을 서로 잇고 이어 인공 저수지를 만들었다.

"히야! 우리 수원에 이렇게 물이 많았어?"

놀란 건 수원사람들이었다. 이후 버드나무가 무성해지면서 수원사람들은 이 개천을 '버드내'라 불렀다. 버드나무를 심은 덕에 물길이 성해지고 농업이 일어났다. 수원에 종종 능행차를 했던 정조는 수원을 일컬어 유경(柳京)이라 칭하기도 했다.

유경(柳京)은 한자 그대로 하면 '버드나무가 많은 서울'이라는 뜻이다. 사도세자의 묘가 자리한 수원에 화성행궁을 짓고 '유경'이라고 부르는 정조의 의중은 분명했다. 왕다운 왕이 되어 수원을 한양에 버금가는 도시로 키우고, 이를 기반으로 개혁을 이루겠다는 포부에 다름 아니었다.

유경, 수원팔달문시장에서 만난 유상들

수원천변에 성을 축조하고, 버드나무를 심고, 사회기반시설을 갖춘 뒤 정조는 화성행궁의 남문인 팔달문에 시장을 열었다. 그것이 오늘날 수원의 팔달문시장이다. 그러니까 수원 팔달문시장은 실로 '왕이 만든 시장'이었다. 

시장을 연 정조는 전국의 대상인들을 불러 모았다. 정조의 부름에 응해 전국의 내로라하는 상인들이 팔달문시장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이들은 정조처럼 부국강병의 근본이 상공업에 있다고 보고 일찍이 상업에 투신한 선비상인들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상인이 선비집안으로 일찌감치 무역과 상업에 눈을 떴던 윤선도의 후손들이었다.

이처럼 뿌리가 선비에 있다 보니 수원상계는 이(利)보다는 의(義)를 따르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중시하는 기풍이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교육 사업에 헌신한 상인들이 특히 많았던 사실도 이와 무관치 않다. 

"유상이 뭐가 다르냐고요? 유상은 효(孝)를 바탕으로 상도(商道)를 실천하는 상인이지요."

<왕이 만든 시장> 2부에 실린 상인들의 이야기를 관통하며 흐르는 것은 유상으로서의 덕목이다. 곧 효를 바탕으로 한 상도의 실천내력이다.

상인을 상인답게 하는 덕목은 상도일 터. 유상에게 있어 상도를 관통하는 가치는 효라는 것을 팔달문시장 상인들은 그들의 생활상을 통해 말해준다. 유상은 효를 실천하는 상인이었다. 상인의 효는 선비의 효와 다르지 않았다. 다르지 않지만 실천방법에 있어서는 차이가 났다. 조상을 극진히 모시고 효를 조행의 기본으로 삼으며 성현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는 게 선비의 효라면, 유상은 효로써 상인의 도를 실천한다. 곧 상도(商道)가 유상에겐 효만큼 중요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국제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왕이 만든 시장, #수원팔달문시장,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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