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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같은 주말을 쉬지도 못하고 식구들의 성화로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식구라고 해봐야 달랑 셋이지만 느즈막히 얻은 외동딸아이의 성화는 열아이 못지않다.

오늘은 목적지는 충북의 영동. 이미 이름난 관광지는 안 가 본 곳이 없어 이맘때면 과꽃이며 복사꽃이 일품일 거라는 지인들의 조언과 영동8경과 한천8경 등 볼거리와 찍을거리가 많다는 군청 홈페이지의 홍보글을 보고 정했다.

서울에서 시간 30여분 고속도로를 지나 영동에 들어서며 차장을 여니 시원한 바람과 함께 공기가 새로웠다. 지나는 길가에 과수원 같은 것이 보여 차를 세우고 내려가니 파인애플만 빼고는 다 난다는 과일의 고장답게 과꽃이 활짝 피었다.

영동과수원에서
 영동과수원에서
ⓒ 김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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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수원의 아랫쪽으로는 금강이 도도이 흐르고 휴일을 맞은 강태공들의 낚시가 한창이다. 산과 강 그리고 과수원의 예쁜 꽃들. 모처럼만의 만찬에 아빠 사진사는 정신없이 셔터만 누르다가 두 여자들에게 또 한소리를 들었다. "아빠는 만날 사진만 찍어" 내가 무슨 기자도 아닐진대 오늘은 가족을 위해서 자제해야지 했는데도 좋은 풍경을 담고 싶은 욕심을 누르지 못했나 보다.

영동의 강태공
 영동의 강태공
ⓒ 김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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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내달려 닿은 곳은 옥계폭포. 전설이 서려있는 여인의 비경을 보는 듯한 폭포와 그 물줄기 아래로 양물을 보는 듯한 모양의 바위가 이채롭다. 배고프다는 모녀의 투정을 뒤로하고  딱 한장만 하고 사진을 찍었다.

옥계폭포
 옥계폭포
ⓒ 김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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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코스는 난계국악 박물관. 난계라는 이름이 낯설었는데 가서보니 박연이라는 이름이 낯익다. 호 난계(蘭溪), 영동 출생으로 1405년(태종5) 문과에 급제 집현전 교리를 거쳐 지평, 문학을 역임하다가 세종이 즉위한 후 악학별좌에 임명되어 악사를 맡았다.

불완전한 악기 조율의 정리와 악보편찬의 필요성을 느껴1427년(세종9) 편경12장을 만들고 자작한 12율관에 의거 음률의 정확을 기하였다. 설명을 해줘도 무심한 딸아이가 편경을 보며 외친다.

"아빠 이거 동이에서 나온건데."

나는 무심히 지나쳤던 편경을 아이는 눈여겨 보았나 보다. 그때서야 아빠의 설명을 듣고 이것 저것 물어온다. 백 권의 교과서보다 이렇게 한번 보는 것이 아이에게는 큰교육인가 싶고 모처럼 만에 아빠 노릇을 제대로 한 것 같아서 왠지 뿌듯하다.

시간은 어느덧 점심을 훌쩍 넘겨 근처 식당으로 들어가니 온갖 산나물이 그득한 찬에 소박한 밥상이 정겹다. 원래 나물을 싫어하는 나지만 그날만은 나물을 종류별로 맛있게 다 먹었고 딸아이도 덩덜아 잘 먹었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나니 식당 아주머니가 포도농사를 지으셔서 만든 거라고 와인을 한 잔씩 내어 주신다. 왠지 어울리지 않지만 아주머니의 설명을 들으니 영동에서 나는 포도주로 만든, 일제시대에 지어진 깊은 토굴에서 제대로 숙성된 와인이란다. 소믈리에도 아니고 독한 소주만 좋아하는 나지만 입 안에 퍼지는 향기며 살짝 단맛이 입 안에 맴돌고 술을 전혀 못하는 아내도 맛이 있단다.

와인토굴
 와인토굴
ⓒ 김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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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는 나인지라 호기심이 발동,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위치를 물어
달려간 와인토굴. 선선하니 와인을 숙성하기에는 제격인 듯싶다. 기다란 토굴 속에 차곡차곡 보관된 와인을 보니 희비가 엇갈린다. 이 긴 토굴을 일제하에 강제로 제대로 된 장비도 없이 조상님들이 만들었을텐데 수십 년을 거슬러 후손들이 토굴 덕을 보니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아내가 이참에 한 병 사가고 싶다고 하니 안내하시는 분이 판매를 안 한다 할 땐 언제고, 큼직한 카메라를 보시고는 선전이나 잘해달라고 선뜻 한병을 내어주신다. 아니라고 해도 아마도 내가 무슨 기자라도 되는 줄 아셨나보다. 지금도 왠지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이다.

돌아오는길 너무도 목가적인 풍경의 마을이 내눈을 잡는다. 토라지려는 아내에게 다음 여행을 약속하고 나서야 마을로 들어섰다.

할아버지의 자가용
 할아버지의 자가용
ⓒ 김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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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입구에서 만난 달구지. 휴일에 놀러내려온 손자, 손녀들에게 할아버지의 자가용을 태워주고 계신다.

외양간에 송아지
 외양간에 송아지
ⓒ 김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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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서 만난 녀석이 아들인가보다. 커다란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며 처음보는 외지인을 경계하듯 "음매"를 연발한다.

워낭소리
 워낭소리
ⓒ 김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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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릴적에나 보았던 쟁기와 튼튼한 골격에 소가 반갑다. 마치 <워낭소리>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해 가슴이 벅차 오른다. 외지인의 뜻밖에 인사에 수줍게 모자만 살짝 올리시는 아저씨.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아파트 공간 속에서 벗어난 이곳에서의 오늘은 가족을 위한 여행이 아니라 나를 위한 여행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도시인의 삶답게 시간에 쫓긴 바쁜 일정이었지만 다음에는 아예 사진기를 집에 두고 오로지 두 모녀만을 위한 긴 여행을 준비해야겠다. 지면에 남기지는 못했지만 좋은 사진 남기게 해주신 영동군민의 넉넉한 인심과 꾸미지 않은 풋풋한 웃음에 새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태그:#영동, #과일,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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