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야구장에서는 '야구'말고 다른 말은 하지 말아라?

 

8:0, 3회에 이 정도면 경기가 기울어졌다고 할 만하다. 7월 31일 삼성 선발 윤성환이 LG 톱타자 박용택을 삼진아웃으로 돌려세우고 공수교대가 일어나는 찰나 여덟 개 피켓이 외야석 한가운데서 불쑥 튀어나왔다. '미디어법 삼진아웃'. 그러나 양팀 응원석에서는 약간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피켓을 들던 김지혜(참여연대 인턴, 대학생)씨는 "야구장 안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만 다른 세계에 있는 느낌"을 받았다. "환호도 야유도 없이 우리만 놀다 가는 것인가"하는 생각에 당혹스러웠단다.

 

뒷자리에 앉은 할아버지가 "학생들 이게 뭐 하는 짓이야!"라며 호통을 치자 묘한 긴장이 흘렀다. "할아버지가 화를 냈을 때 피켓을 든 손에 땀이 흘렀지만" 송예진(참여연대 인턴, 대학생)씨는 옆자리 어떤 직장인 두 분의 "그냥 하게 놔두라"는 말에 힘을 얻었다.

 

4회 초, 투수가 초구를 뿌리는 동시에 피켓을 내렸건만 뒤늦게 달려온 안전요원은 뭐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피켓을 내리라고 고함을 치면서도 눈이 동그래져 있는 것을 보니 적잖이 놀란 모양이다. 하긴 야구장에 이런 '개념 찬' 정치구호가 등장하니 깜짝 놀랄 만하다. 과거 권위주의적 정권이 국민들의 관심을 돌려놓으려 만든 곳이 바로 프로야구 아니던가.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이던 안전요원은 못내 버거웠던지 야구단 직원을 불렀다. 그리고 '왜 하필 야구장에 와서 하는가'와 '왜 야구장에서 하면 안 되는가'가 한참을 대립했다. "자꾸 이러시면 퇴장시킨다"는 으름장에 결국은 피켓을 주섬주섬 챙겨 들고 나와야 했지만 말이다.

 

달나라 이야기가 되어버린 '평화적 퍼포먼스'

 

참여연대 4기 인턴들이 처음 부서업무를 시작했던 날, <헌법이 죽어간다> 퍼포먼스가 광화문 네거리에서 있었다. 퍼포먼스라는 제법 유쾌하고 합법적인 시위에 사람들은 기대 반 긴장 반을 가지고 광화문에 갔다. 회색 하늘 말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경찰밖에 없을 정도로 이중, 삼중으로 꽁꽁 둘러싸일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새삼스레 헌법 제 21조 1항을 들먹거리지 않아도 국민에게 집회의 자유가 있는 것은 '상식'이다. 경찰이 좋아하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을 따져 생각해봐도 도무지 잘못한 게 무언지 알 수 없었다.

 

노민식(참여연대 인턴, 대학생)씨는 "TV에서 보던 '시위'가 아닌데도 경찰이 이렇게 폭력적으로 대응할 줄 몰랐다. 퍼포먼스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경찰이 집시법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있다"며 분노했다. '피켓을 드는 것 자체가 위법'이라는 말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는데, 경찰이 너무 확신을 갖고 사람들을 저지하니 노씨의 말마따나 "마치 우리가 범법자가 된 기분"이었다.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사람들 의견은 갈 곳이 없다. 길거리는 집시법에 접수되었고, 인터넷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정보통신기본법에 접수되었다. 헌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이 기괴한 법률 앞에서 말(言)은 말(馬)을 잃는다. 이상한 법률 따위에 걸리지 않고 한 마디 할 수 있는 공공의 땅이 없다. 그저 들어주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 말하고자 할 뿐인데 이렇게나 갈 곳이 없다니, 허탈할 따름이다.

 

미디어법이 시행 되면 언론의 처지 역시 우리 같은 시민들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할 말을 해야 할 것인데 시민도 언론도 말을 못한다면 누가 말을 할까?

 

"여기서 '이런 거' 하시면 안 돼요!"

 

 

말할 곳 없는 우리에게 야구장은 일종의 도피처요, 배출구였다. 그러나 말은 야구장에서도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공공의 영역이 아니라 야구단의 영역"이란다. "서울특별시 체육시설관리사업소로부터 임대한 것이니 구단에서 하고 싶은 말만 할 수 있다"고도 했다. 체육활동을 위해 공공시설물을 빌리는 것에야 의아할 것이 없으나, 그곳에 오는 관중들의 '의사표현권'까지 빌려갔을 줄은 몰랐다.

 

규칙이나 법적인 근거를 요구하자 "그런 건 없"단다. "상식 선에서 처벌할 일이 아니니 규칙도 없는 것 아니냐"고 되물어도 직원은 연신 손가락으로 무전기 이어폰을 가리키며 "'위'에서 다시 피켓을 올린다면 경기를 방해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퇴장시킬 수도 있다고 했다"고 대답할 뿐이다.

 

공권력이나 안전요원의 손에 끌려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구단 직원의 진땀 배인 말 속에서 우리의 정치적 의사표출에 가해질 '억압'에 대한 공포와 '위'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직원의 처지에 씁쓸함을 느끼며 피켓을 내리고 야구장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인 구호가 인명살상무기도 아니고 테이저건보다도 훨씬 덜 위협적이건만,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의사표출에 대한 경기가 일어나고 있다.

 

소통, 어렵지 않다?

 

미네르바가 책을 냈단다. 여전히 그의 책이 정부 경제시책에 시퍼런 칼날을 겨누고 있을지, 어떤 경제지보다 날카로운 추세 전망이 있을지 의문이 든다. 이미 그의 손과 입에는 무거운 족쇄가 채워졌고, 무죄판결이 났다고는 하나 '일개 시민'이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억압의 포화가 쏟아졌지 않은가.

 

촛불에 데이고 난 권력은 일상의 의사소통을 하나하나씩 막아가려 했고 그 출발이 미네르바였을 것이다. 큰 불이 되면 그를 막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하지만 일상의 소소한 말을 모두 감시하고 정치적 의사표현을 차단한다면 '촛불 바이러스'가 퍼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 미디어법이 시행되면 미네르바 같은 시민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언론의 목소리도 하나하나 가로막히기 시작할 것이다. 이미 한국사회의 여론을 독점하고 있는 거대 신문이나, 거의 모든 영역을 아우러는 재벌이 방송까지 운영한다면 이 방송이 누구의 입장에서 말을 할지는 애써 생각해볼 필요가 없다.

 

이미 권력의 손에 쥐어진 한국방송이 '대운하의 필요성' 운운하는 다큐멘터리를 내보내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 기존 관례마저 무시하고 정부∙여당 측 인사 대다수로 구성한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진을 보고 있으니 MBC의 앞날도 풍전등화와 같이 느껴진다.

 

미디어법 사태를 바라보는 국민의 눈

 

 

정부와 여당의 논리대로 특별히 변수가 없다면 방송사가 많이 생겼을 때 콘텐츠의 다양성이 보장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수 신문사가 여론을 독점하는 한국 언론 구조에서 신문사에 뉴스를 위한 전파를 나눠주는 것이 독과점을 해소할 방법인가에 대해서는 강한 의심이 든다. 방송독과점 이전에 여론독과점이 우려되는 바이다. 재벌 또한 현재 보도만 제외하면 어떤 형태의 콘텐츠 제작도 가능한 마당인데 보도 전파를 주는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일이 될 것인가?

 

절차상 문제도 그렇다. 60%가 넘는 국민이 미디어법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있었음에도 정부∙여당은 법안통과를 강행하지 않았나. 게다가 통과과정에서 절차적인 정당성조차 상실했다. 하지만 방송통신위원회는 법적인 판단과정을 무시한 채 후속절차를 강행하고 있고, 이에 질세라 여당은 정치공세에 열을 올리고 있다. 누구를 위한 법인지가 뻔히 보이고 당장 '내 말'이 가로막히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 누가 있는가.

 

서울광장도, 언론도, 모두 돌려달라

 

 

서울광장이 시민의 영역이듯 전파 또한 국민의 것이다. 언론은 모든 시민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공간임은 물론이고 사회적 약자가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통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물론 기존의 방송이 전적으로 공적인 영역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디어법은 방송을 시민에게 가져다 주기는커녕 있던 것마저 빼앗아 갈 것이다. 미디어법 아래에서는 더 이상의 상대적 자율성을 기대할 수 없다.

 

결국 누군가는 할 말을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 누군가가 되길 꺼려하지 않을 것이다. 8월 3일 아침, 참여연대 인턴 중 세 명이 '광화문 광장을 시민에게 열 것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다 경찰에게 잡혀갔다. 현장에 있었던 송예진씨는 "경찰도 경찰이지만 욕하거나 위협하는 시민들 때문에 더 무서웠다"고 한다. "솔직히 위축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송예진씨는 "조용히 다가와서 '수고 많이 한다'고 격려해주는 시민들을 보며 우리 행동의 가능성을 느꼈다"고 말했다. 야구장에서, 그리고 광화문에서 우리의 의사소통권을 억압 받는 일은 상당히 불쾌했다. 그러나 움츠리진 않겠다.


태그:#미디어법, #참여연대, #야구장시위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2,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