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포스터

▲ <이리> 포스터 ⓒ 스폰지하우스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이리>의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다. 움직임이 있다 해도 더디고 단조롭다. 카메라에 잡힌 풍경은 황량하다. 어떻게 보면 일상적이다. 아니, 영화가 담아내기에는 너무 일상적이어서 비일상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인물들도 비슷한 정서를 가지고 있다. 천천히, 하지만 힘주어서 움직임을 계속한다. 조용한 영화 속에서 인물의 발자국 소리 하나조차 관객의 심장을 때린다. 이것이 장률 감독이 그의 영화에 자신만의 인장을 찍는 방식이다. 이런 형식의 투명성은 주변부 삶을 살고 있는 인물들의 아픔과 슬픔을 오롯이 드러나게 한다. 진서와 태웅 남매가 이 세상을 견뎌내야 하는 애처로움처럼.

 

<이리> 진서(윤진서)

▲ <이리> 진서(윤진서) ⓒ 스폰지하우스

 

<이리>라는 제목은 현재 익산으로 지명이 바뀐 전라북도 중소도시의 옛 이름이다. 이리에서는 1977년 기차 폭발사고가 있었다. 영화는 정확히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된다. 진서(윤진서)는 30년 전 기차 폭발사고의 진동으로 미숙아로 태어났다. 그래서 중국어학원에서 일을 하고 돈을 못 받아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약간 모자란 인물이다. 정신지체인 그녀를 동네 남자들은 거리낌 없이 성적 노리개처럼 강간한다. 그러면 그녀는 임신을 하고 또 유산을 한다. 그런 그녀를 택시운전을 하는 오빠 태웅(엄태웅)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본다. 오빠인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진서의 손에 콘돔을 쥐어줄 뿐이다.

 

<이리> <이리>

▲ <이리> <이리> ⓒ 스폰지하우스

 

장률 감독의 전작들처럼 <이리>는 조용하고 느린 방식으로 주변부 인물들에게 카메라를 갖다 댄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가 장률 감독의 전작들과 다른 점이라면 영화 속에 역사와 시간에 대한 사유를 가지고 왔다는 점이다. 그 사실은 감독이 이 영화를 30년 전 이리역 폭발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진서라는 인물은 아픈 과거 역사의 -말 그대로- ‘산물’이다. 이리역 폭발 당시 진동으로 태어난 그녀는 신체에 폭발의 기억을 지니고 있다. 정신지체라는 형태로 드러나는 역사적 기억은 현재라는 시간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 진서가 강간으로 생긴 아이를 떼어내는 것이 영화의 시작인 것처럼. 그리고 계속 진서는 중국어학원 학생에게, 해병대전우회에게 강간을 당한다. 역사적 기억으로서의 신체가 현재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강간인 것이다. 이미 많은 영화들 속에서 그랬듯이 이 영화에서도 남성의 역사적 죄의식은 강간으로서 잊혀진다. 진서가 유일하게 소통으로써 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중국인강사와 불법체류노동자뿐이다. 소통할 수 있는 대상이 외국인뿐이라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진서를 제외한 사람들에게 과거는 잊혀지고 있는 대상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이리역 폭발사고 30주년 기념 TV프로그램 인터뷰에서 청소년들은 폭발사고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단지 30년 지난 현재를 살고 있는 그들에게 30주년 기념 프로그램은 백지영 출연으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아니, 그것은 잊혀져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성들은 남성적 질서에 의해 만들어진 과거의 역사, 그리고 역사의 죄의식을 강간으로 잊고 싶어 한다. 노인정의 노인은 진서의 신체가 가지고 있는 과거 기억의 냄새를 맡고 자살을 선택한다. 오빠 태웅도 마찬가지다. 진서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그는 결국엔 기차역 폭발의 산물인 동생이 부담스러워진다. 그리고는 바다로 데려가 죽인다.

 

세계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게 발전을 계속해야만 하는 지금 시대에 진서라는 인물은 불필요한 게 당연하다. 아픈 과거를 회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웅이 진서를 죽이는 선택을 했을 것이다. 태웅은 영화 속에서 택시 운전을 하지 않을 때에는 항상 종이로 축소 빌딩 모형 만드는 취미 생활을 한다. 건설을 주요 성장 동력으로 선택했던 우리나라 현대사의 이미지와 겹친다. 그는 진서를 바다로 데려가기 전에 종이 빌딩과 빌딩 사이에 다리를 놓음으로써 작업을 완성한다. 하지만 진서를 바다에서 죽이고 온 태웅은 완성한 종이 빌딩을 폭파해버린다. 장률 감독의 전작처럼 비관적인 결말을 가진다. 과거를 회상하게 함으로써 자신을 계속 괴롭혔던 진서를 죽이고 난 후에 미래를 상징하는 종이 빌딩을 없애버린다는 두 사실의 연결은 역설적이게 보인다. 감독은 망각되고 단절된 시간은 지속될 수 없다는 생각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영화는 실제로 이리(현재 지명은 익산)에서 촬영됐다. 주요 촬영 장소는 익산의 모현아파트 일대인데, 감독은 시나리오 작업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이곳을 발견하고 영화에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영화 속의 모현아파트 일대의 풍경은 황량하기 그지없다. 이리역 폭발사고 1년 후에 건설돼 30년 가까이 된 이 아파트는 역사적 상흔의 상징처럼 을씨년스럽다. 아파트 바로 옆에는 검은 기찻길이 엿가락처럼 늘어나있다. 중국어 학원에서 바라보는 이런 풍경은 마치 30년 전에 정지된 시간처럼 보인다. 세계의 시간과 이리의 시간과 진서의 시간과 태웅의 시간이 균열될 수밖에 없는 공간으로서 빼어난 선택이다.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장률 감독의 영화가 다 그렇긴 하지만 지나치게 형식적인 면에 엄격한 것은 아닌가한다. 정지돼 있고 롱테이크로 찍는 카메라는 어둡고 지난한 삶의 정서를 드러나게 하지만, 때론 이런 형식적 선택이 부적절한 장면들도 있다. 그럼에도 동일한 형식을 고집하는 감독의 선택은 흔쾌히 지지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노인정 할아버지의 자살과 같은 전위영화적인 장면이 등장하는데 지나치게 의도적이며 의미가 명시적이라서 영화의 흐름에서 벗어나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리>의 태웅과 진서

<이리>의 태웅과 진서 ⓒ 스폰지하우스

2008.12.03 20:34 ⓒ 2008 OhmyNews
이리 장률 익산 엄태웅 윤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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