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평화로운 촛불집회였다. 동시에 오랜만의 '촛불문화제'이기도 했다. 7월 5일 59번째 촛불집회는 수십만이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체의 충돌이나 사고 없이 마무리되었다. 평화로우면서도 동시에 열정적인 현장 분위기는 지난 6월 10일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정부의 고시 게재와 강경진압으로 한때 위기를 맞았다가 종교계의 개입으로 중심을 되찾은 비폭력 기조는 이날 밤 화사한 꽃을 피웠다. 덥고 습한 날씨와 북적이는 인파, 개선의 기미가 없는 정세에도 불구하고 참가자들은 인내와 자발성으로 '폭력보다 어려운 저항'을 일구어낸 것이다.
이날 집회의 평화 분위기를 위협한 최대 요인은 경찰도 과격시위대도 아닌 촛불반대 측이었다. 시청광장에서 지척인 소라광장에서는 '노노데모' 회원 200여명이 모여 촛불집회를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폴리스 라인을 사이에 두고 이들과 일부 촛불집회 참가자들 간의 가벼운 실랑이가 이어지자 경찰은 전경버스를 동원하여 아예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노노데모 측은 "촛불이 필요한 곳은 북한입니다"는 대형현수막을 무대차 위에 내걸었으며, 탈북자 몇 명이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불의구현 死제단 해체!"라는 내용이 적힌 현수막도 눈에 띄었다.
1차 문화제 후 가두행진을 마친 참가자들은 시청 앞으로 돌아와 밤 11시 반부터 2차 문화제를 이어갔다. 더 이상 전경버스를 흔들거나 끌어내려는 시도 등은 보이지 않았다. 촛불이 평정심을 완전히 되찾은 듯 보였다.
이쯤에서 비폭력 노선을 천명하는 것과 그것을 실현시켜내는 것의 차이에 대해 짚어보고자 한다.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는 그동안 줄곧 비폭력 노선을 공개적으로 천명했으며 집회 현장에서 참가자들에게 이를 호소해왔다. 하지만 충분한 실현에까지 이르게 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호소를 했는데 왜 국민대책회의의 그것은 실현되기 어려웠던 반면 종교계의 호소는 효과를 발휘한 것일까. 국민대책회의 관계자들은 물론 모든 참가자가 진지하게 고민해볼 만한 과제가 아닐까 한다.
2차 문화제의 무대는 어느때보다도 풍성했다. 안치환으로 시작해서 꽃다지로 끝난 각종 공연은 장장 3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386 세대에게 익숙한 이름일 꽃다지, 노래공장, 노찾사 초기 멤버들에서부터 현재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민중가수들인 지민주, 박준, 연영석, 박성하, 힙합 음악인 실버 라이닝 그리고 '선언' 등의 몸짓패(문선대)와 태권도 퍼포먼스 팀, 한 농민의 하모니카 독주까지 촛불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았다.
이 무대는 또 다른 의미에서 특별한 것이었다. 9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누리던 민중가요가 극심한 침체기에 접어든 후, 많은 사람들은 더 이상 그것을 현재진행형으로 인식하려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과거의 곡, 과거의 이름만을 회상할 뿐이었다.
이날의 무대는 그 어려운 시기를 거치면서도 아직까지 살아남은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린 장이기도 했다. 귀에 익지 않은 '새 노래'들은 하나같이 좋았으며, 가창력과 무대 매너 또한 수준급이었다는 점도 덧붙여두어야겠다. 문득, 정말로 10년을 잃어버린 이가 누구인지 생각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무대였다.
더위와 장맛비, 요지부동인 정권과 반대세력의 색깔공세라는 첩첩산중을 촛불은 넘고 있다. 마치 백두대간 종주와도 같은 긴 걸음을 분노와 흥분으로만 이어가기는 힘들 것이다. 어떤 것이 더 현명한 싸움이며 지치지 않는 길인지 더욱 고민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나라는 민주화가 된 지 그리 오래지 않은 나라인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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