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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래도~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멀찍이서 안치환 노래가 흘러나왔다. 행사시작은 예정 시각보다 늘 늦었기에 10여 분이 지난 것쯤은 대수롭지 않았던 차다. 6월 10일 6시 10분 서대전공원, '대전지역 대학생 행동의 날'이란 펼침막 아래 간이 무대를 마주하고 몇몇 대학 학생들이 무리 짓고 있었다. 통일성 없이 제멋대로인 삐죽한 깃발이 예닐곱 개. 각각 대전대, 목원대, 배재대, 충남대, 한남대, 한밭대, 카이스트라고 쓰여 있다. 대학생들의 집결이 어땠는지를 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시민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여론에 가장 무심하다는 대전, 그래서 혹자는 '멍청도'라는 이곳에서 대학생들이 '대전지역대학생 액션데이'라는 이름으로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행사는, 지난 5월25일 쇠고기수입전면 재협상을 부르짖으며 분신 후 사투를 벌이다 오늘 생을 마감한 고 이병렬씨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는 묵념으로 시작했다.

 

묵념 후 이어진 자유발언에서 유연진(카이스트·1)양은 "학내사이트 '아라'에서 쇠고기반대에 대한 활발한 소통이 있었다"면서 "하지만 시험기간 탓인지 예상한 인원보다 참여자가 저조해 죄송스럽다"고 말했다. 또 하영록(충남대·1)군은 "서울집회에 참여한 적이 있으나, 대전 사람인만큼 대전 시민들의 촛불집회 참여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 이번엔 대전행사에 참가했다"고 말했다. 96학번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카이스트 생명과학박사과정의 남학생은 "행사참여가 망설여졌지만, 예전과 어떻게 다른지 몹시 궁금했다"며 "생명과학전공자로서 광우병 걸린 쇠고기 수입은 위험요소가 짙다"고 말했다.

 

이어 충남대 몸짓패의 공연과 전국청소년학생연합 소속 청소년들의 공연이 서대전공원에 있던 시민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대학생 넷이 무대로 나서 "4월18일, 한미정상회담이 끝나기도 전에 미국의 협상요구를 모두 수용한 한미쇠고기 협상이 타결되었다" "국민들을 이해시키지 못해 송구하다는 대통령 담화, 고시 발효 연기, 쇠고기 협상의 책임자를 인적 쇄신하겠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말은 거세진 촛불을 더욱 불타오르게 할뿐이다" "재협상이 아니면 말도 꺼내지 말라" "많은 대학생들도 이미 전국 곳곳에서 삭발과 단식과 동맹휴업으로 미친소, 미친 협상을 반대하고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다" 등의 내용이 담긴 성명서를 낭독했다.

 

대전연합 대학생 200여명과 즉석에서 자리를 함께한 50여명의 대전시민은 6시 50분쯤 서대전공원에서 중구청, 중앙로를 통해 대전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교통이 복잡한 도심 한가운데라는 점과 러시아워인 점을 감안해 경찰의 호위를 받아 일부구간을 통제했다.

 

대전역으로 이동하던 중 행로를 함께 하던 아저씨께서 말을 걸어왔다.

 

"초등학교 5학년 때 4·19가 터졌는데 그때 빼고는 이렇게 도로 한복판을 걸어가는 것도, 대전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정부를 비판하는 것도 처음이야. 60평생을 대전에서만 살았는데 사람들의 행렬이 어떻게 되나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나왔어 사람들 구경하고 나도 하고 싶은 말은 하려고... 오늘 어떻게 되나 끝까지 있으려고."

 

흰 머리카락의 아저씨는 연신 입가와 눈가에 미소를 품고 계셨다. 그 옆에 한동안 듣고만 계시던 비슷한 연배의 아저씨는 연신 '고맙다고'고 하신다. 열기가 올라온다며 하늘색 자켓을 벗어젖히시더니, "공무원이어서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녔는데 대전만큼 조용한 도시는 처음이야"라며 "광주는 결속력이 강해 이런 시위가 자주 있는데 대전에선 생소해. 이번에는 다행히 젊은 사람들이 불씨를 당겨줘서 참여할 수 있는 거지. 대전도 집회문화가 활성화되어야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저씨는 머리 희끗한 아저씨와 금새 친해져 이명박이 어떻고, 한나라당이 어떻고 정치이야기를 했다. 연신 얼굴에 흥분의 미소를 지으면서.

 

중앙로 으능정이거리을 지나자, 일찍 하교한 학생들과 연인들, 상점주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해가 지지 않아 외면하고 제 갈 길을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에어컨 냉기가 빠져나가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내다보는 사람도 있다. 연인들이 행렬을 따르는가 하면, 떡볶이를 뒤적이며 무심한 눈길을 주는 사람도 있다.

 

대전역광장에 이르자 시민들의 함성이 쏟아진다. 7시 40분경 생각보다 많은 인파다.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의 자유발언이 진행되고 있었다. 왜소한 체구에 비해 유난히도 낭랑하게 말을 이어간다. "비록 내가 얼마 못살겠지만, 나 대신에 87년 구속돼 고문까지 당한 내 아들의 원을 풀어주고 살만한 대한민국을 만들어 달라"신다. 이어 역사를 가르친다는 교사가 나섰다. "부끄럽게 아이들이 먼저 촛불을 들고 나왔다"며 "0교시와 우열반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교사와 함께 나온 고3수험생은 "교과서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배웠다"면서 현 정부를 비난했다.

 

즉석에서 지지를 얻어 모금운동을 벌였다. 사람들은 모금함을 잡아끌며 지갑을 열었다. 9시경 촛불바다는 대전역 광장을 넘쳐나고 있었다. 후배한테서 전화가 왔다.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위치를 물어왔다. 오랜 만남을 반가워할 새도 없이 '아침이슬'을 부르고, '헌법 1조'를 불렀다. 대전·충청 민족예술극단 '우금치'의 공연을 끝으로 촛불바다 물길은 대전역광장에서 좀 전 가두시위 행렬을 벌인 으능정이거리, 중앙로로 이어졌다.

 

시민들은 선두를 기다리며 질서를 지키고 자신들의 쓰레기를 한 편에 모았다. 유모차를 끄는 어머니를 배려하고 넥타이 부대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낯모르는 사람들의 꺼진 초에 말도 하기 전에 먼저 불을 붙여줬다. 버스에 있던 시민들은 창문에 매달려 휴대폰 카메라를 갖다 댔고, 운전자들은 경적을 울려댔다. 흥분한 행렬의 학생이 '이명박OUT, 전면재협상'이 적힌 피켓을 택시기사에게 들이밀자, 기사아저씨는 웃으시며 고개를 끄덕인다.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이 대열에 합류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중앙로까지로 예정됐던 행렬은 중앙로를 지나 도청을 향하고 있었다. 갑작스레 불어난 인파 속에서 잠시 소란이 있기도 했지만 비폭력을 외치는 일부시민들의 제지로 정상을 되찾았다. 중앙로 한가운데 앉아 고등학생과 자영업자, 교사, 임용시험준비생, 어린이의 자유발언이 이어졌다. 고등학생의 '0교시 반대', 임용시험준비생의 '조·중·동 구독반대'가 나왔다. 여고생이 고시철회, 0교시반대, 우열반반대, 수도·철도·전기 민영화반대 등 현정부의 정책들을 일제히 비판하며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기도 했다. 한 자영업자는 '다시 촛불을 들며'라는 자작시를 발표했다. 촛불집회는 단순히 수입산쇠고기반대를 넘어 그동안 억눌렸던 민심의 목소리를 내는 장이었다.

 

10시경 촛불집회 참가자가 서울집계 70만명, 지방집계 30만명, 전국집계 총 100만 명이라는 사회자의 말에 풍악을 울렸다. 곧이어 대전 집계 1만 오천 명이라는 말에 시민들은 환호했다. 사회자가 충청도사투리로 "이명박 때려쳐유~"를 외치자 약속이라도 한 듯 시민들이 따라 했다. 옆에서 묵묵히 촛불을 밝히던 목원대 사회복지학과 2학년 여학생에게 '시험공부 해야 하지 않냐'고 물으니 '시험보다 권리를 지키고 싶다'며 '나를 비롯한 국민들의 건강이 우선'이란다. '무섭지 않냐'고 하니 '몇 번 참석했는데 과격한 일은 거의 없었다'며 촛불을 높이 들었다.

 

막차시간이 임박하자 일부 중고등학생들이 자리를 비웠다. 가족단위 참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들더니 돌아갈 채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도로 한편에선 일찍이 자리를 잡은 넥타이 부대 몇몇이 목을 축이고 있다. 예상 밖의 자리에서 오랜만에 만난 선·후배들이란다. 20여 년 전 있었던 어느 집회에서 함께 했던 사이라며 넌지시 반가움을 표했다. 남은 시민들은 '쾌지나칭칭나네'와 '아리랑', '헌법 1조', '아침이슬'을 부르며 집회를 마무리 짓고 있었다.

 

집회가 파하고 11시 20분경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만난 집회참가자 임성수(둔산동·27)씨의 말을 빌리자면 이번 촛불집회는 "시민의식의 위기에서 잠자는 시민의식을 구출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성공을 이루었으며, 나아가 한국사회의 발전가능성을 엿보는 계기"가 됐다. 집으로 향하는 마지막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오면서 연거푸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랫말이 입에서 맴돌았다.


태그:#촛불집회,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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