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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은 숭례문이 불타 무너진 지 100일째 되는 날이다. 불과 석 달 전 우리는 '국보 1호'를 잃었다. 당시 관계 당국의 부실한 문화재 관리가 화를 자초했다는 비난이 거셌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숭례문 화재를 계기로, 관계 당국이 역사의 죄인이 된 듯한 심정으로 문화재를 보존하길 기대했다. 하지만 지난 달 20일과 지난 17일 북한산성에 두 차례 다녀온 후 이런 바람은 산산이 무너졌다.

서울과 경기도 고양시에 걸쳐있는 북한산성은 사적 162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울시를 '유네스코 역사도시'로 만들기 위해 복원하는 주요 문화재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관계 당국은 숭례문 화재 이전 때와 마찬가지로 훼손을 방치하고 있었다.

[현장1] 대서문에 웬 대못?

북한산성의 정문 겪인 대서문의 문루 서까래 모습이다. 누군가가 '대못질'을 해놓았다.
 북한산성의 정문 겪인 대서문의 문루 서까래 모습이다. 누군가가 '대못질'을 해놓았다.
ⓒ 이정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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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이 박힌 위치(좌)와 박혀있는 대못(우). 못에 줄이 매달려 있고 그 줄에는 연등이 달려있다.
 못이 박힌 위치(좌)와 박혀있는 대못(우). 못에 줄이 매달려 있고 그 줄에는 연등이 달려있다.
ⓒ 이정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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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의 정문인 대서문. 서울 성곽으로 치자면 숭례문에 해당한다. 대서문의 누각에는 지난 4월에 갔을 땐 볼 수 없었던 대못이 박혀있었다. 못에 줄이 매달려 있고 그 줄에 연등이 달려있는 것으로 보아, 5월 종교 행사를 위해 문화재인 대서문에 못질을 한 모양이다. 못질을 당한 대서문이 안쓰러워 보인다.

[현장2] 낙서에 아이젠 자국까지!

대서문 문루 기둥에 새겨진 낙서(좌)와  중성문 문루 마루 바닥의 아이젠 크램펀 자국(우)
 대서문 문루 기둥에 새겨진 낙서(좌)와 중성문 문루 마루 바닥의 아이젠 크램펀 자국(우)
ⓒ 이정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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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문 문루의 기둥에는 "000급사(急死) 기원(祈願)"이라고 누군가를 저주하는 내용의 낙서가 있었다. 그 옆의 기둥에는 "광(狂)년"이라고 쓰여 있고 심지어 "씨x"이라고 육두문자까지 새겨져 있었다. 다른 기둥에는 장난감용 스티커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런 식으로 대서문 문루의 10개 기둥 중 원형을 보존한 것은 단 한 개도 없었다.

중성문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중성문 누각의 마루는 겨울철 미끄럼 방지 등산 용구인 크램펀(일명 아이젠) 자국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찍혀 있었다. 아직 모양이 선명하고 3월까지 북한산에 얼음이 녹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숭례문 화재 이후에도 훼손 행위가 계속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장3] 문화재는 '앉아서 쉬는 곳'?

등산객들이 편안히 쉬고 있는 대서문 문루. 출입 제한 장치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등산객들이 편안히 쉬고 있는 대서문 문루. 출입 제한 장치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 이정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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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이 계속 훼손되고 있는 데는 관리를 소홀히 하고 있는 관계 당국의 책임이 크다. 북한산성의 13성문 중 5개에 누각이 있다. 이 중 울타리 같은 출입 방지 시설이 있는 곳은 대성문 단 하나뿐이다. 다른 누각들은 아무런 출입 제한 장치가 없다. 등산객들은 제집처럼 누각을 드나든다.

문제는 사람 손을 타면서 누각이 점차 훼손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출입 제한 장치는 없었다. 울타리가 있는 대성문이 다른 누각들에 비해 손상이 적은 게 눈에 보이는 데도 말이다. 조금만 신경 쓰면 방치로 인한 훼손을 막을 수 있을 텐데 또 다시 소 잃고 외양간 고칠 태세였다.

이에 대해 고양시청의 한 문화재 관리 담당 공무원은 "대서문 근처 상점에 위탁관리를 맡기고 있다"고 밝혔다. '대못까지 박혀 있으면 관리가 잘 안 되는 것 아니냐' 묻자 "관리 감독을 철저히 하고, 대못의 경우 시정조치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문화재의 접근성을 위해 울타리는 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현장4] 일제가 지어준 이름으로 유네스코 역사도시 등록하겠다?

일제가 지어준 이름인 '위문'을 아직도 달고 있다.
 일제가 지어준 이름인 '위문'을 아직도 달고 있다.
ⓒ 이정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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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북한산성의 13개 성문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문이다. 이 문의 본래 이름은 백운봉암문이었다. 이 성의 축조 과정을 기록한 조선시대 스님 성능의 <북한지>를 보면 이 문의 이름이 '백운봉암문'으로 명백히 기록돼있다.

최근 서울시가 발간한 <서울 600년사>에도 이 문의 이름이 '백운봉암문'으로 명시돼있다. 그러나 이 문의 현판은 '백운봉암문'이 아닌, 위의 사진에서 보듯 '위문(衛門)'이라 적혀있다.

1937년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발간한 <북한산:경전하이킹코스>(北漢山:京電ハイキングコ-ス)에서 최초로 '위문'이 발견되었다. 이 점으로 미루어 백운봉암문은 일제시대 때 그 이름이 바뀐 것이다. '위문'이 일제잔재라는 것은 이미 2004년 <오마이뉴스>의 김남용 기자가 '매국의 문, '위문'을 걷어치워라!' 란 기사로 증명하기도 했다.

결국 일제 잔재를 갖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역사도시 등록을 추진하고 있는 셈이다. 관리 당국 관계자는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 "잘 모르는 일이다"라고 밝혔다.

더욱 큰 문제는 역사를 오도(誤導)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산을 한 해 1000만 명이나 찾는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아주 많은 사람들이 찾는 산으로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다. 그 중 몇 명이나 위문의 정식 명칭이 백운봉암문이라는 사실을 알겠는가.

현판을 바꾸지 않아 그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역사를 배우도록 방치해 놓고 있는 것이다. 주말이면 북한산성에 오른 외국인 관광객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들 역시 백운봉암문을 일제가 지어준 이름인 위문으로 알고 갈 것 생각하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제2의 숭례문'은 없어야 하는데...

문화재를 복원하는 데는 돈과 시간이 많이 든다. 그러나 낙서가 늘지 않도록 방책을 세우고, 현판이 잘못 됐는지 아닌지 확인해서 고치는 데는 그리 큰 힘이 들지 않는다.

매년 논란이 되는 국회의원이나 지방 의원들의 외유성 출장에 쓰인 돈만 모아도, 연말이면 멀쩡한 보도블록 걷어내고 새로 설치하는 비용만 합해도, 북한산성에 울타리와 제대로 된 현판쯤은 만들고도 남으련만….

숭례문 화재 당시에만 철저히 문화재를 보존하겠다고 말로만 외쳤을 분 정작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태그:#숭례문화재 100일, #북한산성,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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