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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비꽃
ⓒ 유진택
완연한 봄날이다. 구름 몇 덩이 흘러가는 새파란 하늘은 깨질 듯하고 햇살은 무작정 등짝을 찔러댄다. 포근한 봄볕에 어지럽게 꽃망울을 매단 벚꽃이 꽃구름처럼 부풀었다. 그 옆에 핀 목련도 여전히 눈부시고 동백도 붉고 서럽게 핀 꽃들을 일편단심으로 붙들고 있다. 산에서 불이 붙었던 꽃불 길은 도심의 회사 담장 터까지 내려와 여기저기 타닥타닥 꽃불을 피워 올렸다.

생계에 묶여 평일동안은 꽃 나들이를 하지 못하는 마음이 아쉬워 심심하면 확 트인 담장 터를 바라보았다. 바깥과의 소통을 위해 오래전부터 콘크리트 담장을 허문 담장터, 쳐다볼 때는 무엇보다 장애물이 없어 속이 시원해 좋았다. 넓어진 시야 속으로 세상의 풍경이 가득 들어왔다. 바깥세상과의 단절을 막고 열린 공간이 되어간다는 것이 더없이 좋았다. 보기 좋은 것은 이것뿐이 아니다. 담장터에도 봄이 찾아와 여기저기 숨어있던 풀들이 활짝 꽃망울을 터뜨린 것이다.

모두가 눈곱만한 것들이다. 오직 몸을 낮추고 겸손으로 바라보아야만 확연히 제 모습을 드러내주는 것들이다. 작년에도 똑같은 장소에 피어있던 풀꽃들을 올해 찾아낸 것은 내가 그동안 탐스럽고 화사한 꽃을 피우는 나무에만 눈길이 쏠렸던 증거이기도 하다. 이제부턴 작고 하찮은 것에도 관심을 가지자며 담장터를 둘러보는데 이건 장난이 아니다. 언제 이렇게 꽃을 피웠던가.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제비꽃이다. 제비가 날아올 무렵 핀다고 해서 이름 붙은 제비꽃이 실바람을 타고 자줏빛 꽃망울을 하늘거리고 있다. 내 유년시절 농촌에는 제비들이 참 많았다. 소낙비가 시원스레 쏟아지고 나면 제비들이 빨래 줄에 일렬로 앉아 마당이 떠나가도록 울어댔다. 그러나 몇 해가 흐른 지금 제비를 본지 오래되었다.

갈수록 힘들어지는 농촌의 현실을 제비들이 알기라도 한 것일까. 삶에 지친 농심이 예전보다 더 팍팍해져 자신들이 돌아와도 반가워해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날아오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날아오지 않는 제비 대신 제비꽃을 피워 준 모양이다.

▲ 꽃마리
ⓒ 유진택

▲ 꽃마리
ⓒ 유진택

그 옆에는 꽃마리도 지천이었다. 꽃잎을 말고 있다가 아래로부터 꽃잎을 펼쳐 피어난다는 꽃, 정말로 크기는 깨알만큼 작았다. 꽃잎은 다섯 장인데 꽃샘 속에 암술과 수술을 감추고 있어 꽃 한가운데가 구멍이 난 것처럼 보이는 꽃, 그래서 그 꽃을 들여다보려면 바짝 얼굴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그냥 서서 보면 자신의 참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에 어차피 고개를 숙이고 관심을 기울여야 베일에 싸인 것 같은 모습을 조금씩 보여주었다.

▲ 큰개불알풀
ⓒ 유진택

양지쪽엔 큰개불알풀도 수두룩하다. 쌍스럽고 민망한 이름이지만 꽃은 깨물어줄 만큼 앙증맞다. 은은한 하늘빛에 푸른 핏줄 같은 줄이 연하게 새겨져 있어 이름과는 달리 더 곱고 예쁘게 다가왔다. 그러나 꽃잎이 약한 게 흠이다. 뭐가 그리 불만이 많은지 슬쩍 손으로만 만져도 꽃잎이 똑 떨어진다.

그런 힘으로 앞으로 닥쳐올 역경을 어떻게 이겨낼까. 강한 바람이나 소낙비에도 당당하게 꽃잎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할 텐데 그것이 늘 걱정이다. 왜 하필 큰개불알풀이라고 했을까. 꽃이 피어있을 때는 해답을 찾을 수 없지만 꽃이 지고 난 뒤 불알처럼 생긴 열매 두 쪽이 나란히 붙어 있는 모양을 보면 금방 머리가 끄덕여진다.

▲ 냉이꽃
ⓒ 유진택

▲ 냉이꽃
ⓒ 유진택

허리를 껑충 세우고 함초롬히 꽃을 매단 냉이꽃도 드문드문 보였다. 좁쌀만한 하얀 꽃들이 줄기 끝에 오복이 들어붙어 실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여유롭게 다가왔다. 냉이를 캐 먹을 땐 작고 어여쁜 꽃들이 피는 것을 몰랐는데 하얗게 핀 냉이 꽃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그것은 꽃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나물로 무쳐먹을 생각만 했기에 꽃이 아예 눈에 띄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봄볕아래 밭둑에 피어 맨 먼저 아녀자들의 눈에 띄는 냉이 꽃, 나물로 생각하지 않고 꽃으로 보았더니 그 순수한 아름다움이 결코 다른 풀꽃에 뒤지지 않았다.

▲ 꽃다지
ⓒ 유진택


냉이꽃 한 송이도 제 속에서 거듭납니다
제 속에서 거듭난 것들이 모여
논둑 밭둑 비로소 따뜻하게 합니다
참나무 어린 잎 하나도 제 속에서 거듭납니다
제 속에서 저를 이기고 거듭난 것들이 모여
차령산맥 밑에서 끝까지 봄이게 합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 속에서 거듭납니다
저 자신을 죽이고 다시 태어난 사람들 모여
이 세상을 아직 희망이게 합니다.

(도종환의 시 '냉이꽃 한 송이도 제 속에서 거듭납니다')


꽃이 다닥다닥 붙어서 피어난다고 해서 이름 붙은 꽃다지도 앙증맞은 꽃이다.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어디에 숨어있는지 모를 정도로 꽃은 좁쌀만큼 작다. 그래서 꽃말이 '무관심' 인가보다. 관심을 가져야만 "나 여기 있소"하고 연약한 줄기를 세워 일어서는 꽃이다. 풀숲에 숨어 있다가 봄이 되면 일제히 꽃대를 밀고 올라오는 꽃다지, 아마 다른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으려고 꽃다지는 하루 종일 키를 껑충 세워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초보자의 눈으로 보면 꽃다지와 냉이 꽃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비슷하다. 언제보아도 같은 장소에 같이 피어 있을 정도로 가까운 꽃이다. 남의 눈에 띄던 띄지 않던 제 빛깔을 뽐내다가 조용히 사라지는 풀꽃들, 한 시절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받다가 소란스럽게 지는 꽃들보다 숨어서 말없이 제 삶을 마무리하는 풀꽃들이 얼마나 대견한가.

▲ 괭이밥
ⓒ 유진택

5월이면 숨어있던 풀들이 계속해서 꽃들을 피워 낼 것이다. 땅바닥에 바싹 잎을 붙인 괭이밥도 노란 꽃을 터뜨릴 것이고 땅이 비좁도록 들어찬 토끼풀도 시계 같은 꽃을 우후죽순 피울 것이다. 식을 줄 모르고 꽃불을 당긴 벚꽃과 목련, 동백의 화사한 꽃보다도 눈곱만한 풀꽃들이 자꾸만 안쓰럽게 다가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얼마 전 한미FTA 협정이 졸속으로 타결되었다. 그 결과에 대해선 찬반양론이 분분하다. 그러나 소란 속에서도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더 어려워지는 게 현실이다. 그들의 눈물이 더 진하게 흐를수록 한숨이 더 길게 새어나올수록 회사의 담장터에는 모습을 바꾼 풀꽃들의 행렬이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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