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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릴 때마다 나목에 피어나는 서리꽃.
ⓒ 오희삼
▲ 눈속에 잠을 자듯 서 있는 나목의 깊은 곳에도 체온이 흐르는 것만 같다.
ⓒ 오희삼

가장귀 덮었던 눈꽃을 녹이는 게 햇살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우듬지를 감쌌던 눈송이 떨치는 게 스쳐가는 바람인 줄로만 여겼습니다.

정말 몰랐습니다. 나목에도 체온이 있었다는 걸 미처 몰랐습니다.

햇살 쏟아지고 바람 부는 날, 겨울눈 꽁꽁 덮은 차가운 서리꽃 그 눈부신 아픔 떨쳐내려고 뿌리에서 가장귀로, 줄기에서 우듬지로 수직의 혈관을 고달프게 역류하는 나목의 치열한 줄소리를 예전엔 정말 몰랐습니다.

가장 혹독한 계절 벌거벗고 지내며 뜨거운 피 쉼 없이 뿜어올리는 수액의 조용하면서도 결곡한 전율을 차마 몰랐습니다.

병아리이 '줄' 하면 어미 닭이 '탁'하고

▲ 봄이 오는 한라산 숲속을 노랗게 물들이는 생강나무꽃.
ⓒ 오희삼
불가의 화두 중에 '줄탁동시'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미 닭이 알을 품고 있을 때, 때가 되면 알 속의 병아리가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껍질을 쪼아댑니다. '줄'소리지요. 이 소리를 들은 어미가 병아리가 쪼아대는 속껍질 바깥쪽을 동시에 쪼아줍니다. 바로 '탁'이지요.

줄과 탁이 엇갈리면 병아리는 세상에 나올 수가 없는 법이지요. '줄' 소리를 어미 닭이 듣지 못하면 병아리는 알 속에서 혼자 끙끙대다 지치겠고, '줄'도 없는데 어미 닭이 강제로 '탁'을 하면, 아직 여물지 않은 병아리가 성할 리 없겠지요. 줄과 탁의 교감이 없고서는 생명의 싹을 틔울 수 없는 법이지요.

봄이라는 계절이 오면 으레 꽃들이 피어나는 줄 알았지요. 따스한 햇살만 쏟아져도, 봄바람이 어루만져만 주어도 그렇게 새싹 돋아나고 꽃봉오리 부풀어오리라 여겼습니다.

빛깔을 잃었던 황량한 숲, 혹독한 눈바람 속에서 그저 쥐구멍에 볕들 듯이 봄이라는 계절을 만나 벌거벗은 나목에도 푸른 잎이 돋는 줄로만 알았지요.

바람이 채찍으로 매질을 하면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고 눈부신 서리꽃 제 살을 고문해도 돌부처로 잠을 자듯 무심한 나목. 무표정의 나목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는 줄로만 여겼지요.

혹독한 겨울의 들판에서 홀로 지새워야 하는 나무들은 낙엽을 떨쳐내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나무의 모든 자양분을 한 곳에 모아두는 일이지요. 바로 겨울눈을 만드는 일입니다.

겨울눈은 이듬해 꽃이나 잎으로 피어날 나무의 정수같은 것입니다. 봄과의 재회를 맹세하는 일종의 징표겠지요. 겨울이라는 시련 앞에서 생존을 위한 나무들의 본능이지요.

나무, 겨울눈을 낳고 스스로 흙이 된다

▲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한껏 꽃망울을 터뜨린 생강나무꽃.
ⓒ 오희삼
봄과 여름을 거치면서 나무들은 줄기 곳곳에 아이를 낳듯이 겨울눈을 만들어 놓습니다.

나무의 모정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더군요. 겨울눈이 한겨울을 지내는 동안 얼어 죽지 않게 또 한 겹의 두툼한 옷을 입혀줍니다. '아린'입니다. 눈보라가 몰아쳐도, 서리꽃이 온몸을 감싸더라도 겨울눈이 상하지 않게 감싸주는 비늘 껍질이지요.

이것으로도 못 미더워서인지 나무들은 아린 안쪽에 끈적끈적한 방수액도 발라줍니다. 얼었다 풀리기를 반복하는 겨울 추위에 옷섶으로 물기가 스며 겨울눈이 상할 새라 마지막으로 베푸는 어미의 배려지요.

낙엽 지기 전에 나무는 이 모든 일을 마치고 비로소 겨울 숙면에 듭니다. 제 뿌리마저 스스로 흙이 되어 겨울을 지새우지요.

겨우내 산을 지배하던 동장군의 기세가 누그러들면 나무의 뿌리도 기지개를 켭니다. 녹아내린 눈으로 흥건해진 흙 속의 수분을 마시며 기운을 차리는 거지요.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도 연못을 찾아들고 이른 봄의 야생화들이 하나둘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면서 나무들도 분주해집니다. 혹독한 겨울을 난 겨울눈이 꽃샘추위 속에서 꽃잎을 피우고 새싹을 틔우려고 안간힘을 쓸 때, 뿌리에서 빨아들인 수액을 뿜어 올립니다.

몸 가장 낮은 곳에서 허공으로 뻗어나간 가장귀로 우듬지로 수직의 줄기를 역류하며 혈액과도 같은 액체를 퍼올리는 것이지요. 투박한 얼굴의 나목 깊은 곳에서 봄을 향한 수액의 뜨거운 몸부림인 게지요.

봄날의 햇살과 싱그러운 바람이 겨울눈을 지날 때, 뿌리에서 건져 올린 수액으로 수혈받은 겨울눈들이 마침내 꽃을 피우고 새싹을 내밀지요. 겨우내 바람과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부러진 가지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도 수액입니다.

봄 산길을 걸을 때, 잠시 눈여겨보세요

봄의 여울목에서 휑한 숲 속에 잎도 없이 피어나는 생강나무의 샛노란 꽃망울을 보신 적 있으신지요. 기다란 줄기 끝에 자줏빛으로 부풀어올라 터질 듯한 층층나무 겨울눈을 가만히 바라본 적 있으신지요.

익어가는 봄의 산길을 걸어갈 때 잠시 눈여겨볼 일입니다. 무심한 듯 서 있는 나목 깊은 곳에도 수직의 혈관을 역류하는 뜨거운 체온이 있다는 것을.

한 번쯤은 다가가 귀를 대고 가만히 만져볼 일입니다. 계절을 흘러가는 한 그루 나무의 애면글면한 삶의 얼굴이 한 사람의 생애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 이제 곧 잎새를 틔우려고 한껏 부풀어 오른 층층나무의 가장귀.
ⓒ 오희삼
▲ 복수초와 노루귀가 봄을 알리는 키작은 식물이라면 생강나무꽃은 이른 봄 왕벚나무보다 부지런히 꽃을 피우는 한라산의 봄 전령이다.
ⓒ 오희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주의 인터넷신문 <제주의 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겨울, #봄, #꽃샘추위, #꽃망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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