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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한 편이나 제작되었다는 007시리즈에서 '본드걸'로 통칭되는 그들은 하나의 상징이다. 굳이 007시리즈가 아니더라도 검은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 옆에는 항상 반쯤 벗은 의상의 여자가 있다. 여자는 남자의 성공과 지위를 드러내 주는 상징물이다. 그런 점에서 매번 반복되는 007시리즈의 결말은 심히 불쾌하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 시종일관 성적 매력을 드러내도록 설정되는 본드걸들은 마지막에 본드에 의해 '취해진다.' 본드걸은 본드의 전리품이다. 그리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 문학동네
드라마 <대장금>에서 임금이 장금에게 주치의관이 되라 명하였을 때, 갈등하는 장금에게 그의 스승 장덕은 '단 하루를 하더라도 하라'고 말한다. 장덕은 전력을 다해 의술을 연마했지만 병을 고치더라도 양반들은 하룻밤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으로 무슨 상을 주는 양했고, 그를 의관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고 탄식한다. 장덕은 의관이 아니라 여인일 뿐이었다.

본드걸들 역시 마찬가지다. 본드에게도 감독에게도 본드걸은 스파이가 아니라 여자일 뿐이다. 그래서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에도 여자로서 활동하고, 임무가 완료된 순간에는 본드의 여자가 된다. 집단 내의 소수자가 결코 온전한 개인이 될 수 없고 다만 아이콘에 불과하듯, 본드걸은 개인의 지위를 차지할 수 없다. 그래서 매 영화마다 다른 본드걸이 등장한다고 해도 그것은 또 다른 성적 매력을 보여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본드걸들은 사실상 하나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그 많던 본드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본드는 매번 다른 여자를 욕망하므로, 본드를 위해서는 본드걸들이 사라져 주는 것이 마땅하다. 매 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러브신으로 그간의 노력을 보상받고, 거기에 만족하며 떠나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그들의 삶은 지속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영화 내내 자랑하던 몸매를 살려 모델이 될까? 한겨울에도 초미니를 입는 도우미로? 유명세를 타고 부잣집 며느리가 되어 전업주부로? 아니면 많은 여성들이 그러하듯 비정규직 노동자로?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은 007시리즈가 끝나는 바로 그 러브신으로부터 시작한다. 임무를 마치고 러브신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온 본드걸 미미는, 본드에게서 프러포즈를 받고 스파이 생활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본드는 늘 그렇듯이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고 미련 없이 떠난다. 그리고 돌아온 본드에게는 새로운 본드걸이 있다. 미미는 "한번 본드걸은 영원한 본드걸"이라고 생각하지만 본드는 "본드걸은 원래 일회용"이라고 항변한다. 그래서 미미는 스스로 "영원한 본드걸"이 되기로 하고 본드의 상관인 M을 찾아가 스파이 수업을 받는다.

수련 끝에 미미는 살인번호 013을 받는다. 013으로 명명되면서 비로소 '본드의 걸' 즉 누구누구의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이제 미미는 독립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때로는 007을 위험에서 구하기도 하고, 독자적으로 판단하여 상대 스파이의 정체를 캐내기도 한다.

본드가 주인공인 007시리즈에서 튀어나온 미미가 버림받고, 욕망하고, 노력하는 모습은 남성중심으로 편성된 사회에서 여성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닮아있다. 여성들은 스스로가 여성으로 인식되기 이전에, 일단 '개인'이 되기를 원한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특성들 중에서도 제일 먼저 '여성임'이 강조되어, '여성적인' 어떤 일에 제한되거나 누군가를 '돌보는' 역할을 끊임없이 강요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개인으로서 원하는 일에 뛰어들 자유를 원한다.

그래서 미미가 M에게 찾아가 하는 말은 이 시대 많은 여성들과 공명할 것이다.

"007보다 훌륭한 스파이가 될 수 있는데, 왜 폐기처분되어야 하죠?"

덧붙이는 글 | 오현종,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문학동네, 2007, 9500원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오현종 지음, 문학동네(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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