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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병원 전 재경부 1차관.
ⓒ 오마이뉴스 이종호
"유구무언(有口無言)."

평소 잘 아는 정부기관의 한 선배가 박병원·김종갑 두 전직 경제부처 차관의 노골적인 민간기업 행의 문제점을 따지는 내게 한 말이다. 고위 공직자로서가 아니라 평소 존경해온 선배로서 고견을 들려달라는 내 말에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정부 공직자윤리위원회가 우리금융지주 회장 후보인 박병원 전 재정경제부 1차관과 하이닉스 사장 후보인 김종갑 전 산업자원부 차관의 취업을 승인했다.

이는 두 사람의 재직 중 업무가 해당 기업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던 공직자윤리위가 스스로 판단을 뒤집은 것이다.

박 전 차관은 금융정책을 전반적으로 관장해왔고, 김 전 차관은 하이닉스의 이천공장 증설 추진 등에 관여해왔다.

공직자윤리위의 승인은 퇴직 공직자가 재직 당시 담당했던 직무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민간기업에 취업하는 것을 제한해온 공직자윤리법의 기본 취지를 훼손했다. 그런 점에서 공직자윤리위 스스로 존립 근거를 부정했다.

더욱이 업무연관성이 밀접한데도 취업승인을 내준 근거가 공공의 이익이나 국가가 출자·재출자하는 사기업체의 경영 개선을 위해 필요한 경우라는 법의 예외조항에 기댄 것이어서 편법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우리금융·하이닉스 공모 파행 책임은 노 대통령 몫

"적재적소(適材適所)."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 직후인 2003년 1월 8일 당선자 자격으로 정부 부처 중 가장 먼저 중앙인사위원회를 방문해 방명록에 적은 글귀다. 노 대통령은 이후 인사개혁이 국정의 성공여부를 가름하는 핵심 요소라며 기회 있을 때마다 이를 강조했다.

그런 그가 임기 내내 코드인사와 낙하산인사, 보은인사 등 인사시비에 시달린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그 책임을 꼭 노 대통령이 져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우리금융 회장과 하이닉스 사장 공모 과정에서 벌어진 파행의 책임은 노 대통령의 몫이다.

청와대는 무능한 인사를 요직에 앉히는 종래의 낙하산 인사와는 다르다고 항변한다. 유능하고 전문성 있는 인사를 관료출신이라고 해서 기용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더 큰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청와대의 이런 주장은 착각일 뿐이다. 이번 인사에선 무능력한 인사를 앉히는 낙하산 인사보다 어쩌면 더 큰 폐해가 우려된다.

공직자윤리법이 퇴직 후 2년 동안에는 퇴직 직전 3년 간 업무와 관련 있는 곳에는 취업을 못하도록 퇴직 공직자들의 재취업을 엄격히 제한한 취지는 무엇일까?

직업선택의 자유가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부가 법으로 취업제한을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큰 비용을 감수하는 조치다. 더구나 고위 관료 출신의 유능한 인물들을 사회적으로 활용하지 않고 2년 간 놀린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기회손실이다.

그런데도 왜 그런 법을 만들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그로 인한 폐해가 비용보다 더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양이가 생선 가게 주인으로 나서서야...

▲ 김종갑 전 산업자원부 차관.
ⓒ 오마이뉴스 이종호
과연 어떤 폐해가 예상되나? 무엇보다 정부의 정책이나 감독이 올바로 이뤄지지 못할 위험성이 크다. 재경부는 금융정책을 총괄하는 경제부처다. 우리금융은 그 직접적인 사정권 안에 있다. 재경부 차관 출신이 우리금융의 최고경영자가 된다면 정부의 금융정책이나 감독이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뤄질 수 있을까?

박 차관은 아주 유능한 인물일 것이다. 하지만 정부 부처의 책임자들이 유능하다고 해서 정책이나 감독의 대상이 됐던 민간기업의 책임자로 바로 가는 일이 관행화된다면 그 결과는 어떨까? 관료들은 공직에 충실하기보다, 퇴직 뒤 새롭게 옮아갈 기관과의 관계에 더욱 신경을 쓸 것이다. 염불보다 잿밥에 더 마음이 있는 격이다.

아마도 박 차관 같은 양식 있는 인사들은 우리금융 회장이 된 후라도 어려운 일에 닥쳤다고 해서 재경부나 금융감독기구의 현직 동료나 후배들에게 부당하거나 무리한 부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설령 박 차관이 그런 부탁을 하더라도, 재경부나 금융감독기구가 흔들리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박 차관 외에 다른 대다수 고위 공직자 출신들에게도 그런 양식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 극소수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할 위험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극소수의 경우가 현실화하면 결과는 정부정책의 불신과 시장질서의 파괴라는 값비싼 대가로 이어질 것이다. 사실 1997년 외환위기의 주요 원인도 금융감독당국이 금융기관과 유착하면서 제 역할을 못한 것 아니었던가?

정부는 금융감독체계가 많이 개선돼 이제는 그런 위험성이 없다고 주장하지 말라. 윤증현 금감위원장이 현 금융감독체계의 우수성을 강조한 뒤, 채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고위 금감위, 금감원 간부들과 상호신용금고 업주의 불법유착 혐의가 드러난 게 불과 얼마 전이다.

더구나 우리은행과 하이닉스는 지금까지 낙하산 인사 논란이 일었던 기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민간기업이다. 관료 출신이 영향력을 동원해 넘볼 자리가 아니다.

정부나 청와대가 우리은행, 하이닉스의 경우 공적자금이 투입돼 다른 일반기업과는 다르다는 주장을 편다면, 역으로 그렇기에 더욱더 관료들이 제멋대로 주인행세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공적자금은 국민의 혈세로 조성됐다. 또 우리금융과 하이닉스는 수많은 직원들의 정리해고를 포함한 가혹한 구조조정을 거쳐 가까스로 정상화했다.

정부가 할 일은 이들 '생선가게'(공적자금 투입 은행과 기업)에 다시 '쥐'(부실)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고양이'(감시자)가 되는 것이다. 고양이 스스로 생선가게의 주인이 되려고 해선 곤란하다. 국민의 혈세로 살려낸 은행과 기업을 관료들이 전리품으로 챙기려는 것은 국민을 우롱하는 행위다.

▲ 서울 명동에 있는 우리은행 본점.
ⓒ 오마이뉴스 남소연

관치 야욕 노골적으로 드러낸 '안하무인' 재경부

재경부가 박 전 차관을 미는 이유도 설득력이 없다. 재경부에서 제일 먼저 내세우는 근거는, 앞으로 예상되는 우리은행 민영화를 더 잘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은행 민영화는 정부, 즉 재경부가 결정권을 쥐고 있다. 표면적 대주주인 예금보험공사는 재경부 지시대로 움직인다. 그동안 민영화가 지연된 게 문제라면, 책임은 재경부 스스로 질 일이다. 정부 관료 출신이 우리은행을 맡아야 민영화가 잘된다는 주장은 근거가 약하다.

두 번째로, 황영기 현 우리금융 회장이 정부와 잦은 대립각을 세운 것을 이유로 차기 회장은 관료출신이 바람직하다는 주장도 자가당착이다. 스스로 관치를 하겠다는 고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욱 안쓰러운 것은 정부의 안하무인격 태도다. 공직자윤리위가 밀접한 업무 연관성이 있다는 통보를 한 뒤에도 재경부와 청와대는 애초 의도를 밀어붙였다. 박병원, 김종갑 두 전직 차관에게 적용된 예외조항은 앞으로 그 어떤 공직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공공의 이익에 필요하다'는 판단은 앞으로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이 될 것이다. 정부 스스로 국가기구와 법의 존립 근거와 원칙을 부정한 셈이다.

3년 전인 2004년 2월 우리금융지주 회장 후보로 15명이 경합했다. 그 중에는 윤증현 현 금융감독위원장(당시 ADB 이사) 등 거물급 관료출신도 포함됐다. 황영기 전 삼성증권 사장은 이들을 제치고 회장으로 뽑혔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는 노무현 대통령 임기 초반으로, 아직 청와대가 힘을 갖추고 있을 때일 뿐만 아니라 정신을 잃지 않아 관료를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황영기 회장 선임 직후 시장에서는 우리금융의 주가 상승과 신용등급 개선이라는 '황영기 효과'가 나타났다. 하지만 지금은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 말이다. 레임덕이라는 권력의 공백을 틈타 경제관료들, 특히 모피아의 힘은 더 세졌다.

더 한심한 것은 작금에는 청와대와 재경부가 자리 나눠먹기 양태까지 벌인다는 것이다. 덩달아 다른 금융감독기구들도 우리금융에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자기들 숟가락까지 얹고 있다는 얘기까지 들린다.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후안무치한 모피아나 그것을 막는 총기를 잃은 노무현 대통령이나 똑같다."

우리은행의 한 간부의 탄식이 귓가를 때린다. 또 그것에 무관심하거나 외면하는 한국 언론의 현실도 안타깝다.

덧붙이는 글 | 곽정수 기자는 <한겨레> 대기업 전문기자입니다.


태그:#박병원, #김종갑, #우리은행, #공직자윤리위, #민간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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