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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온통 사극이 점령했다. 일 주일 내내 브라운관은 '한복'과 갑옷이 도배한다. 시청률 면에서도 현재 월화는 <주몽>, 수목은 <황진이>, 주말은 <대조영>이 1위로 전례 없는 사극 전성시대를 구가 중이다. 2007년에는 광개토대왕의 일대기를 다룬 <태왕사신기>까지 가세할 계획이다. 제작자들이 사극을 곧 시청률 보증수표라고 여기는 분위기에서 정작 시청자는 볼 게 없다고 항변한다.

차별성 없는 고구려 사극은 이제 그만

@BRI@고구려 사극을 처음 시도한 MBC <주몽>이 늘어지는 전개와 고무줄 편성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할 즈음, SBS는 <연개소문>으로 KBS는 <대조영>으로 가세했다. 건국신화를 여느 일일드라마 못지않게 소소한 일상으로 만들어버린 일명 퓨전 사극 <주몽>은 이제 신화와 역사 모두를 저버린 채 그저 시청률만을 의식한 무협 활극이 된 지 오래다.

<연개소문>이나 <대조영> 또한 역사 기록이 미미해 대부분을 작가의 상상력에 의존해야 하는 탓에, 자칫 엉터리 활극이 될 공산이 크다. 작가군도 한정되어 툭하면 작가의 전작들이 안이하게 재탕되곤 한다. 그럼에도 제작진은 시청률만 올리면 모든 게 용인되는 줄 안다.

일 주일 동안 적어도 본방만 여섯 시간 동안 고구려의 건국과 멸망 과정을 지켜봐야 하는 시청자는 이미 고구려 사극에 물릴 대로 물렸다. 주말 이틀간은 재방까지 합쳐 12시간 이상 사극만 방영된다. 시청권 침해가 아닐 수 없다.

한민족의 전략 무기는 칼이 아니건만

역사 해석의 독창성도 없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시청률 확보의 호기로만 삼고 있다는 개탄 속에 근거 없는 민족적 자긍심과 영웅주의만 난무한다. 애초에 기대한 '역사 바로잡기' 또는 '삼국시대 재조명'은커녕 헐리웃 활극에서 뛰쳐나온 듯한 영웅들만 활개를 친다.

<주몽>에서는 철을 단련하는 기술이 일급 국가 기밀이라는 스토리라인과 달리 졸개들까지 죄다 칼을 차고 나와 휘둘러댄다. 활쏘기의 달인 주몽의 위대함과 차별성은 배제된 채, 할리우드 영화에서 익히 봐온 관습적 칼싸움만 매회 반복된다. 4천만이 아는 신화 속 명사수 주몽은 연출의 편이성에 밀려났다.

지난 해 KBS의 <해신>이나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난중일기>를 비롯한 수많은 사료가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주요 무기가 활이었음을 증언하는데도, 전투장면마다 칼 부딪치는 소리만 요란했다. <해신>의 장보고는 <글래디에이터>를 빼닮은 검투사였다. 온통 칼로 상대를 무찌르는 '사무라이'들만 판치는 사극 속에서, 말 달리며 활을 쏘는 고구려 벽화 속 동이(東夷)족의 기상은 간데없다.

퓨전 사극은 만능키인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조선시대 이전을 배경으로 한 사극은 아예 엄두를 못 냈다. 고증이 너무 어렵고 제작도 힘든 데다 무엇보다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너무 오래 전 역사를 다루면 망한다는 시청률의 공식을 1992년 KBS <삼국기>가 입증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퓨전 사극'이라는 미명 하에 못 다룰 것이 없다. 고증은 아예 무시하고 현대 감각만 앞세운 시대불명의 사극이 양산된다. 한정된 제작비와 인력, 부실한 세트와 소품의 고구려 드라마들은 웃지 못할 촌극이 되기도 한다.

<연개소문>은 미처 세트가 완공되지 않은 채 촬영하느라, 툭하면 배경에 물감도 채 마르지 않은 걸개그림이 등장한다. <주몽>은 고작 스무 명 남짓으로 전투장면을 찍는 데 도가 텄다. '대하사극'은 단지 횟수만 늘어지는 장편 연속극일 뿐 볼거리도 개연성도 없다. 배경과 의상만으로는 조선인지 고구려인지 2006년의 민속촌인지 알 수 없다. KBS <황진이>의 1억원을 호가하는 오색 한복들 또한 패션쇼의 화려함에 지나지 않는다.

노예 주인공마저 공유하는 노예적 상상력

게다가 하필이면 이 모든 사극의 영웅들이 한결같이 천한 '노비' 출신이다. 개천에서 용이 된 희대의 영웅만 부각될 뿐, 역사는 왜곡되고 신화는 짓밟힌다. 부여도 엄연한 우리의 고대국가이거늘, <주몽>에서는 주몽의 적국이자 타도 대상이 됐다. 이른바 독립군인 다물군 수장 해모수(허준호 분)의 아들 주몽은, 식민지 노예 신분이다.

해신으로 칭송받는 위대한 코스모폴리탄 장보고는 드라마 <해신>을 위해 노예로 팔려가 검투사로 전락했다. 젊은 연개소문은 김유신의 노비, 대조영은 연개소문의 노예 개동이가 되었다. <황진이>는 황진이의 문학성 대신 국가에 속한 몸이라는 사실만 강조해 연인과의 야반도주만 중점적으로 그렸다.

비슷한 시기에 일제히 방영하는데다 인물과 배경은 물론 전개까지 대동소이한 고구려 사극 열풍은 소모적이고 안이하다. 기껏 입지전적 인물을 노예에서, 민족의 미래를 전쟁과 정복에서 찾는 식민지적 발상과 빈곤한 상상력은 사극 전성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향잡지와 데일리서프라이즈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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