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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재외동포NGO대회가 지난달 24일부터 27일까지 서울에서 열렸습니다. 지구촌동포연대(KIN)가 주최하고 <오마이뉴스>가 후원한 지난 행사에서는 역사와 인권의 관점에서 각국 재외동포의 삶과 역사, 그리고 미래상을 한국정부와 시민사회가 올바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고, 각국 재외동포 사회의 현안에 대한 문제해결의 청사진을 제시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700만 동포아리랑'이라는 기획기사를 연재합니다. <편집자주>
▲ 베를린한글학교 유아반 : ‘ㄷ’자를 배우고 있다. 색칠도 하고 풀로 붙이고…. 'ㄷ'자가 기억에 남아야 할 텐데.
ⓒ 이지현

"우당탕탕…."

지난달 20일, 가을 방학을 마치고 돌아온 첫날.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학교 복도는 무슨 일이라도 난 것처럼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학생들이 각자 자기의 교실로 요란스럽게 이동하는 소리다.

유아반(3·4세)을 들어가 보니, 그새 아이들이 선생님과 함께 넓은 카펫 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작업'에 열중이다.

오늘은 'ㄷ'자를 배우는 날.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 울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도화지에 그려진 'ㄷ'자를 크레파스로 색칠하고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글자 주위에 나비를 붙이고 있다.

여기까지 보면, 한국에 있는 여느 유아원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이다. 하지만 이곳은 먼 이역 땅. 올해 25주년을 맞이한 '베를린한글학교'(Schillerstr, 124-127 10625 Berlin)의 교실 모습이다.

[베를린 한글학교] 줄어드는 학생... 하지만 배움은 계속된다

이 학교는 현재 학생수 65명에 교사 9명의 독일내에서는 제법 큰 규모다. 3·4세를 위한 유아반부터 초등·중고등반·성인반까지 개설돼 매주 금요일 오후 2시간 30분 동안(오후 4시 30분~7시) 한국어 수업이 진행된다.

옆반 문을 살짝 열어보니 6명의 고급반 학생들이 새로운 선생님 앞에서 진지하게 자기소개를 하고 있다.

"저는 OOO고요, 부모님의 고향은… 독일에는 OO년에 오셨고요…."

별 거리낌 없이 자신을 소개하는 것으로 보아서 이런 경험이 많은 듯 하다. 독일어 억양이 약간 들어간, 그러나 거의 완벽한 한국어 실력이다.

▲ 세종학교 성인반: 한국아내와 결혼한 독일인 남편들, 독일인아빠와 함께 나온 아들, 사할린동포 등 다양한 이유로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성인반. 특히 20년간 한국아내와 살았지만 이제야 진지하게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두 독일인 남편들이 대단한 열의를 보여주었다.
ⓒ 이지현
▲ 세종학교 성인반의 수업내용
ⓒ 이지현
성인반에선 얼마 전 한국인 남편과 경주에서 결혼했다는 독일인 여학생 파리다가 선생님을 따라 열심히 문장을 읽고 있다. 그는 "글을 읽을 수는 있지만 한국어 발음이 어렵다"면서 선생님의 입모양을 주의깊게 보고 있다. 그는 또 "남편을 만나기 전엔 한국에 대해 잘 몰랐다"며 "빨리 배워 시댁 식구들과 원활한 대화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수업을 받고 있는 동안 학부모 대기실의 움직임도 분주하다. 미리 준비해온 빵과 햄, 치즈, 과일…. 쉬는 시간에 학생들이 먹을 저녁 간식을 준비하고 있다. 한 어머니는 "수업이 저녁이니까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일찍 집에 오거나 밖에 나가서 사먹느라 수업에 늦는 경우가 생겨서 학부모들이 직접 저녁간식을 만들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윽고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 약속이나 한 듯 학생들은 학부모대기실로 우르르 몰려가 저마다 빵 한개씩을 들고 나온다. 빵 한개에 내는 50센트는 학교 운영비에 보태진다고 한다.

"엄마, 때려서라도 한글학교 보내지 그랬어요"

▲ 베를린한글학교 학부모 대기실 풍경 : 아이들을 한글학교에 데리고 와서 수업이 끝날때까지 학부모대기실에서 담소를 나누며 기다리는 학부모들. 그동안 학생들이 쉬는시간에 먹을 간단한 먹거리를 함께 만드신다.
ⓒ 이지현
베를린한글학교는 1981년 설립됐다. 학생수가 300여명이었던 때도 있었으나,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 현재는 65명 정도다. 학생회비와 후원금에 의존하는 재정여건은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의 다양한 필요를 채워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이 때문에 학생들이 떠나는 안타까운 일도 있다며 박은순 교장은 아쉬움을 나타냈다.

학부모와 교사들의 고민거리는 학교에 오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달래는 일이다. 한국어의 필요성을 실생활에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 자녀를 모두 한글학교에 보낸다는 오혜옥씨는 "부모는 강조하지만 여기서 태어난 아이들은 한국어를 잘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며 한글교육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하지만 그는 "대학생 정도 되면 어릴 때 배우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2세들이 많다"고 덧붙였다.

이 학교의 학부모인 송영숙씨 역시 비슷한 경험을 얘기했다. 스무살 넘은 큰딸이 "엄마! 왜 나를 때려서라도 그 때 한글학교에 보내지 않았어요!"라며 원망하기도 한다고.

교사 김미아씨(6년차) 또한 "많은 2세들은 대학생쯤 돼서 '당연히 한국말을 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독일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다시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한다"면서 "하지만 나이가 들어 한글을 배우다보니 많이 힘들어하거나 실망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렇듯 자녀들에게 한글교육을 시킨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학부모들의 열정은 대단해보인다.

'한글=한국 문화'... 어렵지만 가르쳐야 할 일

▲ 베를린한글학교 고급반 : 새로운 친구들과 새선생님을 만난 첫날,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고 있다.
ⓒ 이지현
▲ 베를린한글학교 중급반 수업광경 : '...하는동안', '...하는중에' 를 이용해 작문중이다. 중국인 2세 엔디 옹(왼쪽줄 세 번째 남학생)은 한국드라마를 통해 한국식 옷차림, 한국식 행동, 화장스타일 등이 독일에 있는 중국인 뿐아니라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 사람들사이에도 유행이라며 중국어도 배워야하는데 중국어는 엄마아빠의 강요라 하기 싫고 한국어는 스스로 재밌어서 열심히 한단다.
ⓒ 이지현
학부모 신희정씨는 "독일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반한국인임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 한글학교에 데리고 온다"며 "일주일에 2시간 30분동안 많은 것을 배울 수는 없겠지만 한국과 한국문화에 대한 끈을 놓지 않게 한다는 점에서 한글학교교육은 너무나 중요하다"고 말했다.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독일어로 시끌벅적 얘기하고 있는 학생들을 만났다. 학부모님들의 고민처럼 한글학교 이외에 한국어를 쓸 기회가 별로 없음에도 한국어는 2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궁금해서였다.

"순전히 부모님의 강요 때문"이라는 투정섞인 대답부터 "부모님과 앞으로 태어날 자신의 자녀들을 이어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생각에 배우고 있다"는 고등학생의 대답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중 자신을 1.5세라고 소개한 P(18)씨는 "어릴 적 독일에 와서 한국어를 잊을 수도 있었는데 부모님이 독일어로 말하면 응답을 해주지 않아서 한국어를 잊지 않게 됐다"며 "얼굴이 한국사람인데 한국말 못하면 어떻게 해요? 그러면 인정을 못 받잖아요, 2세들이 한국어 열심히 배웠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한다.

실질적인 이유로 한국어를 배우려는 학생들도 많아 보인다. 내년에 한국에 있는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다녀올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N(19)씨는 "한국어를 잘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져요"라며 "독일어와 한국어가 되면 더 많은 길이 열리니까요"라고 말했다.

[세종학교] 한글도 가르치고 민간 외교도 합니다

▲ 세종학교 장구반 : 한글학교 시작시간보다 1시간 일찍 나와 장구를 배우고 있는 어린이들. 재독한글학교로서는 처음으로 장구, 한국무용,붓글씨 등의 문화교육을 도입함으로써 독일전역 한글학교의 한국문화교육 확산에 기여했다.
ⓒ 이지현
"덩기덕 쿵딱! 덩기덕 쿵딱!"

낙엽이 흩날리는 10월의 금요일(27일) 오후에 찾아간 '세종학교'(베를린 슈판다우에 위치)의 교정에서 울려 퍼지는 귀에 익은 장구가락이다. 소리를 찾아 들어간 방에는 7~8살 또래로 보이는 3명의 아이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선생님의 설명에 맞춰 열심히 장구를 배우고 있다.

아직 한국어는 어색하지만 장구에 임하는 자세는 그 누구보다 진지하다. 그 중 1년 이상 장구를 배웠다는 한인2세 도미니크(8)는 "학교 음악시간에 자신이 할 줄 아는 악기를 소개하는 시간이 있는데 독일친구들에게 장구실력을 자랑하고 싶어요"라며 선생님께 빨리 배우게 해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오후 5시, 장구반 수업이 끝나고 본격적인 한국어 교육이 시작됐다.

수업준비를 위해 교무실에서 수업자료를 준비하는 교사 이정미씨(3년차)에게 세종학교 교사로 지원하게 된 동기에 대해 물었다. 그는 "교육철학이 분명하신 분들이 이 학교를 설립하셨고 이끌어가신다는 확신이 들어서 오게 됐다"며 "이 곳의 교사들은 주로 유학생이지만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투철한 교육정신과 열정의 소유자들"이라고 평가했다.

"나는 오늘 이발을 했어요"

▲ 세종학교 초급반 : 수업중 칠판을 보며 함께 문장을 읽던 아이들이 기자가 사진을 찍자 뒤를 돌아보고 있다.
ⓒ 이지현
수업이 시작된 초급반. 선생님의 선창에 맞춰 "나는 오늘 학교에 갔어요! 나는 오늘 이발을 했어요! 나는 오늘 그림을 그렸어요!"를 또랑또랑 합창했다.

올해 13주년을 맞이하는 세종학교는 학생수 30여명, 장구반을 포함해 5명의 교사와 유아반부터 성인반까지 수업이 개설되어 있다.

'세종학교'도 '베를린한글학교'와 같이 학생수 감소로 인한 어려움에 처해 있다. 김종한 교장은 "학생들이 50명 정도였으나 30명으로 줄었다"며 "세종학교는 90% 이상이 한독가정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더 어려움이 있다, 부모의 열정은 크지만 학생들은 그렇지 않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2세들이 거의 졸업을 한 상태에서 3세들이 들어오지 않는 한 수적인 저조현상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학생 감소 현상을 극복하고, 효과적인 교육을 위해 세종학교는 93년 설립 초부터 한글교육과 더불어 '문화교육'을 실시해왔다. 한글 및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전수하는 전략이다.

김종한 교장은 10여년 전 장구반을 만들었고 붓글씨·부채춤 등을 비롯한 문화교육을 통한 접근은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각 한글학교의 문화교육이 일반화되어 있지만 세종학교가 최초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한다. 독일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공연을 한 적 있는 '천둥소리' '신명' 등의 교민자녀 풍물패는 세종학교 출신들로 구성됐다.

문화교육, 한국을 지역사회에 알리는 전도사

▲ 세종학교 중급반 : 며칠 전 있었던 일을 얘기하면서 발음과 문장교정을 받고 있다. 한 학생이 "어제 술많이 먹고 쉬~했어요"라고 말하고 있다. 반복되는 "쉬~했어요"에 당황한 교사. 그러나 이 학생은 "취했어요"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 이지현
▲ 베를린한글학교 박은순 교장선생님(왼쪽)과 세종학교 김종한 교장선생님(오른쪽).
ⓒ 이지현
세종학교는 이러한 문화교육을 독일지역사회로 확장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실제 세종학교 장구반은 슈판다우 지역의 구청행사와 페스티벌에서 정기적으로 공연하고 있다. 또 10여년에 걸쳐 독일의 타 단체 및 기관에 초청을 받아 화려한 부채춤과 장구연주를 비롯해 한국음식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이며 한국인과 독일인이 정서적으로 보다 가까워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교사 나유신(3년차)씨는 "독일인들의 입장에서 한국은 아직 낯선 나라"라면서 "그런 점에서 봤을 때 한글학교는 해외공관같이 민간외교 역할까지 담당하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세종학교의 매년 설립기념행사에는 슈판다우 지역 구청장, 국회의원 등 많은 정치인들도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독일에서 한글 교육을 하고 있는 두 학교가 공통적으로 우려하는 것은 앞으로 3·4세로 갈수록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흐려질 수 있다는 점과 재정적인 어려움이다. 특히 세종학교는 정부의 재정지원이 전혀 없는 상태이며 두 학교의 교장은 수년째 무보수로 일하고 있다.

김종한 교장은 "언어 속에 문화가 녹아있기 때문에 한국어를 배우지 않고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전수할 수 없다"면서 "해외 한글학교는 개인이 아니라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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