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타닉> 포스터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은? 한석규, 김혜수 주연의 <닥터 봉>(1995)이다. 관객 수는 38만 명(서울관객). 그러나 같은 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죽지 않는 남자 브루스 윌리스의 <다이하드3>는 100만 명도 훨씬 넘었다. 그 당시 개봉영화 흥행작 순위를 보면 할리우드 영화들이 단연 선두였다. 더 오래 전인 1990년, 죽어서까지도 사랑한 연인의 애절한 이야기를 담은 <사랑과 영혼>도 168만 명(서울관객)을 끌어들였었다. 이후 배가 뒤집혀 죽을지언정 우리 사랑은 영원하다고 노래한 <타이타닉>(1997)의 기록도 197만 명(서울관객). 그때 만해도 한국영화는 아무리 잘나가도 40~50만 명을 넘지 못했다. 적어도 <쉬리>(1999)가 244만 명(서울관객) 관객을 동원하며, 국내 박스오피스 1위를 탈환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2005년 극장가에서는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상반기 극장가를 장악한 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였지만 최고 흥행작 순위를 살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주전쟁> <아일랜드> 같은 영화들이 100개가 넘는 스크린을 차지하며 관객몰이에 나섰지만, '800만 관객 동원의 주인공'은 한국영화 <웰컴 투 동막골>이다. 500만 관객 동원의 주인공도 <말아톤>이다. 지금, 할리우드 영화 흥행작이라고 해봐야 200만 명을 넘지 않는다. 할리우드의 아성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징후일까. <혈의 누>에 치이고, '금자씨'에 밀리고 올해 5월 초, 하루 차이로 <혈의 누>와 <킹덤 오브 헤븐>이 나란히 개봉했다. <혈의 누>는 톱스타 차승원이 주연하고 <번지점프를 하다>로 연출력을 인정받은 김대승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로 개봉 전부터 주목 받았다. 조선시대 연쇄살인을 소재로, 잔인한 핏빛 미학을 스크린 속에 구현시킨 <혈의 누>는 그 폭력성 때문에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킹덤 오브 헤븐>을 밀어내고 전국관객 약 250만 명을 동원, 당시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했다.
 같은 날 격돌한 <혈의 누>와 <킹덤 오브 헤븐>. 결과는 <혈의 누>의 승리였다!

반면 <킹덤 오브 헤븐>은 개봉 3일 만에 전 세계 6700개 상영관에서 5600만달러를 벌어들였다는 명성에 누가 될 만큼 저조한 실적을 보였다. 개봉 첫 주 <혈의 누>와의 대결에서 주춤하더니, 3주 만에 <남극일기> <혈의 누> <연애술사> <댄서의 순정>에 차례로 순위를 내줬다. 결국 개봉 4주 차에 박스오피스 순위 9위로 밀려나며 전국관객 140만 명 동원에 그쳤다. 지난 7월 7일 개봉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대작 <우주전쟁>과 21일 개봉한 <아일랜드>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 이 두 영화는 운 좋게도 뚜렷한 한국영화 개봉작이 없는 틈을 타 관객의 주목을 끌며 한 주 걸러 한 번씩 1위 자리를 지켰다(물론 이 시기 <연애의 목적> <분홍신> <여고괴담4>편이 줄줄이 개봉했지만 이들 영화에 영향을 미칠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29일 <친절한 금자씨>가 개봉함과 동시에 금자씨에 친절하게 1위 자리를 내주었다. 여기에 8월 4일 <웰컴 투 동막골>이 가세함으로써 <아일랜드>는 올해 개봉된 외화 중 가장 많은 관객 115만 명(서울관객)을 기록하며 아쉽게 간판을 내려야 했다. 그나마 이 영화가 이 정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나쁜 녀석들> 시리즈, <아마겟돈> <진주만> 등을 차례로 성공시킨 마이클 베이 감독의 네임 밸류에 기인한 바가 크다. 할리우드 스타 이름값 하던 시대는 갔다? 한편, 한국영화에 밀리고 <아일랜드>에 뒤진 <우주전쟁>은 '스티븐 스필버그'와 '톰 크루즈'의 결합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으나,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속속 치고 들어오는 또 다른 블록버스터 영화 <스텔스> <판타스틱4> 등에 1위 자리를 내준 '비운의 블록버스터'가 됐다. 한 달 사이 100만 명(서울관객)에 육박하는 관객들을 불러 모아 체면치레는 했으나, 전체적으로 떨어지는 완성도와 허무한 결말로 <아일랜드> 보다 적은 스코어를 기록했다.
 <웰컴투 동막골>의 한 장면
ⓒ 필름있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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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8월 한 달간은 <웰컴 투 동막골>이 1위 독주체제를 굳힌 가운데, 국내외 군소영화들이 난립하는 양상을 띠었다. <미스터&미세스 스미스>가 '브래드 피트-안젤리나 졸리'의 스캔들에 힘입어 반전의 기회를 노렸으나, 역부족이었다. 하반기 극장가에서도 할리우드 영화는 전혀 빛을 발하지 못했다. 한국영화 <외출> <미스터 주부퀴즈왕> <사랑니> <미녀와 야수> 등이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댔으니 그럴 법도 하다. 9월부터 11월까지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보면, <가문의 영광> <형사-듀얼리스트>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너는 내 운명> <광식이 동생 광태> 등 대부분 한국영화가 차지했다. 조니 뎁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 러셀 크로의 <신데렐라맨>, 니콜 키드먼의 <그녀는 요술쟁이>, 맷 데이먼의 <그림 형제: 마르바덴 숲의 전설> 등 할리우드 톱스타들의 이름을 내건 영화들조차 기대와 달리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제는 할리우드의 그 어떤 특급 배우의 이름도 먹히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미국적인 영화, 우리가 왜 열광하나 그런가 하면, 초능력을 가진 서양의 '맨'들 역시 국내 관객들에게 이렇다 할 대접을 받지 못했다. 올해 개봉한 <배트맨 비긴즈>와 <판타스틱 4>가 그 예. <스타워즈> 시리즈 최종판 <스타워즈 에피소드3-시스의 복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개봉 첫 주 서울관객 20만1천여 명, 나흘 동안 전국 관객 63만여 명, 유명세에 비해 그리 대단할 것 없는 성적이었다.
 시계 방향으로 <아일랜드>, <우주전쟁>, <스타워즈 에피소드3-시스의 복수>, <미스터&미세스 스미스>.

사실 코믹스를 차용하거나 다수의 미국인들이 선호하는 책, TV시리즈, 고전들을 영화로 리메이크 하는 경우, 자국 흥행은 성공했을지 몰라도 우리나라에서 만큼은 예외였다. <스파이더 맨>이 특별한 케이스였다 뿐이지, 실상 만화를 원작으로 한 <엑스맨> 시리즈나 <데어데블> <배트맨> 시리즈는 초유의 흥행 성적을 낼 만큼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원작에 열광하는 미국인들의 '정서'가 우리에겐 없기 때문이다. 추상적이긴 하지만 '정서'의 문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흥행 요소이다. 올 초 북미에서 '4주 연속 1위'를 차지한 코미디 영화 <미트 페어런츠2>의 경우도 우리나라에서는 3주간 중하위권을 맴돌다 순위권 밖으로 떨어져 나갔다. 상견례는 만국 공통일 수 있지만, 그 속에 숨어있는 유머나 감동의 코드는 지극히 '미국적'이었던 탓이다. 한국영화의 비약적 성장, 할리우드 "비켜" 길게 말하지 않아도 요즘 관객들이 할리우드 영화보다 한국영화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할리우드가 그들의 스타를 이용해 전 세계 스크린을 장악했듯, 우리도 장동건 최민식 송강호 설경구 등 매력적인 스타시스템이 구축되었다. 또 박찬욱이나 봉준호, 류승완, 김지운 등 실력 있는 스타 감독들도 여럿 배출됐다. 게다가 기존에 찾아볼 수 없었던 한국영화의 다양한 시도는 관객들의 이목을 자국 영화로 집중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늘 로맨틱 코미디나 신파 멜로,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영화들을 양산했던 과거에 비해 액션, 느와르, 드라마, 공포 등 장르가 다양해진 것. 그에 걸맞게 소재들도 풍부해졌다.
 <너는 내 운명> 중 한 장면

실화에 근거를 둔 자폐아 이야기(<말아톤>)나 시골농촌 총각과 에이즈 환자의 사랑을 다룬 이야기(<너는 내 운명>), 권투(<주먹이 운다>), 연쇄살인(<혈의 누>)은 물론이고, 남극탐험대(<남극일기>), 여자의 복수(친절한 금자씨>), 최초 여성 비행사(<청연>) 등 이루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로운 이야기거리들로 포진했다. 여기에 보다 탄탄해진 감독들의 연출력과 한층 업그레이드된 음악, 미술, 특수효과 수준도 한국영화의 주목도를 높이는데 한몫했다. 한국영화의 이러한 성장은 규모 면에서는 게임이 안 될지 몰라도, 할리우드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자막에 대한 부담을 떨쳐버릴 수 있는 게 어딘가. 한국적 할리우드 영화 가능할까?
 <해리포터와 불의 잔> 포스터
그렇다면, 정말 할리우드 영화는 이제 설 자리가 없는 것일까. 최근에 개봉한 영화를 보면, 그렇지만도 않은 듯하다. <해리포터와 불의 잔>이 첫 주말 전국 120만 관객을 동원한 것. 한국영화가 관객동원 1천만을 기록할 만큼 엄청난 신장세를 기록한 것은 사실이나 여전히 할리우드 영화의 여진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다만 상대적으로 한국영화의 질적 발전이 할리우드 영화의 입지를 좁게 만들었을 뿐. 다양한 장르의 한국영화 수급이 어려웠던 과거에는 쏟아져 들어오는 할리우드 영화가 관객에게 위안이 됐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영화에서 위안을 찾는 관객이 늘고 있다. 어쩌면 할리우드 영화는 이제 예전처럼 거대 성공을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만약 한국시장에서 1천만 관객을 원한다면 그에 걸맞은 문화적 코드와 정서적인 차이를 감안한 한국적인 영화를 제작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실현 불가능하다. 할리우드는 언제나 '전 세계' 관객을 대상으로 영화를 제작하니 말이다. 바로 그 점에 할리우드 영화의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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