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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이 먹는 학교 급식 재료에 대한 학부모들의 관심은 바람직했다. 우리 나라에 수입 농산물이 급증하면서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외국산 농산물, 유전자 변형 농산물들이 학교 급식의 식재료로 쓰일 것을 우려한 학부모와 시민단체들은 결국 여기저기에서 ‘급식조례제정 시민운동본부’를 만들어 급식조례 제정 운동에 나섰다.

급식 재료 구입 시 국내산 농수축산물을 쓸 것을 명문화한 조례를 제정한 광역의회는 14개, 기초의회는 조례를 준비하고 있는 의회까지 합하여 140여개가 되는데, 의회가 주민들의 바람을 그대로 반영시켜준 사례로 기록될 일이었다. 그러나 경기도, 서울시 의회의 조례 제정에 대해 행자부를 비롯하여 경기도, 서울시 집행부는 대법원에 무효 청구소송을 제기했으며 나머지 자치단체들의 실정도 다 비슷하다. 이 소송에 대한 최초의 판결은 결국 조례 무효였다.

이 무효 소송은 전라북도 교육감이 제기한 것으로, 전라북도 교육위원회가 발의 의결한 조례를 절차에 따라 도의회에서 최종 승인했기 때문에 전라북도 의회가 피고가 된 것이다. 이 상황을 두고 국민들은 전라북도 교육감과 무효 판결을 한 대법관들을 향해 “대법원은 어느 나라 대법원이냐”, “나라를 팔아먹는 친일파와 같다” 라며 분노를 토로하고 있다. ‘전북연대회의’ 역시 "제 나라 국민의 편이 아닌 강대국의 이해가 대변되는 국제기구의 손을 들어주는 이 현실을 주권국가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라며 심지어 ‘국치’의 날이라고까지 말한다.

주민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조례 제정에 대해 기관장이나 단체장이 무효 소송을 제기한다는 것이 주민을 배반하는 행위로 보이긴 하지만, 조례의 공포권을 가지고 있는 그들로서 그 조례가 상위법에 위배되는지의 여부를 확인하는 일은 일차적인 책무이기도 하다. 또한 대법관들도 광역지자체의 조례가 국제 협정에 위배되는지의 여부를 판단할 권한에 따라 판결을 내린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전라북도교육청의 제소나 대법원 판결은 사려 깊지 못한 것으로 비판받을 여지가 크다. 송기호 변호사의 지적처럼, 조례가 WTO의 협정에 위배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외국 정부가 아닌 우리 나라 지자체, 그것도 교육청이 직접 제소했다는 점, 그리고 대법원이 WTO 협정을 국내법과 동일하게 직접효력을 명시적으로 인정했다는 점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가능성이 크다.

또한 국회는 WTO 협정과 관련하여 얽혀 있는 여러 권한들을 분명하게 재정립하지 않고 그 권한의 경계들을 모호하게 만들어버림으로써 이런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만든 장본인인 것이다. 그러니까 급식 조례 무효 판결로 인해 다시 보아야 하는 이제까지의 문제, 그리고 앞으로의 문제는 WTO 협정의 비준 과정이며, WTO 협정의 국내효력이며, 그로 인해 파생되는 여러 불이익과 위험에 대한 정치인들의 태도이며, 정치인들의 태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반 국민들의 의지이다.

의회의 민주주의적 의사 결정보다 위에 있는 협정들

의회의 참여권을 뛰어넘고 의회의 기능을 무력화하는 협정들은 더욱 광범위하게 만들어지고 더 강력한 힘으로 국가 안에서 작용하는데 그것이 바로 국제 협정이며 그 대표적인 것이 WTO 협정이다. 헌법의 한 부분이 되거나, 헌법에 따라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게 되는 국제 협정은 입법권을 가지고 있는 헌법 기관인 의회와는 아무 상관없이 국가의 밖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간단하게 말해 WTO 협정은 거의 모든 나라들에서 의회의 사전 협의가 없이 비준만을 거의 강제적으로 받아낸 협정이다. 이 협정에 대해 각 나라의 의회들은 연구도 반대도 수정도 할 기회가 없었고, 정부가 밖에서 들고 온 협정서에 정신없이 비준해주었을 따름이다.

그러니, 물품·자본·서비스·지적 소유권·투자 등 모든 경제적 활동의 국제적 자유를 의미하는 WTO 협정이 국경과 민족국가의 개념을 뛰어 넘어 세계문명을 이룰 수 있는 최고의 발판이라는 세계적 신념에 대해 의심할 능력도, 거부할 힘도 없었던 정치인들이 자국의 민주적 헌법의 권위를 와해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국적 기업 정신을 가진 자들인 OECD 관리들이 만들어 낸 WTO 협정은 환경파괴·개인의 정보유출·부당해고 등의 불법들을 합법화시키는데, 국내법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국가간의 협약이라는 절차를 통해 국내로 도입된 것이다. 이 협정은 너무도 전문적이고 너무도 국제적이고, 또 너무도 시대적이어서, 누구도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연구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누구도 그것을 거부할 집단을 형성하지도 못하고, 또 그것을 비난하며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을 감당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독일에서 헌법의 주요 원칙으로 경제적 자유화가 채택되었다면, 그리고 만약 그러한 헌법개정이 감행된다면 대중적인 분노가 폭풍처럼 일어났을 것이다"라는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헤르만 셰어의 말에서 한 국가가 서로 상반된 정치규범에 의해 혼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일 연방의회는 WTO 협정 비준에 대한 사전 통보도 받은 바 없이, 그리고 내용을 읽어볼 수 있는 공식 자료도 없이(협정서는 물경 2만장에 달한다고 한다), 1995년 1월 1일에 WTO가 출범할 수 있게 해달라는 정부의 요구에 만장일치의 형식으로 비준해주었던 것이다. 보통 비준과정이 1~2년이 걸리는데, WTO 협정 서명이 있은 후 10주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WTO협정, 빠져나올 길은 없는가?

경제적 활동의 국제적 자유는 그러면 ‘세계문명의 황금기’를 가져왔는가? WTO 협정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들의 대답을 보자.

“글로벌화와 국제적인 불균등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파이낸셜 타임즈)
“이는 국내의 기업보다 다국적 기업의 특권을 보장하여 무법의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프리츠 글룬크)
“글로벌 자유 무역은 융합이 아니라 국가의 해체를 가져올 것이다.” (전 세계은행 경제학자 헤르만 달리)
“경쟁 근본주의자들은 이론적으로 매우 공격적이며 판단에 맹목적이며 평가와 판단에 있어 당파성이 강하다.” (환경단체 ‘리스본 그룹’ 회장 리카르도 페트렐라)

이 모든 비판은 글로벌화가 전 세계에 부유함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약속했던 것과는 정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 수질과 토양 오염 등 환경 파괴와 고용불균등, 국내기업의 붕괴, 외국 투자 기업들의 기습적인 폐업 등 이미 우리 나라에서도 그 해악이 끝없이 드러나고 있다.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의회 비준 과정에서도 그 협약서의 내용을 꼼꼼히 살피고 명백한 반대토론을 한 의원은 거의 없었다. 우리 나라 헌법 6조 1항 ‘헌법에 의하여 체결·공포된 조약과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와 WTO협정의 연관성을 의원들은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회는, 1995년 <세계무역기구 협정의 이행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애초 법률안 원안에 있던 ‘우루과이라운드 협정은 이 법에 특별한 규정을 두거나 개별 국내법을 개정하지 않은 사항에 관해 국내법의 효력을 상실 또는 배제하지 못한다’라는 제3조를 최종 심의과정에서 삭제했다. 그러니 지방의회가 제정한 조례들이 헌법 조항에 의해 무효 판결을 받는데 국회에서는 뒷짐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급식조례 무효 소송에 낙망하고 분개하고 있는 학부모와 단체들을 기실 더욱 암담하게 만들 것은 그 결과에 대한 불만을 쏟아낼 대상이 묘연할 뿐 아니라 미로처럼 널려있는 국제법의 외피만을 확인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대안이 있지 않을 수 없다. 의회의 탈민주주의화와 탈권력화를 그대로 느끼며 국가기관의 무기력함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정당과 정치인들이 아니라, 바로 그 이해당사자들인 국민들이다. 우리가 잘 기억하고 있듯 국제 협정에 필사적으로 반대하고 국경을 넘나들며 시위하고 국제 협정에 반대하면서 또 다른 흐름을 만들어 내고 있는 사람들은 농민과 노동조합과 시민단체들인 것이다.

글로벌화의 문제와 위험들이 계속 노출되고, 국가 기관이 권한을 상실하고, 의회 민주주의가 파괴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협정을 지키고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제기는 국민으로부터 나와야 할 것이다. 정당한 국민의 요구를 정부가 끝까지 외면한 채 WTO 협정 가맹국이라는 변명, 심지어 남의 나라들은 인정하지도 않는 WTO 협정의 직접적인 법적 효력을 먼저 앞서서 인정해가는, 사대적 순응주의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전북지역 인터넷 대안 신문 참소리에도 함께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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