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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탑봉에서 바라본 불탄 천태산. 꺼진 줄 알았던 불이 재점화한 곳이 망탑봉 근처라고 한다.
ⓒ 안병기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자라가 논다 자라가 논다. 양산 백사장에 자라가 논다.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장끼가 논다 장끼가 논다. 양산 수풀 속에 무수리 장끼가 논다."

'양산가'라는 이 노래 속에 나오는 양산은 충북 영동에 있고, 양산 8경 중 제1경인 천태산 영국사는 창건된 지 1300~1400년이 흐른 천년고찰이다.

5월 2일 오후 햇살은 더할 나위 없이 화창했지만, 천태산은 화상당한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고, 절로 올라가는 진입로 입구에는 화재로 인해 당분간 방문객을 사절한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꾸역꾸역 산길을 걸어 올라간다. 산자락과 계곡에서 5월의 신록이 풍기는 내음이 코를 찌른다. 태생이 산골 촌놈인 나는 이 풋풋한 내음이 좋다. 능선을 타고 넘실거리던 화마가 여기까진 침범하지 못한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 삼단폭포. 폭포를 이루는 바위가 깔끔하고 수려하다.
ⓒ 안병기
조금 더 올라가니 장대한 폭포가 오랜 봄 가뭄을 못 견디겠다는 듯 길게 혀를 빼물고 있다. 3단 폭포라 쓰인 팻말이 보인다. 바위가 3단으로 깔려 있으니 3단 폭포라고 부르는 건가? 난 이 폭포가 보여주는 장엄한 아름다움에 비해 견딜 수 없을 만큼 단순한 이름이 싫었다.

바위가 마치 하얀 비단을 깔아놓은 듯 맨질맨질하다. 여름 소나기 끝에 여기 와서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면 세상 시름이 다 풀릴 것만 같다.

영국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통일신라 후기에 창건되고 난 후 몇 차례 중창을 거듭한 것으로 추정된다. 맨 처음 절 이름을 '국청사'라 하였으나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서 멀지 않은 옥천군 이원면 마니산성에 머물던 공민왕이 국청사에 들러 나라의 안정과 국민의 평안을 기원하였으므로 이름을 영국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 영국사 초입에 서 있는 은행나무. 수령이 천년이 넘었다고 한다.
ⓒ 안병기
금강역사가 된 천년수령의 은행나무

영국사에 이르는 길엔 일주문도 금강문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절 입구에는 천년이 넘는 동안 한결같은 자세로 불법과 가람을 수호해온 은행나무 한 그루가 마치 금강역사처럼 버티고 서 있다. 천연기념물 제223호인 이 은행나무는 높이 31.4m, 가슴높이 둘레 11.54m 정도로, 가지는 사방으로 퍼져 동서로 25m, 남북으로 22m나 되며, 가지 한 개는 땅에 닿아 뿌리를 내리고 독립된 나무처럼 자라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국가의 큰 난리가 일어나면 소리 내어 운다고 한다. 나무는 따로 보호조치를 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단단한 금강의 몸을 가졌다. 나무 옆을 흐르는 작은 계곡에서 충분한 수분을 공급받기 때문이 아닐까.

▲ 새로 지은 이층 누각 만세루. 대웅전으로 대신 쓰이고 있다.
ⓒ 안병기
4년 전 새로 지었다는 이층누각인 만세루가 길손을 맞는다. 만세루 누하를 지나 계단을 밟는다. 그러나 반달처럼 떠올라야 할 대웅전 대신 객을 맞는 건 비계를 잔뜩 매어놓은 공사현장이다. 충북도 유형문화재 61호인 대웅전은 해체보수공사 중이다. 지금은 만세루가 대웅전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만세루 앞에는 커다란 홍단풍이 가지를 뻗고 있어 절 마당은 때 아닌 가을 분위기가 난다. 45년 된 단풍나무라고 한다. 정확한 연대가 가능한 것은 이 나무를 자기가 심었다는 보살이 아직도 이 절에 다니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 해체 복원중인 대웅전. 위 사진은 문화재청 자료이며, 뒤에 보이는 작은 전각이 산신각이다.
ⓒ 안병기
대웅전은 없다

지나간 일이긴 하지만, "탱화 등 이동이 가능한 문화재는 옮겼지만 대웅전과 부도 등 보물급 문화재의 훼손은 피할 수 없는 급박한 상황으로 몰렸습니다"라는 지난 4월 28일 밤 모 방송국 9시 뉴스 보도는 초보적인 사실조차 확인하지 않은 것이 된다. 보수공사는 작년 11월 초에 시작됐는데 완성되려면 꼬박 일 년이 걸릴 예정이다.

문화재청 자료를 보니 해체된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법당으로,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 집이었던 모양이다. 사진 속 대웅전은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놓인 다포식의 아담한 건축이다.

▲ 대웅전 앞 삼층석탑. 홍단풍나무가 뒤에 있어 마치 가을 풍경 같다.
ⓒ 안병기
대웅전 앞에 서 있는 보물 제533호인 삼층석탑은 정면에서 한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다. 이것은 현재의 대웅전이 있기 이전 또 다른 대웅전의 실체를 시사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3층 석탑은 2중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갖춘 완전한 형태다.

지대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2중 기단 가운데 하층기단의 면석과 갑석, 상층기단의 면석은 가각 4장의 돌로 짜 맞추었으며 상층기단 갑석은 널찍한 한 장의 돌로 이루어진 게 특징이다.

상하기단 갑석의 윗면은 약간 기울었고, 모서리 끝 부분이 약간 치켜 올려져 있다. 탑신부는 각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겨 놓았으며, 1층 몸돌 정면에는 자물쇠와 문고리까지 달려 있는 문짝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윗면의 경사가 완만하나 네 귀퉁이는 바짝 치켜 올려진 상태다. 이 탑은 기단과 탑신부가 간결하여, 조형 미술품의 규모가 작아지고 양식도 간략화 되던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원각국사비. 좌측 사진은 문화재청 자료. 금방이라도 싣고 나갈 수 있도록 싸매져 있다.
ⓒ 안병기
숨 가빴던 순간들... 걷어 내려진 지붕 기와, 꽁꽁 싸매진 원각국사비

만세루 옆을 흐르는 개울을 건너 언덕을 올라가면 고려시대 중기의 승려인 원각국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보물 534호인 원각국사비가 있다. 화재를 피해 대피할 준비를 해놓은 듯 아직도 몸체를 천막으로 꽁꽁 싸매놓은 채로 있는 원각국사비는 화재가 있었던 그날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던가를 보여준다. 비각 지붕의 기와들도 다 걷어내려 한쪽에 쌓아놓았다.

원각국사는 어려서 대각국사 의천의 제자인 교웅스님에게 출가해서 천태의 고승이 된 인물이다. 명종 4년(1174)에 입적하자 왕은 원각이란 시호를 내리고 그의 유골을 영국사에 안치하였다.

비의 형태는 거북 모양의 비 받침인 귀부 위에 비 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일반적인 모습이며, 귀부는 전형적인 고려시대 양식이다. 용의 머리를 형상화한 거북 머리는 퇴화되었고, 거북등의 6각형 무늬와 비를 끼워두는 곳의 덩굴무늬는 생략되었다. 비 몸은 아랫부분이 결실되어 있으며 훼손이 심하다. 머릿돌에는 구름과 용이 형식적으로 새겨져 있고, 앞면 중앙에는 '원각국사비명'이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

전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을 주는데 이는 시대적 특징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 몸에 비하여 비받침이 커서 안정감을 주는 반면, 비 머릿돌이 지나치게 커서 중압감을 주고 있다. <대동금석서>에 의하면 비문을 지은 이는 한문준이고, 건립연대는 고려 명종 10년(1180)이다.

▲ 원각국사비 뒤쪽에 있는 원구형부도와 석종형 부도
ⓒ 안병기
원각국사비 뒤쪽에는 2기의 부도가 있다. 충북도 유형문화재 제184호인 석종형부도는 승려의 사리탑이다. 네모난 바닥 돌 위에 마련된 기단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두 8각이다. 기단의 가운데 받침돌을 제외한 아래·윗받침돌에는 각기 연꽃을 조각하여 둘렀는데 꽃잎은 모두 한 겹씩이며, 그 위로 종모양의 몸돌이 올려져 있다.

바닥 돌에서부터 머리장식까지 모두 6매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석종형 부도이면서도 다른 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이다. 연꽃잎도 모두 한 겹으로 표현되어 있어 고려말·조선초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사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앞쪽에 원각국사비가 서 있는 걸로 봐서 원각국사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충북도 유형문화재 185호인 원구형부도 역시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탑의 기단부는 네모난 바닥돌 위로 8각의 아래받침돌을 세우고, 역시 8각의 위 받침돌을 올려놓은 구조이다. 아래받침돌은 각 면마다 안상을 얕게 새겼고, 위가 반듯한 위 받침돌은 밑으로 한 겹씩의 연꽃무늬를 둘렀다. 탑신의 몸돌은 공 모양이며, 지붕돌은 8각으로 여러 조각들이 생략되어 밋밋하고 투박하다. 지붕돌 위로는 꽃봉오리모양을 한 머리장식을 올려놓았다. 석종형 부도와 같은 연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원각국사비에서 내려오다 보니 산불이 30여m까지 접근해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위가 온통 불타버린 나무와 냉갈 냄새로 진동한다. 보물 제532호 팔각원당형 부도가 있는 조금 떨어진 언덕으로 향한다. 길섶에는 화재의 참담함을 모르는 듯 병꽃이며, 조팝나무 꽃이 피어 있다. 같은 골짜기에서도 피해 정도가 제각기 다르다.

▲ 8각원당형 부도. 불타버린 소나무 사이에 서 있는 모양이 안쓰럽게 느껴진다.
ⓒ 안병기
불에 잔뜩 그슬린 보물 제532호 팔각원당형 부도

그러나 부도가 있는 곳에 점점 가까워지자, 상황은 돌변해 버렸다. 올라가는 계단의 돌들은 검게 그을려 있었으며, 부도를 둘러싼 소나무 숲은 완전히 타버렸다. 만약 화재가 조금만 더 진압이 더뎠더라면 탑신이나, 지붕돌마저 쪼개져 튕겨져 나갔을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나그네를 아찔하게 한다.

부도는 탑신부·머리장식부로 나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8각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기껏해야 높이 1.76m의 작은 부도지만 야무지게 생겼다. 8각형 지대석과 하대석은 한 몸을 이루고 있고, 중대석은 각 면마다 안상을 조각하여 넣었다.

8각을 이룬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고, 한 면에는 직사각형 문을 새겼는데 자물쇠까지 표현되어 있을 만큼 섬세하다. 지붕돌의 각 면에는 기왓골이 새겨져 있고 처마의 곡선이 날렵하다. 머리장식으로는 복발과 보주가 남아 있다. 건립한 연대는 확실치 않다.

거기까지 동행해주신 문화유산 해설사 이상원(70) 선생은 옛날 이 부도 아래에는 만월사라는 절이 있었으며 그래서 유물들이 이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이라 설명하신다. 끝까지 동행해주셔서 감상에 도움을 주신 이 선생님과 은행나무 옆에서 작별했다.

오늘 영국사에 와서 보지 못한 것은 대웅전뿐만이 아니다. 보물 제1397호인 영산회상후불탱도 사진으로만 감상이 가능한 유물이다. 사진으로 본 이 후불탱은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좌우 대칭으로 문수보살과 보현 등 보살과 중생들을 빽빽하게 배치한 그림이었다.

조선시대 불화 가운데 비교적 조성 시기가 빠른 이 탱화는 연대와 제작자가 명확해서 가치가 있고, 또 17세기 전반에서 18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의 불화 양식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인물의 묘사에 있어 부분적으로 다소 경직된 면이 흠이나 단순한 듯하면서도 세밀한 필치를 보여 준다. 이 탱화는 도난 등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진작부터 수덕사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일부 언론이 "조선시대 후기 불화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보물 1397호 영산회후불탱 등 유물 100여점을 트럭으로 옮겨 일부 유물을 지켜낸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고 마치 한숨 돌리는 듯한 기사를 내보낸 것은 잘못이다.

▲ 망탑봉 삼층석탑. 이렇게 높은 곳에 탑을 세운 사람의 원력은 무엇이었을까.
ⓒ 안병기
쓸쓸하게 영국사에서 걸어 나오다 오른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 250여m쯤 올라가니 망탑봉이라는 봉우리가 나온다. 봉우리 정상에는 보물 제 535호 영국사 망탑봉 삼층석탑이 산 아래를 굽어보며 나무관세음보살 명호를 외고 있다. 커다란 자연석 화강암을 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다 3층의 탑신을 올린 형식이다. 탑신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게 몸돌을 쌓아올려 보는 사람에게 치솟는 느낌을 준다.

1층 몸돌에는 문짝모양이 돋을새김 되어 있는데 위·아래가 돌출된 액자형이며 자물쇠는 그려져 있지 않다. 지붕돌의 낙수면은 경사가 완만하며, 추녀는 직선을 이루다가 끝에서 가볍게 들려 있다. 기단을 한 층으로 하고 기단의 맨 윗돌을 생략하는 등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참동안 이 탑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딘가에서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서 있는 위치가 경주 남산 용장골 산기슭에 있는 3층 석탑과 비슷하다. 처음 그 탑을 바라보았을 때 어떻게 이토록 높은 산 바위 위에다 탑을 세웠을까, 이 탑을 세운 사람의 원력은, 신앙심은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생각했었다.

이 높은 망탑봉에 삼층석탑을 세운 그도 필경 그러했을 것이다. 이 3층 석탑은 지난 27,8일의 숨가빴던 화재의 현장을 지켜봤던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4월 27일 오전 11시 30분께 충북 영동군 양산면 가선리 야산에서 일어났던 불이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28일 오후 때마침 불어오던 강풍 때문에 되살아난 곳이 바로 이곳이라 한다.

아! 라는 감탄사는 영국사에도 필요하다

천천히 산을 내려간다. 영국사는 천우신조로 화마를 피했다. 먹고 살기 바쁜 현대인에게 문화재란 절실하게 다가오는 의미가 아닐는지 모른다. 그러나 문화재는 그것이 창조되었던 시대의 사회현상을 읽어내는 문화적 코드이다.

문화적 코드는 일종의 집단 기억이다. 우리는 옛 건축이 보여주는 표정에서 그 집단기억을 읽어낸다. 만일 영국사가 소실되었다면, 우리는 소실된 부분만큼 역사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리는 셈이고, 그것은 우리 시대가 겪은 또 하나의 좌절로 기록될 뻔했던 것이다.

다행히 천년고찰 영국사는 화마를 벗어났다. 그러나 비싼 대가를 치렀다. 영국사 구성요소의 하나인 나무와 숲을 잃어버린 것이다. 당분간은 치유될 수 없는 상처다. 상처가 치유되려면, 다시 숲이 우거지고 거기 새가 깃들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사실 지난 식목일에 화재를 당했던 낙산사는 유홍준씨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볼 만한 유물이 거의 없는 절'이라고 혹평한 대로 숱한 화재로 말미암아 고졸한 멋을 잃어버린 절이다.

거기에 비하면 영국사는 보물이 5점, 천연기념물 1점, 충북도 유형문화재 3점 등 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는 고풍스런 천년고찰이다. 동해 낙산사를 부르기 위해선 "아! 낙산사'라는 감탄사가 있어야 하듯이 이 영동 영국사도 "아!"라는 감탄사 없이 불러선 안 된다는 뜻이다.

이번 양양 낙산사 화재와 영동 영국사 화재는 문화재 관리의 많은 허점을 드러내주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동해 낙산사를 부르기 위해선 "아! 낙산사'라는 감탄사가 있어야 한다는 고은 시인의 말씀은 귀중한 문화재가 제자리에 있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감탄사라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감탄사가 아니라 한숨일 뿐이며, 안타까움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아! 낙산사!" 또는 "아! 영국사!"라는 말을 감탄사가 아닌 한숨으로, 혹은 탄식으로 내뱉기를 원치 않는다. 문화재를 화재로 부터 보호하기 위한 당국의 세심한 대책 마련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점이다.

덧붙이는 글 | 원래 영동 영국사 기행은 지난 4월 24일에 계획된 것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김유정문학기행에 참여함으로써 늦춰지게 된 것이었다. 그러기에 영국사 화재 소식을 듣게되니 더욱 안타까웠다. 

일요일에 가려다 바빠서 가지 못하고 어제 잠시 짬을 내어 둘러 보고 기사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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