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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용신 선생
ⓒ 최용신선생추모회
따사로운 봄기운을 느끼고 3·1절의 깊은 의미도 되새겨볼 겸해서 가까운 지역에 있는 상록수 최용신 선생 유적지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처음 기대와는 너무나 다른 슬픈 마음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초라한 유적지에 관리는커녕 유리창도 두세 군데 깨어져 찬바람에 커튼이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최용신 선생 기념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고 흉물스럽기까지 하였습니다. 선생의 독립정신과 희생적인 삶을 생각하면서 너무나 슬프고 안타까웠습니다.

올해로 85주년을 맞는 3·1절의 의미 그리고 아직도 미완으로 역사로 남겨진 친일 역사의 청산. 그 연장선에서 대접받지 못하는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엇갈린 삶을 생각해봅니다.

독립운동가 최용신 선생의 숭고한 정신이 대한민국에서 정당한 대접을 받고 좀더 구체적으로 일반 국민에게, 지역민(경기도 안산시)에게 와닿는 최용신 기념 사업이 진행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반추해봅니다.

3년간의 짧은 헌신임에도 최용신 선생이 남기고 간 고귀한 정신은 슈바이처, 페스탈로치, 다미안 신부처럼 인류가 영원히 마시는 '사랑의 샘'이 되었다. (류달영, <최용신의 생애> 중에서)

▲ 최용신선생과 샘골마을 사람들이 세운 학원과 어린이(1938)
ⓒ 최용신선생추모회
최용신(1909∼1935) 선생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 자신만을 위한 삶을 모두 버리고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순국한 애국지사입니다.

유관순 열사가 1919년 삼일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순국한 대표적인 애국여성이라면, 삼일만세운동 이후(이전 무단통치)의 문화통치시대에 일제의 식민지 영구화를 위한 정책에 맞서 싸운 대표적 여성 인물은 바로 상록수 최용신 선생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인물로 국민에게 널리 알려진 유관순 열사와는 달리 최용신 선생은 소설 <상록수>의 여 주인공 채영신으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 부끄럽게도 그 이유가 문화정치를 단행한 일제의 철저한 식민정책에 따른 성과물이었습니다.

1919년 거국적인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지금까지의 강압에 의한 무단 통치의 실패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한반도를 영구한 일본의 식민지로 경영하기 위해 문화통치로 전환합니다.

문화통치의 본질은 총칼로 지배하는 것(무단통치)은 그 순간의 효과밖에 없으므로 조선을 영구한 일본의 식민지로 경영하기 위해서는 철학과 종교와 교육 그리고 문화를 앞장 세워서 조선인의 정신세계를 완전히 지배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궁극적으론 '조선' 그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고 일본 국토의 한 부분으로, 완전한 일본인으로 동화한다는 정책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제의 문화통치에 맞서는 계몽운동을 하기 위해 최용신 선생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오지의 농촌 마을(현 경기도 안산시)에 들어갑니다. 산간 오지 조그만 농촌에서 시작해 전국적으로 정신적 독립운동을 확대해나갈 계획을 세웁니다.

농민들과 동고동락하면서 마을에 학원을 세우고 농민들과 어린아이들에게 한글을 깨우치고 민족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학원을 중심으로 일치 단결하여 일제의 핍박에 맞서고 교육운동, 정신적 독립운동을 펼쳐나갔습니다.

이것은 일제의 문화정치에 맞서 언젠가는 조국의 독립을 이루어내기 위한 처절한 투쟁이었습니다. 일제의 온갖 회유와 죽음을 넘나드는 혹독한 탄압은 계속되었으나 최용신 선생은 결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일제의 잔악한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 가난으로 인한 굶주림으로 창자가 꼬여 들어가는 육체적 고통 가운데서도 최용신 선생은 장차 이루어질 민족의 해방과 문화대국으로 발전할 조국의 소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이들에게 한글을 깨우치고 민족정신과 조국의 역사를 심어주었습니다.

▲ 함께 모셔져 있는 최용신 선생과 약혼자 김학준의 묘소
ⓒ 김명옥
결국 선생은 과로와 굶주림으로 교단에서 쓰러져 1935년 26세의 짧은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최용신 선생이 26년간의 짧은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남기고 간 것을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한다면 시골마을의 초라한 학원 건물이나 몇 사람 안 되는 시골 학생이 전부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소중한 가치를 남겼습니다.

희생과 봉사의 정신, 나라 사랑의 정신
늘 깨어서 거짓을 이겨내고 옳은 길을 추구하는 산 정신, 늘 푸른 정신
죽음에 이르러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희망의 정신
아름다운 해방 조국에 대한 소망, 문화대국의 미래상…….

이러한 불굴의 정신을 초지일관 실천한 선생의 전 생애가 하나로 응축되어 '상록수 정신'으로 형상화되었습니다. 자랑스러운 민족의 유산으로 민족사 위에 영원히 남았습니다. 겨자씨는 너무 작아 만지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겨자씨가 자랐을 때에는 모든 나무보다 큰 나무가 됩니다.

▲ 최용신선생의 제자들이 세운 추모비(2003)
ⓒ 김명옥
이처럼 최용신 선생이 죽음으로서 부활한 '상록수 정신'도 지금은 땅속에 파묻혀 조그마한 한 알의 겨자씨처럼 그 가치가 잘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록수 정신'이 그 가치를 온전히 드러낸다면 자랑스러운 민족의 유산으로, 미래의 조국의 역사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나갈 '민족정신'으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최용신 선생의 고귀한 사랑과 상록수 정신을 깨닫고 이어 받아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이뤄나가야 하겠습니다.

최용신 선생의 생애의 참 가치는 학원건물의 규모나 가르친 아동의 수나 지식의 깊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선생의 가슴속에 지닌 일편단심의 값인 것이다. 예수는 하나의 불행한 시골 목수에 불과한 이며, 페스탈로치도 초라한 고아원의 원장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히 미래를 지도하는 존재가 되어 있다. 최용신 선생의 생애도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살벌한 역사에 길이 향기로운 꽃으로 우리 민족의 자랑이 되며, 젊은 생명을 지도하는 힘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우리는 참 고귀한 것과 영원한 것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류달영, <최용신의 생애> 중에서)


▲ 깨진 유리창
ⓒ 김명옥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에 선생의 일기장은 모두 태워졌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편지나 일기가 불시로 수색하는 일본 경찰들의 손에 들어가 뜻하지 않게 감옥에서 고생하는 사람이 무수히 많았기 때문입니다.

최용신 선생을 감시하고 핍박하던 일제의 고등계 형사 오야마와 지역의 친일 인사들은 선생이 순국한 이후 글 좀 아는 근방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최용신 폄하, 정신 격하운동을 조직적이고 대대적으로 펼칩니다.

이때부터 그 누구도 최용신 선생을 입 밖으로 이야기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최용신 선생의 중매로 선생의 제자이던 신명희씨와 결혼하여 만주로 이주한 주의득씨의 증언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내는 최용신을 친언니 이상으로 대했어. 그런데 만주에서 아내가 "꿈속에서 죽은 언니(최용신)가 나타나서 춥다고 자꾸만 방에 들어오려고 하지 뭐예요. 그래서 못 들어오게 막았지요"하고 말하며 그런 꿈을 몇 번 더 꾸었는데 한번도 방에 못 들어오게 했다고 했어. 그 이후에는 그런 언니에게 그러면 안 되는데 후회하면서 몇 날을 끌끌 앓다가 결국 아내는 하늘로 갔어. 최용신이 내 마누라를 데려갔구나 하고 생각했어.

당시에 아내는 이국 땅에 와서 적응을 못하고 향수병에 걸린 것 같아… 근데 최용신 선생에 대한 일제와 오야마의 핍박이 얼마나 심했는지 만주까지 이주해 와서도 잔뜩 겁이 들었던 것 같아… 그러니 그 추운 날씨에도 방에 못 들어오게 문고리를 걸어 잠근 거지… 그 마음은 얼마나 아파을까? 그때는 그 정도였어…

선생이 돌아가시고 다들 선생을 못 잊어 선생의 유품 등을 하나씩 챙겼지… 근데 그것도 나중에는 다들 버렸어… 최 선생 사후인 1935년 이후에는 시대가 점점 험악해져서 최용신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되면은 득될 게 없었거든… 또 오야마와 농촌진흥회의 청년들… 아무튼 그때부터 '최용신은 원산서 못된 짓하고 쫓겨와서 판자대기 집에서 얻어먹고 살다가 안산에서도 인심을 잃고 일본으로 도망가 죽었다'고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더군… 참, 거짓을 진실인 양 이야기해야만 하는 때였거든…(류달영, <최용신의 생애> 중에서)


▲ 절개지에 아슬아슬하게 모셔진 최용신 선생 묘소
ⓒ 김명옥
해방 이후에도 최용신 선생을 괴롭히던 친일세력(당시에 농촌진흥회에 참여하면서 일제로부터 많은 후원을 받으며 농촌계몽운동을 탄압하던 지역의 인사들)은 반성을 하기는커녕 지역의 유지로, 지역의 실력자로 선생의 정신을 재조명하고 유적화하려는 뜻있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온갖 이유로 방해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해방 이후 어두운 사회적 흐름과 친일 세력이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역설적으로 상록수의 "항상 푸르름으로 늘 깨어서 불의를 거부하고 올바르게 진리의 길을 걸어 전진하자"는 정신은 가장 억압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초라한 유적지에 박살난 유리창, 흉물스럽게 방치된 최용신 선생 기념관의 모습이 현재까지도 우리 사회가 친일파의 영향권(유무형의)에 갇혀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인 듯하여 더욱 초라하게만 느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최용신 추모홈(sangnok.netian.com)에 가면 더 자세한 자료를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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