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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소년 왕이 묻힌 단종릉(장릉)이 있는 영월은 서울에서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도 세 시간이 걸린다. 열세 살의 소년이 왕이 되었다가 2년만에 삼촌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열다섯의 나이에 상왕(上王)이 된다. 사육신의 단종 복위 거사가 사전 발각되어 상왕의 자리에서도 오래 있지 못하고 일년도 안돼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땅의 청령포로 유배된다.

단종의 길을 따라 청령포(淸玲浦)에 먼저 들렀다. 청령포는 영월 시가지 중심에서 서쪽으로 3km쯤 떨어져 있으며, 남한강 상류의 지류인 서강(西江)이 곡류하여 반도 모양의 지형을 이루었다. 동·북·서쪽이 깊은 물로 막히고 육지와 이어지는 남쪽은 육륙봉의 층암절벽으로 막혀 있다. 단종도 이곳을 ‘육지고도(陸地孤島)’라고 표현한 바 있었다고 한다.

청령포 안내판 옆에서 배를 기다리며 청령포를 바라보니 당시 의금부 도사였던 왕방연이 단종을 이곳까지 호위하여 왔다가 떠나기 하루 전날 지었다는 시조가 생각난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청령포 입장료 1000원에는 배 삯이 포함되어 있다. 5분만에 우리를 청령포에 실어다 준 조그만 철선에는 존슨 모터가 달려 있다. 자갈밭 길을 잠시 올라가지 단종이 유배되어 와서 두 달간을 묵었다는 집터에는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地)라는 비석만 있고 근세에 지은듯한 단종의 거처에는 단종과 시녀들의 밀납인형이 있다.

조그만 섬 같은 청령포 전체가 한낮에도 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소나무로 덮여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소나무는 높이 약 30m의 600년생 관음송인데 단종의 유배생활을 모두 보았을 것이라 하여 볼 관(觀)자와 피맺힌 울음소리를 들었다하여 소리 음(音)자를 따서 관음송(觀音松)이라 부른다. 현재는 국가지정 문화재로 천연기념물 제349호다.

나무의 나이가 600년이라고 하는 것은 단종이 이 나뭇가지에 걸터앉아서 놀던 시기에는 이미 80년쯤 된 소나무였을 것이라는 추측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 높지 않은 산길을 오르니 바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아래 푸른 물이 소용돌이 친다. 이곳에는 단종이 정순왕후 송씨를 그리워하며 돌을 하나씩 주워 쌓았다는 망향탑도 있으나 필자가 보기에는 요즘에 쌓아놓은 돌무더기인 것 같았다.

이어서 장릉에 도착하여 경내를 둘러보면서, 조선조 왕릉의 특징과는 다소 다른 구조를 발견한다. 네번째의 능행에 따라다녔으니 벌써 자신의 안목이 생긴 것일까.

지금까지 보아온 능들은 홍살문, 참도, 정자각(丁字閣), 봉분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고, 정자각에서는 능의 봉분이 보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이곳의 단종릉은 봉분이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앉아 있으나 홍살문과 정자각은 동향으로 되어 있다.

보통의 왕릉에는 능참봉의 집과 비각만이 있는데 이곳에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고 묻어준 호장(戶長) 엄흥도와, 단종의 묘를 찾아 대군의 묘로 가꾼 영월군수 박충원의 정려각이 경내에 따로 있고 사육신 생육신 등 단종에게 충성을 다한 신하와 궁녀, 노비들의 위패까지 봉안되어 있다. 열여섯 소년 왕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300여 명의 위패에는 성이 없는 무수리 나인들의 이름도 많이 보인다.

홍살문, 참도가 아닌 별도의 능선을 따라 단종릉에 오르니 가뜩이나 외롭게 보이는 봉분에 석양, 석호, 문인석 무인석이 좌우 하나씩밖에 없다. 단종이 폐서인되어 죽은지 177년 후인 숙종 24년에 왕으로 복위되었으나 추존왕의 예에 따른 것이어서 정규 왕릉에 비해 석물이 절반밖에 안된다고 한다.

봉분 아래 능선에 아름들이 소나무가 울창하게 서있는데, 그 사이에 필자의 키 정도밖에 안되는 여린 소나무가 한 그루 서있기에 자세히 들여다 보았더니 정령송(精靈松)이라는 표시 아래 남양주시 문화원에서 보냈다고 새겨져 있다.

아하 그렇구나.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는 15세에 두 살 어린 단종과 대례를 치르고 왕비가 되었다. 18세에 단종이 사사되자 그도 폐서인이 되어 동대문 밖 숭인동에서 하녀들이 구걸해오는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다가 자줏빛 염색기술을 배워 그 염색 일로 생계를 꾸렸다고 한다.

정순왕후는 청상과부로 어렵게 살았으나 천수를 다해 82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숙종 때에 남편이 복위되자 남양주시 진건면에 있는 그의 무덤도 왕비능으로 조성하고 사릉(思陵)이라 했다. 능을 조성하자 사릉의 모든 소나무들이 영월을 향해 누웠다고 한다. 이 인연으로 1984년 남양주시와 영월군이 자매결연을 맺고 사릉에 있는 소나무 몇 그루를 영월의 장릉으로 보내주어 부부의 정령(精靈)이 합치기를 빌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장릉을 내려와 관풍헌을 들리기로 했다. 청령포에 유배되었던 그해 여름 폭우가 쏟아져 단종이 사는 집에 물이 차자 고을 원이 단종을 관풍헌으로 옮겨놓고 감시하고 있다가 금성대군의 역모가 발각되자 후환을 없애자는 신숙주의 간언으로 단종이 이곳에서 사사된다.

관풍헌(觀風軒)은 본래 지방수령들이 공사를 처리하던 동헌으로 김삿갓이 이곳에서 시행된 과거에서 비겁한 장수를 탄핵하는 글로서 장원급제를 하였으나 그 장수가 바로 자기 할아버지라는 것을 나중에 알고는 삿갓을 쓰고 출가했다는 이야기로 더 유명해진 곳이다.

영월읍 시내 한복판에 있는 관풍헌은 자규루(自規樓)라는 누각과 같은 경내에 있었는데, 지금 관풍헌은 불교 표교당으로 쓰고있고 자규루와 관풍헌 사이에는 제재소가 들어서 있다. 지도를 들고 이곳을 찾느라고 같은 골목을 몇 바퀴 돌다가 지나가는 남녀 고등학생에게 관풍헌을 물었으나 모른다고 한다.

그때 일행 중 한 사람이 한 목제 대문을 가리키며 이게 관풍헌이라고 소리친다. 관풍헌 정문 앞이 시내버스 정류장이었고 정류장 표시 옆에 관풍헌의 조그만 안내판이 서있었다.

관풍헌 정문 앞에서 관풍헌을 물었는데도 그곳의 고등학생들이 모른다고 했다. 이것 하나만 보고서 영월군이 단종과 김삿갓이 가져다 준 부가가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고 지적한다면 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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