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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포의 새벽은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것만 같은 구름에 잔뜩 눌려 있었다. 나는 민박집 근처의 삼거리 슈퍼에서 간단한 먹거리를 사면서 주인 여자에게 걸어서 갈만한 길이 어느 방향으로 나 있는가를 물었다.

"뒤쪽으로 가면 장흥이 나오고 똑바로 가면 보성인디, 똑바로 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으면 벌교로 갈 수 있을 거유."

▲ 봄날 아침의 고요한 바다
ⓒ 김성배
여자는 내가 산 것들을 봉지에 담아주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벌교 쪽으로 방향을 잡기로 했다. 가끔씩 개 짖는 소리 외에는 모든 것이 잠들어 있는 것만 같은 조용한 새벽, 나는 여자의 말대로 똑바로 걷다가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길로 접어들었다.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을 때 한 두 방울씩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산을 폈지만 바람이 워낙 강해서 나는 차라리 비를 맞기로 했다. 오른쪽으로 끝도 보이지 않게 펼쳐져 있는 바다, 나는 어쩐지 우중충해 보이는 그 바다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걸음을 내디뎠다. 어쩐지 아무데도 돌아갈 곳이 없는 여행자가 된 심정이었다.

여행자

기형도

그는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육체를 침대 위에 집어던진다
그의 마음속에 가득찬, 오래 된 잡동사니들이 일제히 절그럭거린다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이곳까지 열심히 걸어왔었다, 시무룩한 낯짝을 보인 적도 없다
오오, 나는 알 수 없다, 이곳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내 정체를 눈치챘을까
그는 탄식한다, 그는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은가
모퉁이에서 마주친 노파, 술집에서 만난 고양이까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중얼거린다, 무엇이 그를 이곳까지 질질 끌고 왔는지, 그는 더 이상 기억도 못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는 낡아빠진 구두에 쑤셔박힌, 길쭉하고 가늘은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길 위에서

ⓒ 김성배
빗줄기는 그치는가 싶으면 다시 이어졌고, 거세지는가 싶으면 어느 순간 뚝 그쳤다. 길은 해안선을 따라 끝도 없이 이어졌다. 가끔씩 자동차가 옆으로 휙휙 지나갔을 뿐 걷는 와중에 나는 단 한 명의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가끔씩 마을을 지나치기도 했지만, 비가 와서 그랬는지 아니면 아직 본격적인 농사철이 아니어서 그랬는지 사람의 모습은 쉽사리 보이지 않았다.

배낭을 짊어진 채 두 시간 남짓 그렇게 걷고 나자 오른쪽 다리가 서서히 저려왔다. 가끔씩 등산을 다니기도 했지만 평지를, 그것도 배낭을 메고 걷는 것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육군 보병출신으로 군 생활 내내 걷는 게 일이었던 나는 제대 이후 웬만하면 걷는 걸 피했었다.

어쨌든 그렇게 계속해서 걷다가 나는 어느 한가로워 보이는 마을의 정자에서 잠깐 쉬어가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간간이 떨어지는 빗줄기 속에서 밭을 일구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이었다. 쌀이나 축내는 한량이 된 기분으로, 나는 그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언젠가 한 친구는 여행을 떠나면 자살충동이 인다고 말했었다. 오랜 시간 갇혀 지냈던 사람이 막상 갑작스런 자유를 얻으면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당황하게 되는 것처럼, 자신은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면 행동의 무게중심을 잃게 되고, 급기야는 자신도 모르게 생의 의욕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그 친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 와서는 조금쯤은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 김성배
산을 돌아나가자 또다시 바다가 나왔다. 참으로 기묘한 여행길이었다. 길과 바다는 서로 잊혀질 때쯤이면 다시 조우해 묘한 인연을 만들어 가는 것이었다. 그러한 풍경 속을 네 시간 가까이 걷자, 바다가 멀어지면서 갈림길이 나왔다. 이정표에는 직진하면 보성, 오른쪽으로 꺾으면 벌교가 나오는 걸로 되어 있었다. 나는 오른쪽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드넓은 벌판을 가로질러 하염없이 뻗은 길을 또다시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언젠가 어느 나라에서 사상범들을 고문하는 수법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벽돌을 공터 가득 쌓아놓고 다른 쪽에 그것들을 계속해서 옮겨 쌓게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신념이 굳은 자라도, 그 일을 일주일만 하면 반미치광이가 된다는 말에 나는 스스로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떤 적이 있었다.

그 길이 나에게는 그런 느낌이었다. 두 시간 가까이 걸었어도 그만그만한 길은 도통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우스운 것은 사람에게서 벗어나고자 여행을 떠났음에도 그 길 위에서, 나는 못 견디게 사람을 그리워했다는 것이었다. 다리 힘이 점점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을 즈음, 나는 마침내 조우한 어느 마을의 구멍가게에 들르게 되었다. 한참만에 안쪽의 방에서 한 할머니가 나왔다.

"뉘슈?"
"안녕하세요. 라면 좀 사려구요."
"…끓여먹으려거든 여기서 하구랴. 김치도 쪼매 나눠줄 테니까."

▲ 할머니의 자랑인 귀염둥이 '깐돌이'
ⓒ 김성배
할머니의 배려로 나는 그 구멍가게에서 간단하게 점심 요기를 했다. 장성한 자식들을 모두 서울로 올려보냈다는 할머니는 간만에 손자뻘의 젊은 사람을 만난 게 반가우셨던 듯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다가 당신이 기르고 있는 강아지 '깐돌이'에 대한 자랑도 하셨다.

"요놈이 말야. 여간 영리한 게 아니거든. 글쎄 멀찍이 떨어져 있어도 내가 부르면 부리나케 달려와. 쥐는 또 얼마나 잘 잡는데. 웬만한 고양이보다 낫다니까. 이놈아 아니면 적적해서 못살지. 이 녀석 어미도 그렇게 영리하고 나를 잘 따랐는데 말야."

할머니가 깐돌이라고 부르는 강아지는 내가 사진을 찍으려하자 잔뜩 경계하며 으르렁거렸다. 카메라가 자신과 할머니를 해하려는 물건으로라도 보였던 것일까. 녀석은 할머니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가더니 마침내 소리내어 짖기 시작했다.

해질 녘에

벌교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멀었다. 어느덧 조금씩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길 위에서 나는 그 날 안에 벌교까지 걸어서 도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아야 했다. 그 근처를 지나던 한 농부는 내게 일단 '조성리'로 나가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 조성리로 가는 길에 만난 하천
ⓒ 김성배
조성리로 가는 길에 나는 큰 하천의 지류쯤으로 보이는 물줄기를 만나게 되었다. 다리 위에서, 땅거미가 어둑어둑하게 깔릴 때까지 나는 그 물줄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끔씩,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들이 하늘을 뒤덮을 듯 떼지어 지나가기도 했다.

조성리는 지방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을 지닌 아담한 번화가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과 군데군데에서 좌판을 벌여놓고 있는 아낙네들, 지팡이를 든 노인들, 혈색 좋은 청년들, 먹을 것을 든 어린아이들, 자동차 경적음과 마이크로 떠드는 소리, 그 모든 존재들을 포위하듯 울퉁불퉁하게 도드라진 건물들. 조성리 사람들은 여유롭게, 혹은 뭔가에 분주한 표정으로 그 번화가를 그림처럼 구성하고 있었다.

한 노인이 일러준 대로 나는 그 번화가의 끄트머리 정류장에서 벌교 행 버스를 탔다. 약초로 보이는 것들을 신문지 위에 가득 쌓아올려 놓고 있던 노인은 땀에 흠뻑 절은 채 길을 묻고 있는 여행자를 딱한 눈길로 쳐다봤었다. 노인답지 않게 유난히 깊어 보이는 눈을 가진 그는 내게 무슨 충고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정거장에서의 충고

기형도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의 비가 되는지 알게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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